교류 (2)
16화
"흠, 너무 쉽구나. 귀족과 천민 사이에 까마득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이제 다들..."
대련을 신청한 아이들을 전부 패배시키고 검끝으로 주변을 훑던 알레시아가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기세등등했던 알레시아는 곧장 쭈구리가 되어 목소리를 죽였다.
아무리 귀족 뽕에 취한 알레시아라 해도 맨정신으로 레이에게 검을 들고 까불 수는 없었다.
'레이는 괴물인 것이야...'
자기보다 덩치가 10배는 큰 마물을 레이가 검 두 자루로 때려잡았다는 사실이 알레시아는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침묵하자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대로 대련이 끝나나 했는데 쾌활한 목소리가 카렌의 뒤에서 울려 퍼졌다.
"나도! 나도 해 봐도 될까요?"
요하나가 팔을 번쩍 들고 소리치자 알레시아가 오만한 미소와 함께 턱 끝을 까닥였다.
"얼마든지 오거라."
자신감을 회복한 알레시아가 언젠가 동화책에서 봤던 악역의 대사를 읊었다.
"이대로면 준비운동도 되지 못할 듯 싶으니, 너는 나를 좀 더 즐겁게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노력해볼게요!"
요하나는 검을 제대로 휘두른 경험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목검을 건네받은 요하나가 알레시아의 파지법을 따라 해보며 팔을 쭉 폈다 접기를 반복했다.
언뜻 보기엔 몸을 푸는 것처럼 보였지만, 요하나는 검을 들었을 때 어디까지 리치가 늘어나는가 거리감을 조절하고 있었다.
검이 휘둘러지는 반경을 어느 정도 파악한 요하나가 환한 웃음과 함께 알레시아 앞에 섰다.
"준비됐어요!"
만약을 위해 조금 더 거리를 좁힌 레이가 두 손을 맞부딪쳤다.
"시작."
"이얍!"
요하나가 용기 있게 검을 찌르고 들어갔다.
알레시아는 찌르기를 익숙하게 옆으로 흘리며 도리어 요하나의 명치를 노렸다.
요하나가 허리를 뒤틀며 공격을 피하려 하자 시계 방향으로 검을 돌린 알레시아가 어느새 요하나의 우측을 점하곤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우왓!"
정말 미세한 간극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해낸 요하나가 호다닥 거리를 벌렸다.
"운이 좋구나, 천민!"
"나 베일 뻔했어요!"
둘 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레이가 보기엔 아니었다.
'항상 느끼지만... 요하나는 거리감각이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단 말이지.'
천부적인 재능이라 할만했다.
같은 길이의 목검을 몇 번 휘둘러 본 것만으로 상대의 타격 거리까지 본능적으로 감을 잡았으니까.
알레시아는 자신의 검을 받아낸 요하나가 대견한지 뿌듯한 미소와 함께 거리를 좁혔다.
"어디, 운이 계속 따라주나 한 번 보자꾸나."
쇄액! 타타탁!
확실히 알레시아는 고급 검술을 배운 티를 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줄 알았고, 동작의 연계가 다채롭고 자연스러웠다.
알레시아는 상대가 검술 초짜인 요하나인 만큼 다소 무리한 동작 또한 연습 삼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수십 번의 공방 동안 요하나가 결정적인 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모조리 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어요! 오늘은 운이 아주 좋은 것 같아요!"
"...?"
이 천민이 지금 날 농락하나?
알레시아가 도끼눈을 하고 째려봤으나 요하나의 표정에는 운이 좋았다는 순수한 기쁨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레시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운이 조금 좋다고 수십 번의 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당황하는 알레시아를 보며 레이가 낄낄댔다.
'암, 어떻게 뽑은 레어인데 저 정도 퍼포먼스는 보여줘야지.'
레어 하나 더 뽑아보겠다고 가챠를 또 얼마나 돌려댔던가.
레이는 지난날의 고생이 이 순간 작게나마 보답 받는 기분이었다.
레이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는 동안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알레시아가 검을 고쳐 잡았다.
지금까지 지도를 해준다는 마음으로 힘을 좀 빼고 했는데, 이제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왔다.
촥촥촥촥촥!!
알레시아의 검술이 급격히 거칠어졌다.
갑작스레 빨라진 검속에 당황한 요하나가 몸을 뒤로 뺐다.
요하나는 고민했다.
운이 좋아 공격을 피하고는 있지만, 알레시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레시아의 검술은 보기보다 방어에 치중된 검술이었다.
제 아무리 요하나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몇 번 잡아보지도 않은 목검으로 알레시아의 방벽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잘하는 걸 응용해보자!'
레이는 항상 응용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요하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건 1080° 돌려차기였다.
해답을 찾은 요하나가 알레시아에게 등을 보인 채 운동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으응? 지금 도망가는 것이냐?"
당황한 알레시아가 움직임을 멈춘 사이.
운동장 반대쪽에서 목검을 흔들며 신호를 보낸 요하나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요하나를 보며 알레시아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저 천민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알레시아가 와일드호그가 돌진해오던 광경을 떠올리고 몸을 굳힌 순간 요하나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휘리리릭!
공중에서 회전을 시작하는 요하나를 보고 알레시아가 입을 헤 벌렸다.
알레시아는 짧은 삶을 살아가며 이처럼 족보 없는 검술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알레시아가 경험만 충분했다면 족보 없는 검술에 당황했더라도 일단 거리를 벌린 후 요하나가 착지하는 순간을 노렸겠지만, 불행히도 알레시아는 실전 경험이 일천했다.
"이얍!"
세 바퀴 회전을 끝낸 요하나가 평소에 뻗던 다리 대신 검을 크게 휘둘렀다.
멍하니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알레시아가 그제야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족보가 있고 없고를 떠나 공중 삼 회전 돌려 베기는 위력 하나만큼은 절륜했다.
파각!
"우왁!"
검이 부딪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알레시아가 손에서 무기를 놓쳤다.
목검이 바닥을 도르르르 구르는 소리와 함께 운동장에 경악이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요하나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이겼어요!"
정통적인 대련이야 검을 놓쳤다고 승패가 갈리진 않는다만, 애들 싸움에서 검 놓치면 패배한 게 맞긴 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뛴 요하나가 레이에게 외쳤다.
"운이 엄청 엄청 좋았어요!"
'기만하는 거 봐라.'
레이는 슬슬 의구심이 들었다.
요하나는 그냥 바보인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바보를 흉내 내며 상대방 속 박박 긁는 걸 내심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떠올린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알레시아는 괜찮나?'
알레시아는 패배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 한 번 더 하자구나! 내, 내가 방심했다!"
뒤늦게 재경기를 외치는 알레시아의 위로 그림자가 하나 졌다.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오랜지 빛 눈동자를 지닌 카렌이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술도 졌네?"
*
다음 날.
알레시아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검술 대련에서 한 번 지는 바람에 가오가 좀 상했다고 해도 알레시아가 보여준 우아한 검술은 아이들의 뇌리에 여전히 깊게 박혀 있었다.
식당에서 아이들의 대접을 받으며 떵떵거리는 알레시아에게 카렌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던졌다.
"흥, 수학 대결도 졌으면서."
"..."
"흥, 검술 대련도 졌으면서."
"...."
"거짓말쟁이."
계속되는 시비에 결국 알레시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렌이라고 하였느냐? 너는 천민치고도 염치가 없구나! 내가 설령, 우연이 겹치고 겹쳐 실책을 두 번이나 저질렀다고 해도 너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말인즉슨 져도 너한테 진 건 아니니 입 다물라는 소리였다.
카렌 또한 친구의 승리를 들먹이며 알레시아를 긁어대는 것이 꼴불견이란 자각은 있었다.
허나 알레시아는 이미 본인의 무덤을 너무 깊게 파둔 뒤였다.
"천민과 귀족 사이에선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며?"
"윽!"
"근데 졌잖아."
"그, 그건 우연이 겹쳐서..."
"너 정말 귀족이야?"
"그러하다!
"그러면 천민한테 패배한 허접 귀족이네?"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렸다.
허접이란 단어가... 귀족 앞에 붙을 수 있는 수식이었나?
"지, 지금 뭐라 하였느냐?"
"알레시아는 천민한테 패배한 허~접 귀족이라고."
"...!!"
알레시아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내, 내가 이, 이런 굴욕을..."
부들부들 몸을 떤 알레시아가 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대로는 못 물러난다. 오늘 오후에 아빠가 찾아오기로 했으니 저 건방진 천민의 입을 다물게 해줄 기회는 앞으로 몇 시간도 남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건방진 천민을 아빠에게 일러바치고 싶었지만 두 번의 패배를 시인해야 한다는 쪽팔림과 상대가 레이와 깊게 연관된 보육원의 아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더 이상은 못 참겠구나! 모두 운동장으로 따라나오거라! 귀족이 왜 귀족인지 내가 친히 증명해주겠다!!"
"와아아!!"
볼거리가 생긴 아이들이 숟가락을 머리 위로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방에 있던 아이들도 운동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인파를 보고 같이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장작을 가져오거라!"
알레시아의 명령에 하루 만에 반쯤 추종자가 된 아이 몇이 나무토막을 한 아름 안고 달려왔다.
수북이 쌓이는 장작더미를 보고 흡족히 웃은 알레시아가 아이들을 뒤로 물렸다.
"모두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거라. 고귀한 귀족에게만 허락된 마나의 기적을!"
알레시아는 팔을 높게 들어 올리고 굳이 필요치 않은 주문을 덧붙였다.
"여기 고귀한 핏줄이 명하노니,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여! 죄를 태우는 화염이여! 지금 내 앞에 현현하라!"
레이가 보았다면 분명 뒤통수를 세 대쯤 후렸을 터다.
다행히도 레이가 아침 일찍 일을 볼 게 있다고 사라졌기에, 방해 없이 몇 마디 더 쓸모 없는 수식을 덧붙인 알레시아가 팔을 앞으로 뻗었다.
"파이어!"
화르륵!!
"우와아아아아아!!!!"
붉은 불꽃이 장작을 집어삼키고 높이 타오름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제대로 된 마법을 접한 아이들은 강렬한 충격을 느끼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알레시아를 우러러봤다.
기세가 등등해진 알레시아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카렌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보아라. 이제 더는 거짓말 타령은 하지 못할 것이다!"
너울지는 불꽃을 바라보던 카렌의 눈시울이 금방 붉게 변하였다.
"씨이..."
카렌의 곁에 서 있던 루나가 가만히 카렌을 바라봤다.
루나는 카렌이 어째서 서글퍼하는지 잘 공감하지 못했다.
"흑! 흐윽!"
질시와 열등감이 뒤섞인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독점욕과 승부욕이 강한 카렌은 레이가 항상 자신을 우선해주기를 바랐다.
허나 레이의 관심을 독차지하기엔 카렌의 재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카렌은 성실함을 내세웠지만, 레이가 사실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했다. 노력했는데, 이제는 보육원 친구도 아닌 마법까지 부릴 줄 아는 진짜 귀족이 레이 곁을 떡하니 차지하려고 치근대고 있었다.
카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루나나 요하나가 레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면 숟가락이라도 들이대 볼 수 있었지만 귀족은 안 되었다.
알레시아가 진짜 귀족이라면, 더더욱 쫓아내야 했다. 저 귀족보다 우리가 우수함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 레이가 이곳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흐윽! 루나..."
카렌이 루나의 손을 잡아왔다.
"루나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마법도 쓸 수 있을 거야. 저런 허접 귀족보다 훨씬 더 멋진 마법을. 그렇지?"
루나가 카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카렌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허나 카렌은, 최근 들어 레이 일로 몇 번 틱틱 댔을지언정.
루나가 처음 보육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른 아이들과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곁을 지켜주었다.
그러니까 루나는.
처음 사귄 친구인 카렌을 위해서 마법 한 번쯤은 펼쳐줄 수 있었다.
루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빵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든 레이가 끙끙대며 보육원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아르노에게 백작이 몇 시간 안에 보육원에 도착할 것이란 소식을 전해들었다.
'애들 간식부터 좀 맥이고... 입단속 시킬 것 좀 시키고, 용모랑 복장 좀 단정히 하고 대기하라고 말해두면 되겠지.'
대충 계획을 정리한 레이는 자기가 없는 사이 보육원에 별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이미 멀리서부터 운동장 한가운데 모닥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낮에 캠프파이어... 알레시아 짓이네."
큰 문제는 없을 터다.
대외비라고 하나 귀족들 마법 익히는 거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딸내미 목숨 값을 빚진 필립스 백작이 알레시아가 애들 앞에서 기초 마법 시현 한 번 했다고 트집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
떠들석한 보육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레이가 빵을 떨어뜨렸다.
반쯤 '개안'된 눈이 흐르기 시작한 마나를 시각화해 억지로 풍경 위에 겹친다.
보육원을 흐르던 하늘이 온통 붉게 변했다.
"아니지, 아니야. 저건 아니야."
레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벌써 그런 걸 하려고 들면 안 돼."
근육에 깃든 마나가 신체를 폭발적으로 가속시켰다.
"그건 너무도 비상식적인 성취야."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결코 남에게 내보여선 안 돼."
저 재능이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도저히 감당키 힘든 마수가 사방에서 뻗쳐올 터다.
"제길."
레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등급 측정을 잘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