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5화 (15/446)

교류 (1)

15화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물의 사체를 회수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현실적으로, 9살 먹은 꼬마가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가설보다 이제 막 마나를 각성한 아이가 천운이 겹쳐 와일드호그를 죽였다는 게 훨씬 그럴 듯했다.

증거만 없다면 백작 또한 '레이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고 납득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허나 편지를 보아하니 지미가 백작에게 와일드호그가 어떤 수단과 방식으로 참살되었는지 자세히 보고한 게 틀림 없었다.

'지미라면 난도질 좀 했다고 검기의 흔적을 못 알아볼 리 없으니.'

레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필립스 백작은 분명 관대하고 이성적이며 말이 참 잘 통하는 귀족이었다.

레이의 성취를 알게 된다면, '적절한 대가'를 매개로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가 백작에게 정보를 숨긴 건 역시나 리스크 때문이었다.

나이를 좀 먹으면 철부지 꼬맹이였던 놈들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기 시작하겠다만, 현시점에서 레이의 성취는 지나치게 앞서 있었다.

아무리 이성적인 필립스 백작이라도 불세출의 천재처럼 보이는 레이를 보고 눈이 돌아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아,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비밀을 지키겠다고 백작 뚝배기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니.

편히 휴식을 취하라 당부한 아델이 자리를 비켜준 후 침대에 한 시간 정도 뻗어있던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온몸이 쑤시네. 며칠 더 고생하겠어. 근데 알레시아는 어디..."

삐걱!

힘차게 열린 문으로 밝게 빛나는 금발이 너울졌다.

레이가 깨어난 걸 확인한 알레시아가 사뿐사뿐 뛰어왔다.

"레이! 일어났구나!"

"너 왜 그렇게 말짱하냐?"

스쳤다곤 하나 와일드호그에 한 번 치인 것치고는 굉장히 쌩쌩해 보였다.

'아, 쟤는 내 등에 업혀서 퍼 잤구나.'

레이가 죽을 둥 살 둥 하며 산을 내려올 동안 알레시아는 등에 업힌 채 코까지 골며 숙면을 취했다.

보육원에 도착한 후엔 아델에게 신성력으로 치료까지 받았으니 활기가 넘치는 게 충분히 이해됐다.

레이가 굉장히 꼽다는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자 알레시아가 축 처진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왜 그런 것이냐?"

레이가 자기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 절반을 가로지르는 상처 위로 거즈와 비슷한 천이 덧대져 있었다.

상처를 만져보니 전투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와일드호그에 매달려 있다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피부가 찢어졌던 것 같은데. 눈깔 안 뽑힌 게 다행이지. 고개 안 쳐들었으면 평생 지팡이 쥐고 다닐 뻔했어."

"으우..."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알레시아를 향해 레이가 턱을 괴었다.

"뭘 고민해?"

"귀족을 미끼로 쓴 천민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가 좀 그렇구나..."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악!"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알레시아가 뒷머리를 쓱쓱 비비며 투덜댔다.

"흉 안 지게 관리 잘하거라. 타고난 얼굴도 별로인데 하자까지 생기면 안 되지 않느냐."

"그걸 네가 왜 걱정해?"

"레이, 나는 잘 생긴 사람이 좋다. 하지만 레이는 눈매가 사나워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구나."

"지금 시비거냐?"

"그러니까 정진하라는 의미이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알레시아가 잠시 딴청을 피우다 평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보다 레이, 듣고 놀라지 말아라. 내가 오늘 아주 진기한 것을 보았다!"

"어이구, 우리 아가씨는 이 보잘것없는 보육원에서 대체 어떤 진기한 것을 보셨을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천민을 보았다! 레이 말고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천민이 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레이가 다시 한 번 알레시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이틀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보육원에서 알레시아를 보호하게 되었다.

귀족 영애가 보육원에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으므로, 백작가 사용인의 동의 아래 알레시아는 잠시 동안 가짜 평민 신분을 얻게 되었다.

문제는 알레시아가 이러한 합의안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자기가 귀족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점이다.

알레시아의 입을 틀어막길 포기한 레이는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지켜봤다.

말 끝마다 '천민! 천민!'거리며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다니는 탓에 따돌림이나 당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알레시아는 보육원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귀족이라 칭하는 알레시아를 보육원 아이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쫓아다녔다.

살면서 귀족을 한 번도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있어 알레시아라는 존재는 굉장히 신비롭고 우아하게 다가왔다.

"귀족은 그리 천박하게 걷지 않는다. 뒤꿈치부터 바닥에 닿아 쿵쿵 소리가 나지 않느냐."

"그, 그럼 이렇게 걸으면 되나요?"

"허리가 너무 굽혀졌구나. 엉덩이에 좀 더 힘을 주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도록 하여라."

보육원에 때아닌 교양 붐이 일어났다.

여자아이들은 알레시아의 비위를 맞추며 귀족의 교양에 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남자아이들은 귀족의 하얀 피부를 본답시고 난간을 붙잡고 알레시아가 머무는 방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컨데 카렌의 경우, 알레시아가 귀족이라는 소리를 믿지도 않았고, 알레시아를 데려올 때 레이가 잔뜩 다쳐서 돌아온데다, 레이에게 자꾸만 친한 척을 하는 알레시아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아직 '삐친' 상태를 유지 중이라 레이에게 뭐라 따질 수도 없어 더욱 애가 탔다.

그런 카렌의 마음을 모르는 레이는 시끌벅적한 보육원을 지켜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주 소문 다 내고 다녀라. 필립스 가의 영애가 여기 있다고."

벽을 탕탕 내려친 레이가 아이들의 이목이 쏠린 것을 확인하고 외쳤다.

"다들 수업 준비해!"

몸뚱이 상태가 영 말이 아니긴 했지만 수업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시간표를 확인한 아이들 중 몇몇이 우르르 교실로 몰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레시아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결국 교단 옆에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은 알레시아가, 수업을 듣다 말고 손을 벌벌 떨며 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레, 레이..."

"또 왜?"

"천민들이 구구단을 할 줄 아는구나..."

천민들은 숫자를 열까지밖에 못 셀 것이라 여겼던 알레시아가 충격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레이가 알레시아의 뒤통수를 몇 번이나 더 후려야 얘가 정신을 차릴까 고민 하던 순간, 교실 끝자락에 앉아있던 카렌이 책상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거짓말쟁이! 자꾸 귀족 흉내 낼 거야?"

"거짓말쟁이? 지금 나보고 한 소리인가?"

"그래, 이 거짓말쟁이야. 귀족도 아니면서 귀족 흉내나 내고. 얌전히 걷는 법이랑 귀족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교양도 모르는 천민이 구구단 좀 할줄 안다고 기세등등하구나."

"그러는 너야말로 귀족이라면서 구구단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거야?"

"구구단쯤이야 나는 걸음마 할 때 떼었다."

"거짓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보던가!"

"호오, 지금 내게 수학으로 도전하겠다는 건가? 그 도전, 받아주마. 못 배운 천민에게 귀족이 왜 귀족이라 불리는지 알려주는 것도 관용이라 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시작된 수학 배틀.

둘 사이 낑긴 레이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이런저런 문제를 출제했다.

카렌과 알레시아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연산력은 카렌이 나은 듯 했지만 나이가 하나 많은 알레시아가 답을 찾아내는 감각이 더 좋았다.

승부가 길어지자 카렌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는 알레시아를 이기기도 힘들고, 이기더라도 근소한 차이밖에 보여주지 못할 터였다.

카렌은 알레시아의 콧대를 꺾어 놓고 싶었다. 자기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말이다.

갈등을 거듭하던 카렌은 결국 이를 꽉 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렌이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자 알레시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흥,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구나."

허나 도망간 줄 알았던 카렌은 얼마 안 가 익숙한 얼굴을 한 명 데리고 교실로 복귀했다.

레이가 경악했다.

"아니 좀 치사한 거 아니냐? 여기서 그 비대칭 전력을 쓰겠다고?"

"...?"

난데없이 카렌에게 끌려온 루나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 맹해 보이는 모습에 알레시아가 자신만만히 소리쳤다.

"내 다음 상대인가? 얼마든지 더 데려와 보거라. 우둔한 천민에게 귀족의 위대함을 가르쳐 주겠다!"

*

"우에에에... 우에에엥..."

루나에게 일방적으로 개털린 알레시아가 자기 무릎을 껴안은 채 교실 한구석에서 질질 짜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내가 천민에게 패배할 리가..."

우는 알레시아를 내버려 두고 레이가 운동장을 가리켰다.

"난 그만 가볼게. 태권도 수업 있어서."

"우에에엥..."

계속해서 질질 짜던 알레시아는 레이가 정말로 교실을 나가버리자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분노를 드러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귀족의 위엄을 세워야 하느니라!"

근데 어떻게?

두뇌 싸움에선 도저히 방금 그 괴물 같은 소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이 명확했다.

저게 내가 아는 그 천민이라고? 그게 말이 되나? 레이가 나를 놀리려고 다른 영지에서 귀족을 데려온 게 아닐까?

끙끙 앓아가며 쓰라린 패배를 곱씹던 알레시아가 자기 가슴 아래를 바라보았다.

천민에게 귀족의 위엄을 세울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결정적인 수단을 알레시아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마법은 남에게 함부로 보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마법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천민들에게 함부로 드러냈다간 아빠에게 무지하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축 처진 얼굴로 고민을 거듭하던 알레시아가 운동장을 내다봤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전부 모여 동일한 동작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알레시아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래! 마법이 안 된다면 검술을 보여주면 되겠구나!"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를 발견한 알레시아가 무릎을 탁탁 털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슬그머니 기어나오는 알레시아를 보고 카렌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거짓말쟁이잖아?"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말을 가려서 하거라, 못 배운 천민!"

"귀족이라면서 천민한테 졌잖아."

"그, 그건 방심해서 그런 것이다! 아직 몸도 회복이 덜 되었다! 그러니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거라!"

씩씩댄 알레시아가 발차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상한 것을 가르치는구나. 저걸 대체 왜 배우는 것이냐?"

"지금 레이가 가르쳐준 태권도 무시하는 거야? 너는 이렇게 멋있는 발차기 할 줄 알아?"

"우문이구나. 대체 발차기를 익혀 어디에 써먹는단 말이냐? 천민이라고 전장에서 칼을 버리고 다리로 싸우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 그건...!"

이번만큼은 카렌의 답변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레이는  몸 쓰는 감각이나 미리 익혀 두라고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지 무술로서 가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카렌을 향해 비웃음을 드러냈다.

"진정한 귀족은 발길질 따위는 하지 않는다. 너는 검을 쓸 줄 아느냐?"

"다, 당연하지!"

"흥미롭구나. 나와 한 번 검을 겨뤄보겠느냐?"

알레시아의 도발은 아이들, 특히 남자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평소에도 막무가내로 막대기를 들고 기사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알레시아를 감쌌다.

"알레시아님은 검술도 배웠어요?"

"진검 들어봤어요?"

"저, 저랑도 대련 한 번 해줄 수 있어요?"

"알레시아님은 강해요?"

"검기 날릴 수 있어요?"

열광적인 반응에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보거라. 원한다면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가르침을 내려주도록 하마. 영광으로 알거라."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가 중얼거렸다.

"저건 정말로 일방적이겠군."

알레시아는 비록 교양일지언정 고급 검술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반면에 보육원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검술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로부터 오는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지켜보는 아래서 알레시아를 필두로 한 목검 대련이 시작됐다.

퍼퍽!

"으악!"

휘릭- 타닥!!

"와악!!"

빠각!

"아아악!!"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레이는 가까이에서 대련을 지켜봤으나 알레시아는 대련을 신청한 보육원 아이 대부분을 2합 안에 마무리 지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결과.

심지어 패배한 아이들 중에는 알레시아보다 몇 살 연상의 남자까지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 재차 선망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카렌이 손을 까닥였다.

뒤에서 검술 대련을 지켜보던 요하나가 쪼르르 다가왔다.

"카렌, 나 불렀어?"

"요하나, 저 거짓말쟁이 이길 수 있겠어?"

"으응? 음..."

잠시 고민한 요하나가 방긋 웃었다.

"노력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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