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시아 (4)
14화
"도움을 청하러 왔네."
"아, 아니 백, 백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서 서류를 보던 지미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을 꿇으려는 지미를 멈춰 세운 필립스 백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단 듣게. 알레시아가 사라졌네. 시녀를 농락하고 도망쳤다더군. 이 도시 안이야 얼마든지 활개치고 다녀도 안전하겠지만 되도록 빨리 찾아내고 싶군."
"아, 아, 그렇군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을 정리한 지미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실종되셨습니까?"
"요정의 날개에서 시녀에게 옷을 입어보라 권하고는 사라졌네. 시간은... 3시간이 안 되었겠군. 영주성의 고용인들이 전부 나가서 찾다 안 되자 내게 보고가 들어왔네."
"다행히 오래되진 않았군요. 근데, 으음..."
"혹시 아가씨께서 마나를 각성했습니까?"
갑작스러운 매튜의 질문에 백작을 호위하던 모하메드가 곧장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엄하다!!"
마나는 귀족을 위한 특혜에 가깝다.
평민들은 상상도 못할 지원을 몰아받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마나를 각성하게 된다.
그들은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기초적인 검술과 마법을 배운다.
허나 어린 귀족의 성과에 대해 타인이, 심지어 평민이나 천민이 궁금증을 드러내는 건 굉장한 결례였다.
모하메드의 분노는 지당했으나 백작이 손을 휘저어 입을 막았다.
"왜 물어보는 것이지?"
"아가씨께서 재능이 뛰어나시다면 지금쯤 마나를 각성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2년은 더 걸리시겠죠. 잘못하면 마물들의 이목을 끌 겁니다."
"한 달 됐네. 도움이 됐나?"
"..."
지미와 눈을 마주친 매튜가 지도를 가져왔다.
지미가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는 시그니 산맥 쪽을 가리켰다.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두고 일단 시그니 산맥 주위를 탐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레시아는 예전부터 산을 좋아했네."
"그건... 안 좋은 소식이군요. 설령 확률이 낮다 해도 시그니 산맥 근방부터 탐문을 진행해야 합니다. 백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도시 안은 비교적 안전합니다.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가장 위험한 곳부터 확인하는 게 맞습니다."
"도움이 됐군. 인력을 빌려줄 수 있겠나? 보상은 충분히 하겠네."
"매튜."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사무실 아래로 내려갔다.
지미 또한 사무실을 나서며 백작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간단한 무장만 마친 후 직접 시그니 산맥으로 가보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겠네. 어서 준비해 오게."
"알겠습니다."
문을 나서는 지미를 모하메드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식한 암흑가 우두머리인줄 알았는데, 상황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백작이 지도를 살피며 말했다.
"잔뼈 굵은 용병이야. 이런 일에는 기사보다 낫네."
"죄송합니다."
"됐네. 말을 더 준비하고 병사들을 불러모으게. 최소한의 필수 인력만 남기고 전부."
"명 받들겠습니다."
*
필립스 백작이 지미의 사무실을 방문하고 한 시간 후.
알레시아라고 판단되는 아이를 시그니 산맥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이 확보됐다.
곧장 비상이 걸렸다. 예비 병력들이 전부 소집됐고 지미 또한 패밀리를 박박 긁어모았다. 백작령에 머물던 용병 또한 싸그리 고용됐다.
지미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사람 찾는 일에 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그게 또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추적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병사들은 도리어 알레시아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수색에 혼선을 줄 수 있었다.
패밀리의 지휘까지 모하메드에게 일임한 지미가 매튜와 함께 적극적으로 현장을 수색했다.
그리고, 성과가 나왔다.
"이건..."
침을 한 번 삼킨 지미가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와일드호그의 흔적입니다."
"와일드호그는 산맥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것으로 아네만."
"..."
"여긴 아직 시그니 산맥 초입일세."
"..."
침묵하는 지미를 향해 백작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와일드호그가 상대라면 병력을 너무 분산해서는 안 됩니다. 5인 1조로 편성한 뒤 신호탄을 나누어준 후 수색을 계속해야 합니다."
"지금도 병력이 부족해 수색이 늦어지는데 5인 1조로 병사들을 편성하자고?"
"..."
"...그리 하게."
백작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음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미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미와 매튜는 이번 일이 잘못되면 목이 날아가도 이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물론 필립스 백작은 관대하고 이성적인 귀족이었으나, 딸아이의 찢어진 시체를 보고도 그 이성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숨을 깊게 쉰 지미가 매튜와 함께 와일드호그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쫓았다.
'빌어먹을. 해가 지지만 않았어도.'
병력들은 길게 대열을 갖춰 산을 타고 올라갔고, 패밀리와 용병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다른 흔적이 없는지 수색하고 있었다.
허나 해가 진 상황에서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일반인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지미와 매튜조차 낮보다 수색 속도가 배는 늦어지는 중이었다.
'이건 위험하다. 정말 위험해.'
와일드호그가 무엇을 노리고 인간의 구역 가까이 접근했을지는 정황이 너무 분명했다.
불안이 미친 듯이 차올랐다.
지미조차 이럴진대, 알레시아의 아버지인 백작의 심정은 어떠할지 지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산맥을 계속해서 수색했다.
전진하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수색은 한층 더 수월해지겠으나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지미는 잎사귀에 묻은 혈흔을 하나 발견했다.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하루 이상 지나지 않은 혈흔이다. 그리고, 인간의 것이었다.
"시발."
지미는 도망가고 싶었다.
이후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매튜의 목소리가 산속을 메아리쳤다.
"이리 와보십시오!!"
지미가 먼저 도착했고, 이어서 백작과 모하메드가 도착했다.
백작의 호흡은 이미 더 가빠질 수가 없을 만큼 거칠어져 있었다.
백작의 눈치를 한 번 살핀 매튜가 자신이 발견한 것을 가리켰다.
"아가씨께서 머문... 흔적처럼 보입니다."
거대한 무언가에 짓밟힌 듯 박살 난 모닥불 사이로 백작에게 익숙한 책이 하나 보였다.
[바람의 정령 루시아 : 제국 여행기]
"큭... 크크큭... 으흐흐흐흐흑..."
백작이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백작이 찢어져 나뒹구는 알레시아의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붉게 물든 눈물이 새하얀 침대보에 뚝뚝 떨어졌다.
입술을 꽉 깨문 지미가 모하메드에게 말했다.
"모하메드 경, 경께서는 백작님을 모시고 돌아가 주십시오. 남은 수색은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가세. 가서 봐야지. 내 눈으로 봐야겠네. 수색을 계속하게."
"..."
백작을 말릴 방도는 지미에게도, 모하메드에게도 없었다.
날도 밝았고, 이제 알레시아와 와일드호그의 흔적이 대놓고 이어져 있었다.
조금 더 흔적을 따라가자 둔감한 사람이 보아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여기저기 혈흔이 묻어 있었다.
몸을 휘청이는 백작을 모하메드가 지탱했다.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는 건 모하메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군요."
지미가 중얼거렸다.
"이건... 인간의 혈액이 아닙니다. 마물의 것입니다."
입으로 혈흔을 빨아본 지미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누군가 와일드호그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확신할 수 있나?"
"확신합니다."
죽어버린 백작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이미 꺼져버렸다고 생각한 희망이 미약하게나마 되살아났다.
백작이 다시 자기 다리로 몸을 지탱했다.
혈흔을 계속 추적하자 얼마 안 가 모두가 발견할 수 있었다.
와일드호그의 거체가 난도질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
잠시 침묵이 돌았다.
언뜻 봐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지미가 조심스레 물었다.
"영애께서 직접 행하셨을 가능성은?"
"내 딸은 괴물이 아니네."
고개를 끄덕인 지미가 와일드호그의 사체로 향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백작령에 정착한 모든 사람을 통틀어 지미보다 짐승의 사체를 분석하는 데 우수한 인력은 없었다.
지미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와일드호그의 사체를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자세히 살폈다.
살덩이가 뭉개진 방향에 따라 와일드호그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지미의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지미는 계속해서 사체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어서 하게."
"마법은 아닙니다. 강력한 검기에 당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애초에 검기가 아니면 아무리 날카로운 명검이라도 와일드호그의 가죽을 이렇게 찢어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곤죽이 된 와일드호그의 창자를 주물러 본 지미가 의아함을 내비쳤다.
"굉장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겁니다. 헌데 와일드호그를 사냥한 자는... 와일드호그를 죽이고 나서 굳이 난도질을 행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검기에 의한 상흔을 지우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굳이 검기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그렇습니다.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좀 더 수색해봐야겠지만, 아가씨께서 무사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정체불명의 검객이 검기의 흔적을 지우려고 시도한 것을 보았을 때..."
"정체를 숨기고, 불순한 의도로 알레시아를 데려갔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백작이 호흡을 골랐다.
여전히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상황은 호전되었다.
비록 알레시아가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방금 전까지 갈기갈기 찢긴 딸의 시신과 마주하는 걸 각오하고 있었다.
살아만 있다면, 괜찮았다. 살아만 있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는가?"
"수색을 계속함과 동시에 이 검객을 쫓아야 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어떤 혐의가 특정 된 것은 아닙니다만... 기사급 인원이 더 필요합니다. 상대는 강력한 검기를 다루는 소드 엑스퍼트입니다."
"모하메드 경."
삐익-!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은 기사를 전부 이곳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백작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하메드가 검을 뽑아들었으나, 이내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푸른 깃털을 가진 영물, 브릿지였다.
브릿지가 백작의 팔뚝에 내려앉아 편지가 묶인 다리를 내밀었다.
백작과 지미의 눈가가 동시에 좁아졌다.
꽁지깃이 위로 치솟은 브릿지는, 백작이 지미에게 하사한 전서구였다.
일단 편지를 열어본 백작이 첫 문장을 읽었다.
"집 나간 알레시아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지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백작은 중간 문장을 생략하고 마지막 단어를 읽었다.
"지미 드림."
모두의 시선이 지미에게 돌아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미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아, 아니, 생각해보니 그거 딱 봐도 그 새끼가...!!"
"됐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것 같군."
아직 앳된 글씨체로 이런 건방진 소리를 귀족에게 보낼 인간은 백작이 기억하기로 한 명밖에 없었다.
"레이 그놈이로군. 생각해보니 알레시아를 잃어버린 시녀가 레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어. 우리보다 먼저 산에 올라 와일드호그로부터 알레시아를 구했나 보군. 편지에 적혀있길, 지금 알레시아는 보육원에 있다고 하네."
"하, 하하!"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지미가 손아귀를 말아쥐며 희열을 드러냈다.
'레이, 네가 해냈구나! 해냈어! 으하하하! 네가 우리 모두를 구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허나 과정 따위야 상관없다.
필립스 가의 영애를 구해냈다는 결과 하나가 중요했다.
'대체 왜 편지를 저따위로 보냈는지는 모르겠다만...'
심장이 떨어질 뻔한 지미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리를 일으키려 했다.
"잠시 그대로 있게."
"예? 예, 알겠습니다."
지미의 등허리에 편지지를 놓은 백작이 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한 백작이 지미에게 말했다.
"큰 공을 세웠군, 지미. 자네가 키운 보육원의 아이가 내 딸을 구해냈으니, 이는 곧 자네의 공이라 할 수 있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헌데 의아하군."
"...?"
"자네는 와일드호그를 죽인 무인이 엑스퍼트급이라 확신했네."
"..."
"나도 레이가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정보는 들었네. 허나 그 아이가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고작 9살인데 말이지. 헌데 자네의 반응을 보니 레이가 와일드호그를 죽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군."
지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제야 지미는 아가리를 너무 과하게 털어댔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것이..."
"되었네. 어쨌든 이번에 받은 도움은 잊지 않겠네."
"가, 감사합니다."
"다 썼군. 이제 일어나게."
편지를 묶어 브릿지를 날려보낸 백작이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을 내리누르던 끔찍한 압박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백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자 모두가 등을 돌린 채 숲속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자리를 지키던 백작이 눈가를 닦았다.
진이 완전히 빠져버렸으나 그럼에도 귀족의 위엄을 잃을 수는 없었다.
다리에 힘을 준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것이 있으니. 모하메드 경, 기사 세 명을 차출해 와일드호그를 베어낸 검객의 흔적을 쫓으라 하게. 흔적이 보육원으로 이어져 있으면 복귀하라 이르고."
"명 받들겠습니다."
"또한 믿을 만한 사람에게 가장 빠른 말을 주어 보육원으로 보내게. 알레시아가 무사한지만 확인하면 되네. 무사하다면, 딸아이는 이틀 뒤 내가 직접 데리러 가겠네."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
"알레시아의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 병사들의 수색은 계속 진행시키게.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정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겠어."
*
레이는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도 손아귀에 탱탱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닿는 걸 느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가 제 손에 닿아있는 게 어린아이의 볼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끄응... 으응?"
간신히 눈을 뜬 레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에 닿았던 촉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열려있는 문으로 붉은 머리카락이 휙 지나가는 게 시야에 스쳤다.
"끄으응... 쟤 아직 삐쳐 있었지."
손에 묻은 액체를 혀에 대보자 짠 맛이 났다.
"울긴 또 왜 울었... 근데 내가 왜 보육원 안에 누워있더라."
레이는 그제야 아르노와 이야기를 하다말고 기절해 쓰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무리하긴 했지."
하루종일 산을 뒤졌고, 와일드호그와 전투 직후 알레시아를 업고 몇 시간을 산길을 내려와 보육원까지 도달했으니.
사실 중간부터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을 찬찬히 되새겨본 레이는 마지막에 가서 몸을 굳혔다.
"내가 편지를... 뭐라고 썼더라."
레이는 직감적으로 자기가 병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그렇지, 편지를 앞뒤 맥락도 없이 그런 식으로 적어 보내다니.
이게 좀 가벼운 사안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알레시아가 엮여 있는 일인지라 오해를 받았다간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뒷수습을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아델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일어났구나."
"치료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델. 또 은혜를 입었네요."
신성력을 지닌 사제의 치료는 본디 부르는 게 값이다.
베푼 호의를 잊지 않고 감사를 전하는 레이의 모습에 아델이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 새가 네 잠자리를 계속 맴돌더구나. 널 찾아온 게 맞니?"
"아이고. 벌써 답장이 왔네."
이리 된 이상 백작이 개떡 같은 편지를 찰떡 같이 알아들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레이가 머리를 짚으며 편지를 펼쳐보았다.
[레이,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너일 것으로 짐작한다.
알레시아를 구해주어서 고맙다. 이번에 입은 은혜는 잊지 않겠다.
지미에게서 네가 와일드호그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렀을지 자세하게 전해 들었다. 부디 무사했으면 좋겠구나.
이틀 뒤에 찾아가겠다. 그동안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
추신 1) 다음부터는 편지를 좀 더 길게 적어 보내도록 해라.
추신 2) 귀족에게 남의 이름을 팔았다간 사기죄나 귀족 모욕죄로 처벌될 수 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다.]
"..."
다행히 상황은 오해 없이 잘 풀린 듯 했다.
천민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필립스 백작은 허용 가능한 최대한도의 고마움을 레이에게 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육원에 이틀 뒤에 들리겠다는 것은, 알레시아를 수색하는데 백작령의 모든 인적 자원을 가져다 썼으니 그걸 다시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배경이 있을 테고.
다만 레이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편지의 세 번째 문단이었다.
'들켰다, 시발.'
검기로 와일드호그 족친 거, 들킨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