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시아 (2)
12화
산은 넓다.
뒷산도 제대로 뒤져보려면 한세월인데 그 측면에는 제국에서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넓이를 자랑하는 시그니 산맥까지 붙어있다.
시그니 산맥 초입에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레이는 지금 제가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안 되겠는데."
확률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알레시아가 정말 등산을 했고, 레이가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해도.
하루종일 산을 뒤져봤자 알레시아와 마주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로부터 2시간 더 막무가내로 산을 뒤져 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접자, 접어."
따로 추적술이라도 배워놨으면 모를까 이건 진짜 답이 없었다.
"지미와 매튜를 끌고 오는 건 너무 억지라고 생각해 말았는데... 판단을 잘못했어."
레이는 혀를 차면서도 크게 긴장 없는 얼굴로 지면에 주저앉았다.
이변이 없다면 지금쯤 알레시아는 거리를 돌아다니다 백작가 사람에게 잡혀 영주성으로 돌아갔을 터다.
만약 진짜 등산을 했다 해도 영주성 뒷산 좀 찔끔 올라가서 헤매고 있겠지.
"그대로 보육원으로 돌아갈까."
여기서 반대 방향으로 산을 넘어가면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지미 보육원이 있는 마을이 나왔다.
엉덩이를 툴툴 턴 레이가 발을 옮겨려다 말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똥 밟았다.
"짐승의 변인데."
지면에 발을 문지른 레이는 그대로 땅을 보고 걸었다.
지워지기 시작한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얼마 더 걷다 보니 뻣뻣한 검은 털 몇 개를 주울 수 있었다.
"흐음."
반복하자면, 레이는 추적술이나 사냥술을 결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허나 이 뻣뻣한 검은 털은 정말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조금만 더 찾아볼까."
*
알레시아는 약간 실망했다.
해가 다 들어가도록 산속에서 동굴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멋진 동굴을 찾아 아지트로 활용하려 했던 완벽한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말았다.
조금 꿍해 있던 알레시아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당장 비가 올 날씨도 아니니, 동굴이야 느긋하게 찾으면 된다.
다만 안전한 숙박을 위해 불을 지펴야 했다.
돌과 나뭇가지를 모아온 알레시아는 열심히 돌로 테두리를 만든 후 나뭇가지를 쌓아올렸다.
"흠, 흐음."
흡족한 얼굴로 자신의 완성품을 바라본 알레시아가 살짝 몸을 숙인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월한 발화(發火)를 위해선 도구가 필요했으나 알레시아의 수중에는 발화석이나 성냥이 존재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알레시아가 나뭇가지로 손을 뻗었다.
"파이어."
마나가 응집되며 서로를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너울거리며 물결친 마나가 마침내 뜨거운 빛을 뿜어내자 마른 나뭇가지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후욱!
"아자!"
히히, 벌써부터 이리 마법을 잘 다루다니. 역시 나는 천재로구나.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면서 알레시아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가방을 뒤졌다.
[바람의 정령 루시아 : 제국 여행기]
요 몇 년 새 알레시아가 가장 자주 읽었던,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여행기였다.
이 책을 들고 읽을 때마다 어떤 건방진 놈이 한 소리씩 하긴 했지만 알레시아는 여전히 루시아의 제국 여행기를 사랑했고, 선망했다.
따뜻한 불의 온기를 마주한 채 제국 여행기에 적힌 '홀로 여행할 때의 주의점'을 읽던 알레시아가 피곤함을 느끼며 가방을 뒤적였다.
집에서 몰래 챙겨온 고급 실크 천이 가방에서 주르륵 딸려 나오는 순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야."
"꺄아악!!"
알레시아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레이가 한심하단 투로 한마디 했다.
"그 책 쓴 년 사기꾼이라니까?"
"히익! 흐약! 흐윽...?"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른 알레시아가 책을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했더니 못 배운 천민이로구나."
"오냐, 천민이다."
어두워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땀범벅이 된 레이의 얼굴엔 피로감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참 오래도 알레시아를 찾아다녔다.
알레시아가 불을 피우지 않았다면 더 헤맸거나, 늦었을 것이다.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타박했다.
"루시아 그 년, 여행기 대부분이 지가 가보지도 않은 곳 허구로 지어내서 적어놓은 거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옆구리에 끼고 다니냐?"
"되었다! 그 얘기 좀 그만하거라! 루시아님을 그 이상 모욕하면 아무리 너라 해도 더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툴툴거린 알레시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큼, 근데 레이... 혹시 혼자 온 것이냐? 날 찾아서?"
"일단은?"
"따라온 사람은 없느냐?"
"없어."
"호오, 그럼 우릴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단 의미로군."
입꼬리를 실룩거린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준 채 자기 앞의 바위를 발로 툭툭 쳤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귀족과 마주 앉을 수 있는 특혜를 네게 하사하도록 하마."
"야, 너 말투 존나 이상해. 그냥 옛날처럼 해."
"이익! 이 못 배운 천민이! 말대답하지 말고 빨리 앉거라!"
레이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알레시아,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어허, 귀족에게 자꾸 말을 함부로 할 것인가!"
"...세상에는 사기꾼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루시아 같은 입만 산 사기꾼은 넘쳐나죠."
"사기꾼? 사기꾼이라니. 너는 대체 무얼 보고 루시아님을 자꾸 사기꾼이라 매도한단 말이냐?"
"소드 마스터도 루시아 그 년이 써놓은 것처럼 마경을 헤집고 다녔다간 100% 죽습니다."
"어허, 그렇기에 루시아님이 최고의 모험가이자 여행가라고 찬사받는 것이다. 천민은 그런 것도 모르나?"
레이가 웃었다.
"가끔 헷갈리고는 합니다."
"무엇을?"
"우리 알레시아는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레이! 적당히 하거라! 지엄한 제국의 법도가 있거늘! 어찌 천민이 귀족에게 입을 함부로 놀린단 말인가!"
잠시 고민한 레이가 한마디 했다.
"바보."
"어찌 천민이!"
"멍청이."
"귀족에게 입을 함부로...!"
"똥개."
"야!! 적당히 해!!"
"알레시아, 그거 알아?"
한 박자 쉰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반쯤 뽑아냈다.
"알레시아가 좋아하는 야생에는 귀족 천민 구분이 없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뺀 알레시아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나 기뻤는데 계속 타박이나 놓고. 괜히 겁주지 말고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해보아라. 부디 날 슬프게 하지 말거라."
알레시아의 눈가가 일렁인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검을 반쯤 뽑아낸 그대로 검집을 내려놓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재밌는 이야기라.
마침 적당한 이야기가 생각난 레이가 넌지시 물었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를 어떻게 찾아낸 것 같아요?"
"오! 마침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나는 분명 아버님의 기사가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올 줄 알았다."
"한 번 맞춰보세요."
"흐음... 천민에겐 고귀한 피를 알아보는 더듬이라도 달린 것이냐?"
그래야 생존율이 올라가니까.
본능적으로 고귀한 피를 알아보고 알아서 바닥을 기는 거지.
알레시아는 자신의 추론이 썩 논리적이라고 자찬했다.
레이는 '저저 시발년'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상대가 기껏해야 10살 언저리라는 것을 되새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가씨, 동네 강아지가 마스터급 무인보다 뛰어난 감각이 무엇인지 아세요?"
"동네 강아지가 마스터급 무인보다 뛰어난 감각이 있다고? 난 처음 듣는구나!"
"바로 후각입니다. 어지간한 똥강아지가,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보다 냄새 맡는 분야에 있어선 더 낫다고 볼 수 있지요."
"흥미롭구나. 확실히, 개들은 산 하나를 넘어가도 후각으로 목표를 쫓을 수 있다고 들었다."
"마물도 마찬가지예요."
"마물도 후각이 좋은 것이냐?"
"후각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물은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거든요."
마물에게 있어, 마나는 매혹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주의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마나를 품고 있는 생물은 참으로 먹음직한 사냥감이나, 강대한 마나를 쌓은 존재는 굉장히 위협적인 적이었다.
이를 잘 구분하기 위해 마물들 다수는 마나를 감지하는 기관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제 막 마나 각성해서 자기 마나 제대로 갈무리할 줄도 모르고 줄줄 흘리고 다니는 애송이는, 마물들에게 굉장히 매혹적이고 찾기 편한 먹잇감이라는 뜻입니다."
시드니 산맥 깊은 곳에서 활동하던 마물이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들의 영역에 접근할 정도로 말이다.
"루시아의 책에는 안 적혀 있었습니까?"
"..."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알레시아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그, 그, 레이, 사실 천민한테 알려주면 안 되는 비밀이다만. 사실 난 말이다..."
"저는 아가씨를 쫓아온 게 아닙니다."
레이가 반쯤 뽑아놨던 검을 다시 들었다.
"안타깝게도, 저는 아가씨를 쫓아온 게 아닙니다. 아가씨를 쫓았으면 1주일을 줘도 찾아내지 못했을 테죠."
스르릉
달빛 아래 유려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마물을 쫓아왔습니다. 아주 익숙한 마물을."
"크르르르..."
짐승의 울음소리가 서늘했던 밤 공기를 데운다.
벌벌 떨리기 시작한 알레시아의 어깨 너머로, 눈을 붉게 물들인 존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필 네 녀석이냐."
와일드호그.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
다만 덩치가 호랑이만 하고, 마기를 받아들인 육체의 강도는 여느 짐승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저 검디검은 마물은 분명 마나를 좀 다룰 줄 아는 무인이 와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였다.
"거, 너희랑 내가 인연이 좀 깊긴 한가 봐. 주로 창자였지만."
"크르르르..."
와일드호그의 울음소리에 맞춰 알레시아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자기 뒤를 힐끗 돌아본 알레시아가 곧장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힉! 흐악!"
물러나다 말고 모닥불에 걸려 넘어질 뻔한 알레시아를 레이가 받아냈다.
레이의 옷깃을 꽉 붙잡은 알레시아가 헉헉대며 물어왔다.
"레, 레이! 저 마물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어, 좀 애매하네요. 힘도 좋고, 마물 중에서도 특히 질겨서 칼이 안 박히거든요. 창자만 해도 무지하게 질겨서 그... 어쨌든 되게 안 찢어져요."
"그럼 우린 죽는 건가...?"
"걱정 마세요, 아가씨."
한 발 앞으로 나간 레이가 와일드호그와 대치했다.
"제가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아가씨는 어서 도망치세요."
"레이! 어떻게 널 혼자 두고 내가...!"
"어서 도망가세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주세요! 빨리!"
"흑, 흐윽! 레이! 잘 버티고 있어야 한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눈물을 펑펑 흘린 알레시아가 다급히 산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멀어지기 시작한 알레시아를 흘깃 바라본 레이가,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와일드호그에게 물었다.
"뭐해? 안 쫓아가고."
"크르르르...!!"
알레시아는 두 가지를 간과했다.
첫째. 와일드호그는 애초에 알레시아의 마나를 노리고 인간의 영역 근방까지 접근했다. 레이 또한 마나를 품고 있었지만, 그 양이 쥐꼬리만 하고 제어에 능숙한 탓에 와일드호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둘째. 와일드호그는 달아나는 사냥감을 쫓아 들이박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와일드호그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간다는 건 대놓고 어그로를 끌겠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크르륵!!"
레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지나친 와일드호그가 곧장 알레시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알레시아의 비명이 산속을 메아리쳤다.
"꺄아아아아아악!!!"
"거 사기꾼 조심 좀 하라니까."
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