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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1화 (11/446)

알레시아 (1)

11화

"없어."

지미의 단언에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어요?"

"없다니까.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우리한테 차례가 돌아오겠냐? 그게 다 약점인데."

이번만큼은 지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레이는 '최근 백작가가 곤란해하고 있는 사안이 있다면 알아봐 달라'고 지미에게 부탁했었다.

큰 기대를 안 한 건 사실이지만,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오자 속이 좀 답답해짐을 느꼈다.

"흐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래? 다짜고짜 고개 들이밀고 강짜부터 부려보지."

"제가 대가리부터 들이민 적이 많긴 하지만 각이 아예 안 나오는 곳으로 몸을 던지지는 않아요."

필립스 백작이 귀족 중에서도 융통성이 굉장히 훌륭한 편이기는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보육원에 기사를 파견해서 기초 검술 교육 좀 해달라는 개소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일단 빚이라도 지워볼 심산으로 정보를 캐봤지만 소득은 전무.

레이가 고민에 빠져 있자 지미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돈주머니를 꺼내놓았다.

"200골드 정도 될 거야. 내 비자금이긴 한데 그냥 가져다 써라. 연습용 검 스무 자루는 살 수 있겠지."

"고마워요."

"그리고 정 안 되겠으면 백작가 영애께라도 넌지시 여쭤 보던가. 영애께서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잖아."

"그건 좀 힘들겠네요."

몇 년 전, 6살 때였나.

레이는 다짜고짜 백작가를 찾아가 이렇게 외쳤다.

백작령 암흑가의 다섯 수장 중 하나인 지미의 대리인이 백작님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소!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명백한 미친놈이었다.

당시에도 반쯤 미쳐가지고 도박수를 던진 건데, 마침 정문을 지나가던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레이는 경비병에게 맞아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백작님이 아끼는 말괄량이 따님이신데 어설프게 수작을 부릴 바에야 백작님을 직접 찾아가는 게 나아요. 알레시아가 요즘 저랑 대화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영애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한 거 아니었나?"

"귀족 예법 같은 걸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눈도 안 마주치려 해요."

"큭큭. 무슨 일인지 알겠네."

10살이 넘어설 때쯤 해서 귀족가의 자제들은 '진정한 귀족'이 되기 위한 여러 학문을 배우는데 이때부터 '신분'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진다.

'귀족 뽕? 신분 뽕? 뭐, 그런 걸 잔뜩 채워주지.'

너는 고귀한 핏줄이니 뭐니. 귀족의 본분이 어쩌고 아래 것들의 본분이 저쩌구.

신분제 사회에서 지도자가 되는 데 꼭 필요한 수업이긴 했다.

어쨌든 이제 막 제대로 된 귀족 교육을 받기 시작한 알레시아는 그야말로 신분 뽕이 최대치로 차 있을 시기였다.

'근래엔 나를 불결한 벌레와 비슷한 무언가쯤으로 여기던 거 같던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을 걸어오던 때가 생각나 조금 많이 아니꼬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사람 무시하는 법부터 배워서는 쯧쯧.

남은 차를 쭉 들이켠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볼게요. 대장간이나 가봐야겠네요."

"레이."

레이를 멈춰 세운 매튜가 당부했다.

"네가 원하는 정보는 위험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계속해서 알아보겠다. 그러니, 괜히, 사고는 치지 마라. 제발."

"걱정하지 말아요 매튜. 제가 언제 '수습 불가능한' 사고를 치고 다녔나요."

"인과관계를 뒤집지 마라. 어떻게든 수습을 했기 때문에 우리 목이 아직 예쁘게 붙어 있는 거다."

낄낄거린 레이가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갔다.

지미와 매튜는 나란히 두통을 느끼며 얼굴을 쓸었다.

"이러다 스트레스 때문에 죽겠어. 작위고 뭐고 다 포기하고 낙향하고 싶은걸."

"이미 한 번 낙향을 해서 온 곳이 여기야, 대장."

"이런 맙소사."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

옛날 어떤 전설적인 검사가 했다는 말을 되새기며 지미가 벌레 씹은 표정을 했다.

*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이라 해봐야 이 근방에 한 군데밖에 없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는 대장간을 찾아간 레이는 판매대를 한 바퀴 돌아보다 검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을 발견했다.

슬그머니 다가가 검을 뽑아보려는 레이를 판매대를 지키던 남자가 제지했다.

"애들은 가라. 무기는 신원이 확인된 어른들만 살 수 있다."

눈을 깜박인 레이가 되돌아가 지미나 매튜를 데리고 대장간으로 와야 하나 고민했다.

'쯧. 귀찮지만 어쩔 수 없나.'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농기구를 보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헉! 너는 고아 수집가 레이!"

여기까지는 가끔 있는 일이었다.

뒷골목을 손에 쥔 지미와 그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끊임없이 고아를 주워가는 레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인사였으니까.

"레이? 레이라고? 지금 레이라고 했나?"

다만 레이는 간과하고 있었다.

근래들어 소문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킬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대장간 물건을 구경하던 손님들이 레이의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허억! 진짜 레이잖아! 지미의 비밀병기!"

"레이? 감정이 말살된 암살자로 키워졌다던 그 살인 기계 말인가?"

"적대하는 조직원 수십을 혼자서 토막 냈다고 하더군!"

"맙소사! 지미 그 악당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어찌 저런 극악무도한 존재를 길러 냈단 말인가!"

껄껄, 지랄들을 하시네요.

고개를 저은 레이가 진열되어있던 검 한 자루를 뽑아냈다.

날카로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장간의 고객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우르르 도망갔다.

"..."

혼자 남은 판매대의 남자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다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물었다.

"검 좀 봐도 되나요?"

"봐, 봐주십쇼!"

"아니, 뭐, 예, 검 좀 볼게요."

고개를 다시 한번 저은 레이가 검신을 손가락으로 통통 튕겨보았다.

아무 이유 없이 해본 거였다. 레이는 딱히 검을 감정할 줄 몰랐다.

'마나만 살짝 불어넣어 보고 문제없으면 사자.'

깡!

멀쩡했던 검신의 중앙이 제 혼자 똑 부러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

"..."

판매대의 남자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가 레이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황급히 판매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결함이 있었네."

깡!

깡!

깡!

네 자루째 검을 깨먹은 레이가 자기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녹슨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저기 녹슬어 고물 취급받았지만 왕년엔 꽤나 고급품이었다는 진실을 레이는 그제야 눈치챘다.

'금속의 성분과 밀도가 균일하지 않으니 마나를 불어넣었을 때 크랙이 발생하는군.'

"이걸 어쩐다."

어쩌긴 어째. 멀쩡한 놈 나올 때까지 계속 돌려봐야지.

환생하고 나서 현실 가챠 하나는 이골나게 하고 있는 레이다.

망설임 없이 다음 검으로 손을 뻗는데 두꺼운 손이 가냘픈 레이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기사 양반이라도 방문한 줄 알았는데 꼬맹이였군. 소문이 마냥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어깨를 으쓱인 레이가 물었다.

"지미 소개받고 왔는데 괜찮은 검 좀 있습니까?"

"영주성에 납품할 정도의 고급품은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

덮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은 대장장이가 대장간 안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지미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니, 한 자루쯤은 내어줘야겠군."

검을 받아 마나를 미약하게 흘려본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을 뒤졌다.

"얼마나 드리면 되죠?"

"200 골드."

레이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바깥에 진열된 롱소드가 10골드도 안 하는 걸로 압니다만."

"네게 건넨 한 자루가 밖에 걸어둔 결합품 스무 개 가치도 못할 것처럼 보이나?"

"제기랄. 바가지 씌운 거면 다음에 지미 데리고 올 거예요."

"다음부터는 단골 할인도 고려해보지."

결국 있는 돈을 다 털린 레이가 허리띠 양쪽에 검을 꽂아넣고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에휴."

어쨌든 검을 구했으니 됐다.

슬슬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떤 여자 하나가 대로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시선을 안 줄 수가 없었던 게, 여자는 다른 이들에 비해 굉장히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채 사람들 사이를 다급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가지 더해 맨발이었다.

머리가 좀 아프신 분인가 싶어 여자를 자세히 살펴본 레이가 눈가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뭐야? 샐롯이잖아?"

샐롯의 동생이 라일락의 저녁에서 일하고 있는 탓에 얼굴을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영주성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의아함을 느낀 레이가 뛰어다니던 샐롯을 붙잡았다.

"샐롯."

"뭐야?! 누구...!! 아, 아? 아! 레이, 레이구나!"

"안녕하세요, 샐롯. 혹시 무슨 문제 있어요?"

"아! 그러니까! 레이, 제발 나 좀 도와줘. 사례는 꼭 할게."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설명해 봐요."

샐롯의 사연은 과거에도 종종 발생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말괄량이 아가씨인 알레시아가 사용인을 골탕먹이고 실종되는 일은 뻔질나게 있었으니까.

문제는 기껏해야 영주성 내에서 발생했던 실종 사건이 영주성 바깥에서 벌어졌단 점일까.

고급 옷가게에 들려 알레시아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분칠을 받던 샐롯은 알레시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거리로 뛰쳐나왔다.

레이는 헐떡이는 샐롯을 향해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아요, 샐롯.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치? 혹시 주변에... 그 지미님 친구들? 그런 사람들과 같이 아가씨 좀 찾아줄 수 있을까?"

"샐롯, 지랄 말고 정신 좀 차려요."

레이는 웃는 얼굴 그대로 목소리를 굳혔다.

"당장 백작가로 돌아가 알레시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세요."

"레이! 그러면 나는...!"

"기껏해야 매질을 조금 당하거나 급여 몇 달 깎이겠죠.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요. 어차피 알레시아는 멀리 가지 않았을 테고, 이 근방은 안전하고, 찾아만 낸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화로운 내일을 시작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만약, 만약의 경우.

샐롯이 알레시아를 찾아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고, 그 사이에 알레시아가 어떤 사고에 휘말렸다면.

"샐롯, 이런 일에 목숨 걸지 마요. 부탁이니까 지금 바로 백작가로 돌아가 그 말괄량이 아가씨가 모습을 숨겼다고 보고해요. 가족을 위해서라도요. 일이 잘못되면, 샐롯 한 명으로 책임질 사안이 아니게 돼요."

입을 꽉 깨문 샐롯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게 맞겠지.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마워. 근데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너도 아가씨를 한 번 찾아봐 줄래? 아가씨께선 널 귀여워했으니까, 혹시 마음이 통할지도 몰라."

"알겠어요. 늦기 전에 돌아가요."

샐롯은 몇 번 더 레이에게 확답을 받고는 영주성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기지개를 피며 몸을 푼 레이는 뒷목을 긁적이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별일이야 있겠어. 어... 등산만 안 했다면."

필립스 백작령 영주성엔 작은 뒷산이 하나 있다.

크기도 작고 맹수도 살지 않아 어린아이가 올라가도 저체온증만 주의하면 문제 생길 일은 없었다.

그 자그마한 뒷산 측면에 북부로 길게 이어지는 시그니 산맥만 붙어있지 않았다면 누가 올라가도 안전했을 것이다.

"...상황이 좀 묘하네?"

철 없는 귀족 아가씨께서 항상 부르짖던 모험과 보물을 떠올린 레이는 새로 구매한 검을 반쯤 뽑았다가 집어넣었다.

까짓 거 나도 한 번 등산 좀 해보지, 뭐.

만약의 만약이지만.

필립스 백작에게 그리 갈망하던 빚 하나를 달아둘 괜찮을 기회가 될지도 몰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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