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0화 (10/446)

10화

문답을 주고받던 레이가 책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루나는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며 레이의 수업이 재개되길 기다렸다.

루나의 태도는 언뜻 순종적으로 보였으나, 아직 여유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보고 레이는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밑천 모조리 털리는데 2년이면 충분하겠군.'

오늘 하루 만에 남들은 몇 개월을 걸릴 진도가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정말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레이가 지닌 학문적 지식이 모두 털릴 때까지 2년이면 떡을 칠 것이다.

레이가 기껏해야 학부생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이건 정말이지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과거 책에서나 누군 7살에 6개 국어를 마스터 했네, 누군 12살에 정수론을 가르쳤네, 누군 17살에 세계 난제를 풀어냈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았지만.

눈앞에서 범접 불가할 천재를 마주하니 확실히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지미가 느낀 심정이 이런 거겠군.'

따지자면 지미 쪽이 좀 더 심각했을 터다.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밑천이 모조리 털리는 데까지는 2년이지만, 앞으로 몇 개월 이내에 루나는 레이가 지닌 한계를 간파할 것이다.

벌써부터 숫자를 바라보는 루나의 천부적인 감각에 말려 수업을 하다말고 입이 막혀 고민에 잠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레이는 2년 시간을 벌었다고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2년 안에 마법사든 뭐든 데려와서 다른 분야에 재능은 없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머리 속으로 계획표를 짜본 레이가 다시 책을 펴려고 하자 뒤에 매달려 있던 카렌이 귀를 콱 물었다.

"아프다, 아파."

"루느믄 슨긍쓰 애애!"

"뭐라는지 안 들리는데?"

"왜 루나만 신경 써줘!"

카렌이 레이의 어깨 위를 머리로 콩콩 찧으며 억울해했다.

"요즘 맨날 루나만 특별 수업해주고!"

"너가 원해서 같이 듣게 해줬잖아."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렌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아침에 삼각형 넓이 공식 외우고 있다가 저녁에 유리함수의 정적분이 로그함수임을 증명하고 있는 괴물이 누굴까?

눈앞의 루나다.

최근에 레이는 어제 진도를 어디까지 뺐는지 헷갈려 노트를 한참 뒤적일 지경이었다.

카렌도 나름 19×19단까지 외워가며 루나를 쫓아가기 위해 열심히였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카렌, 이런 속담이 있어."

"응?"

"뛰는 기사 위에 나는 마법사 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카렌이 속담의 뜻을 알아듣고 빽 소리쳤다.

"레이는 너무해!"

"어허, 선생님한테는 존댓말."

"레이는 바보예요! 레이는 멍청이예요! 레이는 똥개예요!"

"자꾸 그러면 벌점이야."

"레이는 나빠!"

끝끝내 다시 책을 피는 레이의 모습에 카렌은 귀를 한 번 더 질근질근 물고는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찰랑이는 카렌의 묶음 머리를 향해 레이가 경고했다.

"삐친 척하지 마. 이번엔 안 속아."

요 몇 년간 카렌이 앙탈을 부릴 때마다 쫓아가 달래주었더니 근래 들어선 시답잖은 이유로 삐진 척을 하며 레이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기 시작했다.

본인이 9살짜리 꼬맹이한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한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선을 그었다.

"난 분명 이야기했어. 또 이불 뒤집어쓰고 나 기다리지 마."

자신의 노림수가 들통 났다는 걸 깨달은 카렌이 입을 댓 발 내민 채 레이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수업을 재개했다.

루나와 레이를 번갈아 노려보던 카렌은 울먹이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레이가 한숨 쉬었다.

'이번엔 진짜로 삐치겠군.'

어디보자. 다음번에 매튜한테 부탁해서 말이라도 태워줘야겠다.

말을 타고 백작령 중심부까지 가서 카렌이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파는 음식점에 들러 보자.

식사를 마치고 보육원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화가 풀려 있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수학 이론을 읊던 레이가 자기 뺨을 찰싹 쳤다.

루나라는 괴물을 상대로 생각 없이 이론만 줄줄 읊었다간 역으로 병신 되기 십상이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미간을 누르며 집중을 되뇌는 레이의 모습을, 루나는 변함없이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

볼을 있는 대로 부풀린 카렌이 운동장에 있던 요하나와 데런을 발견하곤 다가갔다.

둘은 어떻게 해야 허공에서 몸을 4바퀴 이상 회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 중이었다.

"팔을 붙이면 회전이 빨라져."

"발은 마지막에 뻗어야 해."

"근데 누나, 이미 둘 다 하고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럼 우유 많이 마셔서 힘을 키우자!"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둘 사이에 끼어든 카렌이 자기 불만을 투덜댔다.

"레이가 변했어. 요즘 맨날 루나한테만 붙어있고. 노력하는 사람이 좋다고 해놓고서, 사실 똑똑한 사람이 좋았던 거야. 레이는 거짓말쟁이야."

뜬끔 없는 카렌의 투정에도 요하나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레이가 카렌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내가 맨날맨날 좋아한다고 말해줬는데. 나는 레이를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레이는...!"

"응, 나도 레이가 정말 좋아!"

"?"

예상도 못 한 타이밍에 요하나가 이니시를 걸어오자 카렌이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마주친 요하나가 세상 순수한 얼굴로 헤벌쭉하게 웃었다.

"레이도 우리를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카렌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 요하나? 저번에는 분명 데런을 좋아한다고 나한테 얘기했잖아?"

"응, 데런도 좋아해. 근데 레이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옆에서 듣던 데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요하나 누나를 정말 좋아해. 하지만 레이 형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레이 형은 강하고 멋지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둘 다 이상해!"

"카렌, 화내지 마.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할게."

안 된다.

이야기가 전혀 안 통한다.

카렌의 '좋아'와, 요하나와 데런의 '좋아'는 용어만 같이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리키고 있었다.

혼자 씩씩거리다 결국 설명을 포기한 카렌이 나무판을 요하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잡아줘. 이번에야말로 성공시켜 볼래."

"괜찮겠어?"

"나도 할 수 있어."

입을 삐죽인 카렌이 최선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허나 세상 일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님을 방증하듯, 카렌은 다시 한 번 착지에 실패해 몸을 크게 휘청였다.

"우악!"

무리를 한 탓에 카렌은 꽤 크게 발을 헛디뎠다.

무릎이든 팔꿈치든 어디 하나를 제대로 깨먹을 위기 속에서 카렌은 겁을 집어먹었다.

그 순간.

후욱!

때마침 불어온 강풍이 카렌의 가벼운 몸을 잠시 잠깐 지탱해주었다.

그틈을 놓치지 않고 카렌의 양팔을 붙든 요하나와 데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잡았어!"

"다행이야."

"...?"

생전 처음 경험 해보는 강풍의 위력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카렌이 문득 보육원 건물로 눈을 돌렸다.

아직 교실에 남아있던 루나가 차분한 눈으로 카렌을 바라보다, 고개를 낮춰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바지를 털어낸 카렌은, 무릎이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레이와 루나가 있을 교실을 향해 입을 삐죽이며 자기 방을 찾아 들어갔다.

*

카렌이 레이와 대화를 안 하기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다.

레이는 겸사겸사 지미의 사무실을 들려 차를 얻어 마시고 있었다.

"검 멋지네요, 지미."

조금은 맥락 없이 느껴지는 레이의 칭찬에 지미는 당황하면서도 흡족한 얼굴로 책상 위에 검을 내려놨다.

"그래? 미래의 소드 마스터께서 보기에도 내 검이 괜찮아 보이나?"

지미가 누구인가? 한때 잘나갔던 용병이다.

용병에게 있어 무기는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대부분의 용병이 좋은 무기를 구비하는데 집착했다.

지미 또한, 기본적으로 사치에 무관심했지만 무기에 관해서 만큼은 달랐다.

그는 용병 시절 좋은 검을 구하기 위해 빚까지 져가며 자금을 마련했고, 그때 구입했던 검이 참 많이도 지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은퇴 후에도 자기 마누라라며 관리를 잘 해왔기에 지미의 검엔 여전히 고급진 윤기가 흘렀다.

"그러니까 레이, 이걸 어떻게 구하게 됐냐면..."

껄껄 웃으며 물어보지도 않은 과거를 신나서 떠벌리던 지미가 무심코 매튜를 쳐다봤다가 몸을 굳혔다.

매튜가 자기 애검을 코트 안쪽으로 슬금슬금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지미는 기억해냈다.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 용병업에 뛰어든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미숙하고 약해빠졌던 그 시절.

시큼한 땀 냄새와 큼직한 근육을 자랑하던 업계 선배들이 자신을 삥 뜯을 때마다 써먹었던 레퍼토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어이, 지미! 코트 좋아 보이는데!

어이, 지미! 오늘 신고 온 신발이 참 멋지군!

어이, 지미! 웬일이야! 방패를 다 들고오고!

"익... 이익..."

과거의 악몽을 떠올린 지미가 부들거리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안 돼!! 안 된다 이놈!! 내 검만큼은 안 돼!! 이건 내 마누라야!!"

"지미,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언제 검이라도 바치라고 그랬어요?"

"그, 그렇지? 하하, 내가 괜히 흥분했네!"

"근데 지미, 들리지 않아요?"

"...? 들리긴 뭐가 들려?"

"영지 크기가 쪼그라드는 소리가요."

"이런 빌어먹을!!"

분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미가 자기 애검을 검집 채로 레이에게 던졌다.

"꺼져!! 가지고 꺼져 버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이고, 농담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낄낄 웃으며 손을 흔든 레이가 책상의 서랍 안쪽을 가리켰다.

"근데 칼 한 자루는 새로 마련해야겠더라고요. 저금해 놓은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조금만 빌려줄 수 있나요?"

"끙, 그냥 필요한 만큼 가져가. 검 몇 자루쯤이야, 어차피 수련하다 보면 자주 부숴 먹게 될 테니."

"고마워요. 사양하진 않을게요. 근데 제가 부탁했던 정보는 어떻게 됐나요?"

"백작가 관련된 거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자세를 고쳐 앉은 지미가 진지한 눈으로 레이를 마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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