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9화 (9/446)

계륵 (2)

9화

레이는 썩 억울한 심정이었다.

정황이 좀 이상하긴 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레이에게 지미와 매튜 몰래 검기를 200 m 떨어진 바위를 향해 날려보낼 방법은 없었다.

뻔뻔한 레이를 앞에 두고 눈을 부라리던 지미가 다른 바위를 가리켰다.

"잔말 말고 검기 한 번 더 방출해봐."

"마나 후달려서 힘든데요."

"잔말 말고."

기실 레이도 지미도 매튜도.

난데 없이 검기가 증발한 레이의 검신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의심은 드니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은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것이다.

"끄응, 힘든데..."

몇 번 튕기며 지미와 매튜의 속을 박박 긁어 놓은 레이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 노릴 표적은 150 m가량 떨어져 있는, 방금 전 매튜가 공격을 가했던 바위였다.

레이는 평정을 가장하면서도 몇 번인가 검자루를 다시 쥐었다.

고였던 침이 한 번 넘어가고.

손가락 마디만큼 작게 보이는 바위를 향해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베어낸다. 파괴해. 검을 휘둘러.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서. 닿는다. 사선에.'

검이 휘둘러진다.

후욱!

이번에도 역시 검기가 허공에 증발했다.

다만 조금 전과 다르게, 모두의 시선은 레이가 표적으로 했던 바위에 결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까득!

뭐라 형용키 힘든 괴이한 소음과 함께.

바위 앞의 공간에 얇은 실금이 새겨졌다.

분별도 힘든 찰나의 순간.

얇은 실금 너머로 결단코 존재해선 안 될 본인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침을, 레이의 눈동자가 인식했다.

직후 허공에서 검기가 튀어나와 바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가가가각!!!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바위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누가봐도 범인은 명확했다.

"어, 시발."

내가 쏜 게 맞네.

레이가 무안해하며 턱을 매만졌다.

매튜는 제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지미는 뒷목을 잡으며 끅끅 소리를 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지자 레이는 선수를 친답시고 덜컥 화를 냈다.

"매, 매튜! 제 검기가 이상해요! 나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예요?"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이 새끼야!"

"크아악! 지랄하지 마! 지랄하지 말라고!!"

머리를 쥐어뜯은 지미가 검을 뽑아서 검기까지 만들어내며 분노했다.

"저 검술을 독학했다고? 지랄하지 마! 어떤 새끼가 가르쳐 준거야!"

"지미, 진정해요. 독학했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딴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독학했다는 새끼의 검기가 공간을 도약해? 그딴 기적이 가능한 검술은 제국 역사에도 하르시아의 공간검 밖에 없었어!!"

"공간검요?"

"제기랄, 600년 전 실전됐다는 하르시아류 공간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야?!"

"600년 전 실전요?"

"그래!! 600년 전 실전...!"

"지미."

레이가 말을 잘랐다.

"600년 전 실전됐다는 검술을 제가 누구한테 배워요?"

"그, 그건 네가 대답해야지!!"

"지미, 잘 들어요."

레이는 일단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냥, 내 재능이 너무 뛰어날 뿐이에요."

너무나도 당당한 레이의 태도에 지미가 입을 쩍 벌렸다.

"굳이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저와 같은 천재들은 본능적으로 궁극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죠. 제 검술은 하르시아 류가 아니에요. 그저 같은 방향을 선택했을 뿐이죠. 교류가 없더라도, 설령 수백 년의 시차가 있다 해도. 불세출의 천재끼리는 서로를 닮아가는 법이죠."

"큭, 크윽...!"

"받아들여요. 이건 지미 같은 범인의 한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현상이에요. 이해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주제 넘게 머리 굴리지 말고."

"끄으아악...!"

혈압이 너무 오른 지미는 배가 아파 뒤질 것 같다는 얼굴로 지면에 쓰러져 실신했다.

꼽다. 존나게 꼬와서 죽여버리고 싶다.

엇나간 질투 탓에 과호흡에 시달리며 지면을 기는 지미를 매튜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가 더럽게 아픈 거야 매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보다 일이 꽤 지랄 맞게 꼬였다는 직감이 먼저 들었다.

생각을 정리한 매튜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이."

"말해요."

"하르시아 류든 레이 네 오리지날이든, 남에게 절대 보여선 안 된다."

매튜는 확신했다.

레이가 공간검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백작령 전체가 풀 한 포기도 못 남기고 사라질 거다."

*

"계륵이군."

지미와 매튜와 헤어진 레이가 제과점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제국 검술의 정점, 하르시아류 공간검.

이게 존나 개쩌는 검술인 건 레이도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이른 나이인 12살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불세출의 천재, 하르시아.

그가 만들어낸 전설적인 검술, 공간검.

정확한 원리는 감도 잡히지 않지만, 하르시아류 공간검의 검기는 공간을 도약해 표적의 코앞에서 떨어져 내렸다.

'기본이 이도류인 이유가 있었어.'

같은 경지의 적을 맞상대 한다고 가정했을 때 칼 하나로 방어하며 남은 칼로 도약 검기를 날려대면 얌전히 뒤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마스터하면 검기가 도약 되는 위치와 시간까지 조율 가능한 모양인데.'

검기 도약의 유예 시간이 30초만 되어도 검기 수십 개를 표적 하나에 시간 차로 중첩시킨 후 한 번에 폭격을 쏟아부을 수 있다.

물론 레이는 불가하다.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검술이 아닌지라 검기 방출 후 공간 도약까지 걸리는 시간조차 제어가 불가했다.

훈련장에서 마나와 체력을 털어가며 실험했지만, 같은 거리에 있는 표적이라도 공간을 도약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들쭉날쭉했다.

도약시킨 검기의 정확한 출연 위치 또한 현재로선 제어가 불가능했고.

'역시 나는 검에 재능이 없다...고는 못 하겠군, 이제.'

정말 미친 검술이다.

제국이 미쳐버린 게 아닌 이상 하르시아류 공간검이 실전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봤을 리가 없다.

제국은 공간검을 존속시키기 위해 제국의 기재를 다 끌어모았다.

그럼에도 하르시아가 죽고 난 후 채 100년도 채 되지 않아 공간검의 실전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공간검을 익히고자 한 대부분의 기재가 실패하거나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걸 익힐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레이의 몸뚱이는 억만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마나 연공법을 굳이 생략한 이유도 알겠어.'

공간검을 위해 정제된 마나는 제국이 끌어모은 기재들조차 대부분 병신을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레이가 연공법으로 대책 없이 마나부터 늘린 후 정제 과정에 들어갔다면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젠장. 좋은 거 쥐여줬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 시점에선 계륵이라고."

공간검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면 대체 어떤 난리가 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매튜는 말했다.

네가 우리의 예상보다도 지나치게 뛰어났기에, 상상 이상의 리스크를 떠안게 되었다고.

"보는 눈 있는 곳에선 못 써먹어. 포텐은 미쳐 돌아가지만 그걸 개화시킬 능력도 부족해."

여기에 더해 애들한테 전수도 못 한다.

보안 문제도 보안 문제고 익히다 죽을 확률이 월등히 높았으니까.

쯧.

혀를 찬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장에 직접 서게 되는 경우도 각오는 해야겠군.'

본인이 용사는 못 돼도, 추후 수준급의 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레이는 드디어 인정했다.

전장. 전장이라.

영 떫은 표정을 한 레이가 제과점에 들어섰다.

다른 손님을 상대하던 제빵사 부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다가왔다.

"이걸 가져가시면 됩니다."

'단골 노릇 한 지 몇 년째인데 이제야 경어를 들어보는군.'

피식 웃으며 과자를 받은 레이가 다음 주 간식 대금을 부르에게 건넸다.

대금을 받은 부르는 잠깐 망설이더니 돈주머니를 레이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 다음부터는 값을 절반 정도만 받겠습니다."

"눈치 볼 것 없어요, 부르."

고개를 저은 레이가 과자 보따리를 툭툭 두들겼다.

"눈치, 볼 것 없어요. 애들 먹을 거에 장난만 치지 않으면요. 앞으로도 쭉. 알겠나요?"

"어, 아, 알겠습니다."

"그럼 빵 많이 파세요."

레이가 키득거리며 제과점을 떠났다.

잠깐 사이 기가 빠진 부르는 의자에 잠시 주저앉아 휴식을 취해야 했다.

*

"오늘은 품새 '고려'를 같이 배워볼 거예요!"

아델이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왕년에 그녀는 이단심문관으로서 메이스를 들고 이단의 뚝배기를 깨부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성직자의 소양 중 하나로서 무술을 익혔기에 몸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과거 주기적으로 봉사를 나가는 보육원의 한 아이가 요상한 무술을 애들한테 가르치기에 같이 놀아준다고 따라 배웠는데, 이제는 레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수업을 맡아줄 정도로 태권도에 빠삭해져 있었다.

"동작을 아직 못 외운 친구들도 일단 옆의 친구들을 보고 따라 해 보세요!"

'고려'라면 태권도 품새 중에서도 난도가 꽤 높은 품새다.

고려를 이제 막 두 번째 접해 본 루나는 거듭옆차기를 어떻게 한 번 해보려다 무게 중심을 잃고 꽈당 넘어졌다.

루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카렌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쟤 운동은 잘 못하는구나!'

근래 숫자 계산이고 뭐고 어쨌든 머리 쓰는 사안이면 루나에게 일방적으로 개털렸던 카렌이 손아귀를 꽉 말아쥐며 환희했다.

과연 사람이란 게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머리가 좀 밀리면 어떤가. 운동으로 찍어누르면 되는 법이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렌은 다시 쭈그리가 되어 입을 댓 발 내밀게 되었다.

"데런, 잘 잡고 있어!"

"걱정하지 마, 요하나 누나."

헤벌쭉하게 웃어 재낀 요하나가 땅을 박찼다.

가벼운 몸뚱이의 이점을 살려 빠르게 가속한 요하나는 하늘을 향해 힘껏 점프했다.

휘리리리릭!!

흡사 팽이처럼 몸을 핑그르르 돌린 요하나가 허공에서만 세 바퀴를 회전에 성공한 후 데런이 들고 있던 나무판자를 걷어찼다.

파각!!

"성공!!"

'바보 요하나! 바보 요하나! 바보 주제에!'

카렌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애초에 공부 쪽에 노력을 좀 더 집중했던 이유가 요하나와 데런의 운동 신경을 따라잡기 버거워서였음이 상기됐다.

'이대로는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렌이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나도 해볼래!"

"응? 으응?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나도 돌려차기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아득바득 우기며 요하나에게 나무 판자를 맡긴 카렌이 충분히 가속할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벌렸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 지면을 달리기 시작한 카렌이 이를 악물고 몸을 띄웠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리고 세 바퀴를 반쯤 돌았을 때.

카렌의 몸은 이미 지면과 맞닿아 있었다.

"으갹!!"

너무 무리한 시도였다.

착지 타이밍을 실수하는 바람에 발목을 접질린 카렌은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팔까지 꼬여 얼굴부터 흙바닥에 떨어졌다.

다음 순간 찾아올 고통에 카렌이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터억!

"...응? 으응?"

누군가의 손길이 갑자기 무게를 지탱해주자 잔뜩 쫄아있던 카렌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신경질적인 인상을 한 남자아이가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뭐하냐, 너?"

"레이!"

한껏 목소리를 올린 카렌이 곧장 레이에게 안겨왔다.

레이는 굳이 카렌을 제지하지 않은 채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도전하는 건 좋은데 굳이 안 되는 거 하려고 무리하진 마라니까."

"흥. 아닌걸. 나도 할 수 있는 걸!"

한동안 안 이러더니 다시 몸을 막 굴리는 걸 보니 원인은 보나마나 루나였다.

카렌의 심리를 파악한 레이가 카렌의 턱을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꾸준히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야."

"흠흠."

카렌이 더해보라는 듯 눈을 빛냈다.

레이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카렌은 항상 노력하잖아. 공부도, 운동도,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서도. 새롭게 보육원에 오게 된 친구들을 카렌이 항상 신경 써주고 어울려줘서 난 정말 기뻐."

"히히! 뽀뽀!"

얌전히 볼을 내준 레이가 앵겨있는 카렌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카렌. 가챠 중에 처음으로 뽑은 레어 등급으로, 어느 분야에 유별나게 특출난 면은 없지만 역으로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이는 노력가였다.

새롭게 보육원에 들어온 아이들의 적응을 항상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많은 아이들이 카렌을 잘 따랐다.

보육원이 원활히 돌아가는 데 카렌의 지분이 정말로 컸다.

'다만...'

소유욕이 좀 많이 강했다.

당장 레이의 볼에 침을 묻혀대고 있는 것도 애정 표현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 이건 내 것이라고 경고하는 과시 행위에 가까웠다.

레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애정결핍 있는 아이가 소유욕이 좀 비대해지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고.

당장은 레이에게 집착하고 있지만 집착의 대상이 또 언제 변할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레이만 해도 전생에 유치원~초등학교 저학년 사이 결혼과 이혼을 최소 세 번은 반복했으니. 어린애 소꿉장난에 과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기분이 나쁘진 않네.'

당장은 귀여운 딸이 하나 생긴 느낌이라 되도록 카렌의 사춘기가 늦게 오길 바라는 중이었다.

슬슬 침이 흐르기 시작하기에 카렌을 떼어낸 레이가 필립의 앞에 섰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필립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남아있었나 봐, 필립."

"으, 응."

"잘 선택했어. 이것 좀 애들한테 돌려."

"어, 응. 고마워."

"존댓말."

"고맙습니다..."

과자 보따리를 건네준 레이가 몸을 반 바퀴 돌려 운동장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가챠 돌려서 모아 놓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눈에 담겼다.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리든 나쁘게 풀리든. 자기 몸 하나를 건사하기 위해선 반드시 무력이 필요해지는 시기가 찾아올 거다.

"백작가에 제대로 이야기 좀 해봐야겠군."

마법사가 안 된다면 기사라도 필요했다.

마음을 굳힌 레이가 다시 몸을 돌렸다.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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