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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8화 (8/446)

계륵 (1)

8화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예컨데 내가 학문적인 소양이 리셋된 채 지구에서 갓난아기로 회귀를 했다면.

흔히 SKY로 대표되는 명문대쯤은 우습게 들어갈 수 있었을 터다.

하고자 한다면 남들보다 10년은 일찍 수능을 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을 테지.

헌데 수능 봐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갈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확답하기 힘들었다.

학부생 수준을 벗어나 특정 학문에 기릴만한 흔적을 남길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더욱 대답이 궁색해지고.

더 나아가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의 업적을 세울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그저 시작이 빠를 뿐이다.

현 육체의 재능이 우수했고, 초월자의 지원까지 받았기에 남들이 경악할 만한 경지를 어린 나이에 개척할 수 있었지만...

결국 정점에 달할 수 있는 자는 정점의 재능을 타고나는 이였다.

내가 정점의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당장 검기도 못 날려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공수표를 날렸다.

사기를 친 셈이었지만 미안함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가챠 돌린 거 싸그리 말아먹고 아무 성과 없이 보육원 문을 닫는다면 작위 같은 걸 걱정할 게 아니었다.

작위를 나눠줄 제국이 증발할 테니까.

반면에 열심히 가르친 보육원 아이들 중 인류의 위기를 막아낼 영웅이 배출된다면 지미와 매튜는 자연히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작위를 쥐여줄 주체만 바뀐 꼴이니 내 기준에선 노 프라블럼이었다.

"그래서, 어렵다는 말인가요?"

"마법사는 특히 그래. 네 생각보다도 아주 폐쇄적인 조직이야. 이건 돈으로도 해결 안 되는 문제지. 고용은 가능하지만 가정 교사처럼 부릴 수는 없어."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조직에 속한 마법사든 폐쇄성은 디폴트 값이다.

저들 간의 교류야 필요에 의해 진행하고 있지만 외부인에게 지식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물론 고위 귀족 정도 되면 특정 세력에 소속되지 않는다고 해도 기본기 정도는 교육해줄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 같은 천한 족속과는 상종을 하지 않으려 들 거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호의적인 반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거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물론 하자가 좀 있는 녀석들은 구하려면 구해볼 수 있어. 용병 중에도 쫓겨난 마법사가 가끔 있었지."

"그건 안 돼요. 배울 거면 정석으로 배워야죠. 급하다고 야매로 때우면 나중 가서 고생해요."

기껏 유니크 고아 뽑아놓고서 스킬 트리 잘못 태워 망캐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렵네요."

"하나만 확실히 하자. 제대로 된 기사나 마법사와 접선하고 싶으면 귀족의 도움이 있어야 해."

백작가에 얼굴을 비쳐야 한다는 소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급하게 진행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정 원하면 내 마나 연공법을 애들에게 전수해줄 수는 있어."

"미안한데요 지미, 지미의 연공법은 너무 싸구려예요."

"큭큭! 그렇긴 하지."

용병 시절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걸 찾아 익힌 거니까.

지미는 자기가 익힌 것이 매우 저렴한 연공법이란 걸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안정적인 마나 연공법만 하나 구한 후 내 머릿속에 있는 마나 정제법과 검술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주는 방법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평생 나 혼자 가지고 있어봐야 썩히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일단 알겠어요.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미와 매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

기세를 날카롭게 세운 지미와 매튜가 잔뜩 긴장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지금까지 벌여놓은 게 있어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긴 했지만, 이번 부탁은 정말 간단히 들어줄 수 있는 종류였다.

"검기 날리는 노하우 좀 전수해줘요."

"...뭐?"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친 지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 나나 매튜는 평범한 검기밖에 방출할 줄 몰라."

"네?"

"목표를 쫓아가는 유도 검기나 쏘아내면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분열 검기는 사용할 줄 몰라."

"아뇨 그딴 거 말고, 그냥 퓨어한 검기 쏘아내는 방법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검기 만들어낼 줄 알잖아?"

"근데 어떻게 쏘아내는지 모르겠더라고요."

"?? 너 병신이니?"

"작위 받기 싫어요?"

"껄껄, 우리 레이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으셨구나! 하긴 사람이 완벽할 수만은 없지!"

용병 시절 처세를 몸에 불러온 지미가 뒤에 서 있던 매튜에게 손짓했다.

"매튜, 이 근방에 마련해 놓은 훈련장으로 가보자고."

*

다져진 산길에서 옆으로 틀어 빽빽한 나무 사이로 수십 분 걸어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터 위에는 거대한 바위가 일정 간격을 두고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미와 매튜가 검기를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훈련장이었다.

"생각해보니 레이 네가 독학으로 검기를 뽑아낼 수준에 이르렀다는 걸 간과했어."

어지간히 현실성이 없어야 말이지.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자연히 다른 것들도 완벽할 줄 알았건만, 기실 레이는 경험이 일천한 빈 쭉정이 상태였다.

"일단 기초적인 것부터 설명해주마. 검기.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어떤 연공법과 정제법을 익혔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조금씩 변화하지."

지미가 검기를 생성한 후 허공에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소름끼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을 따라 미약한 열기가 공기를 데웠다.

"족보 없는 마나 연공법 기반의 검기는 성질이 다 비슷비슷하지. 절삭력과 열기."

매튜 또한 검기를 생성해 레이에게 보여주었다.

지미에 비해 좀 더 날카롭고, 대신 열기는 약한 검기가 허공을 베었다.

이윽고 지미와 매튜의 검기가 맞닿는다.

일순 강렬한 섬광이 터지며 검기에 가두어져 있던 열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카가각!!

"검기끼리 충돌하면 각자의 성질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레이는 심장 박동이 거세짐을 느꼈다.

건너건너 들었던 정보를 지미와 매튜가 직접 펼쳐 보이자 묘한 긴장과 희열이 피를 타고 흘렀다.

"레이, 검기를 한 번 일으켜 봐."

"알겠어요."

"자, 한번 천천히 부딪쳐 보자고.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되실 분의 검기는 과연 어떤 맛일지."

그리 말하면서도 지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레이는 독학으로 엑스퍼트의 경지까지 올라갔고, 마나 연공법이나 정제법이 족보 없는 건 지미와 피차일반이었다.

독특해봐야 얼마나 독특하겠어.

그런 안이한 마음으로 검을 마주 댄 직후.

터엉!!

반발을 이기지 못한 검이 손아귀에서 튕겨 나갔다.

부메랑처럼 회전하는 검은 지미 옆에 서 있던 매튜를 덮쳤다.

"흐어억!!!!"

허리를 뒤로 꺾어 간신히 검을 피한 매튜가 지면에 엎어졌다.

허공을 가로지른 검은 한참 떨어져 있던 나무를 반쯤 파고들고 움직임을 멈췄다.

"..."

"..."

"..."

잠시 침묵이 일었다.

손아귀가 터져 철철 피가 흐르는 지미와, 친우의 칼에 유명을 달리 할 뻔 했던 매튜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연초를 꺼내 물었다.

"후우... 인생이란 게 참 좆 같고..."

"불공평한 거야."

지미와 매튜는 레이와 검을 맞대는 순간 일어난 현상을 분명하게 포착했다.

반발? 왜곡? 현상의 정체까지 정확히 통찰할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레이의 검기는 평범한 검기와는 아예 비교가 불가했다.

"불세출의 천재 아니랄까 봐. 족보 없다고 무시했더니 지 혼자 족보를 처음부터 짜내고 앉아있었네."

"족보고 나발이고 앞으로 검 좀 꽉 잡고 다녀, 대장. 뒤질 뻔했잖아."

"네가 한번 부딪쳐봐. 손목 안 꺾인 게 용할 지경이었으니까."

"지미, 매튜."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산불 날 수 있으니까 담배 좀 꺼요."

저저 시발련.

지미와 매튜가 눈으로 욕을 하고는 연초를 지면에 비볐다.

"흠, 근데 검기를 날리지 못할 정도로 검기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던데."

의아함을 내비친 매튜가 나무에 박힌 검을 뽑아낸 후 바위를 가리켰다.

"검기를 방출하는 노하우를 알려주기 전에 경고하자면, 실전에서 검기를 마구 쏘아대는 건 자살 행위다. 효율이 나빠."

매튜가 10 m가량 떨어진 바위에 검기를 방출했다.

반달 모양으로 쏘아진 검기가 바위를 파고든 순간 후끈한 열기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바위는 처음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부서져 있었다.

"개인 기량 차이가 있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이렇게 되지."

150 m가량 떨어진 바위를 향해 검기가 방출됐다.

쏜살같이 쇄도한 검기는, 바위와 맞닿을 쯤에 그 찬란함이 많이 옅어진 채였다.

콰가각!!

10 m 표적에 비해 훨씬 넓은 면적이 검기에 피탄됐지만 정작 표적인 바위는 금이 약간 가고 말았다.

"100 m 이상 떨어진 표적은 맞힐 자신이 있다해도 검기를 쏘아내길 다들 꺼린다. 위력이 형편없이 줄거든. 자, 그럼 검기를 정확하게 쏘아내는 노하우를 가르쳐 주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매튜가 말을 이었다.

"흔히 검기를 처음 날릴 때 실수가 잦은 이유는... 그래, '쏘아낸다'는 단어에 인식이 매몰되는 탓이다."

엑스퍼트에 경지에 들어서면 유형화된 마나에 주인의 의지가 깃든다.

집중해야 할 건 바로 그 부분이다.

"레이, 너는 검기를 쏘아내는 게 목적이냐? 아니지. 표적을 맞히는 게 목적이지. 때문에 검기를 '쏘아낸다'는 행위에 집중하면 조준점이 흐트러지거나 아예 검기가 흩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시점에서 약간의 상상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차라리... 네 검이 찰나 간 길게 늘어난다고 상상해봐. 수십 미터가 넘게 떨어진 표적을, 찰나 간 길게 늘어난 검의 사선과 일치시키는 거지."

레이는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화로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주 망각했지만, 과연 지미와 매튜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베터랑 용병이었다.

실전에서 몸으로 습득한 노하우를 풀어서 설명해주니 다가오는 무게가 달랐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10 m가량 떨어진 바위를 향해 검을 겨누자 지미가 기겁을 했다.

"야야!! 지랄 말고 저거 노려!! 저거!! 코앞에 검기 쐈다가 또 뭐가 튀어나올지 어떻게 알고!!"

매튜가 지미의 말에 동의했다.

"최대한 멀리 있는 거 노려라. 나도 9살 꼬맹이 눈먼 칼에 맞아 죽긴 싫다."

가장 멀리 있는 표적이라면 거리가 200 m가량 됐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틀었다.

'지금까지는 무언가를 베어내겠다는 의지도 없이 검기를 쏘아내려 했지. 집중하자. 표적을 인식해. 내가 부수어야 할 것. 상상해. 길게 늘어나는 검. 궤적, 그리고 사선.'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며 점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바위에 모든 의식이 집중된다.

이를 갈아낸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후욱!

"...?"

"뭐야?"

"음?"

한 발 떨어져 지켜보던 지미와 매튜가 눈을 크게 뜨며 당혹스러워했다.

검기가 제자리에서 증발했다. 이건 지미와 매튜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검기를 방출하는 데 실패한다고 해도, 마나가 역류하거나 외부로 폭발하지, 저런 식으로 허공에서 증발하진 않았다.

애초에 바위를 부수는 에너지가 아무 징조 없이 소멸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대체..."

눈을 끔벅이고 있는 레이에게 다가간 지미가 레이의 검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힘의 반발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가 정말로 증발해버린 거다.

"그만한 검기가 대체 어디 간..."

지미의 중얼거림은 뒤늦게 터져 나오는 폭음에 묻혀버렸다.

콰가가가각!!!

셋의 눈동자가 동시에 폭음의 진원지로 돌아갔다.

200 m 떨어진 바위가 완전히 박살 나서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지미와 매튜의 눈동자가 다시 레이에게 돌아갔다.

레이가 억울해했다.

"아니, 왜 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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