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미는 자신의 영향력이 넓어진 후 백작령 중심과 가까운 위치에 사무실을 하나 마련했다.
좁아터진 백작령이라 해도 거리가 좀 있는 탓에, 레이는 매튜가 대여한 말 한 필을 같이 탄 채 짧은 여행길에 오르게 됐다.
맞바람을 맞아주며 말을 몰던 매튜는 산길이 끝나갈 무렵에 입을 열었다.
"독학으로 마나의 활용법을 터득한 건가?"
"그런 셈이죠."
"너는 마나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군. 용병질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너 같은 놈은 생전 처음 봤다."
"칭찬 맞죠?"
"빈정대지 마. 이미 열 받아 있으니까. 마나 좀 각성했다고 그렇게 날뛰어 댄 거냐?"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그따위로 처리해야 할 일이 아니었어. 너야 항상 선을 넘고 살지만 이번 일은 많이 과했다. 너무 많이."
서서히 속도를 줄인 매튜가 한숨을 깊게 쉬었다.
"우리는 배움이 짧고 우둔한 양아치 집단이기에 더욱 권위를 필요로 한다. 너는 지미의 권위를 상하게 한 패밀리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섰지만 네 행동이야말로 지미의 권위를 추락시켰어."
레이는 본인의 축출 행위가 지미의 허가 아래 이루어졌다고 입을 놀렸으나 그 주장을 모두가 믿지는 않았다.
9살 꼬맹이에게 휘둘리는 조직의 리더. 우습게 보이기 딱 좋았다.
"쯧, 길게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레이는 염치가 없지 지능이 모자라진 않았다.
기실 9살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비상한 사고력과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매튜가 하고자 하는 말뜻은 전부 알아들었으리라.
"이번만큼은 가서 싹싹 빌어라. 평소처럼 아가리질 하지 말고."
"충고 감사합니다. 매튜 형님."
"정말 돌아버리겠군."
매튜는 자기 팔자를 생각하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 도저히 아이 같지 않은 비상한 면모 탓에 어디에서든 크게 될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마나를 다루는 데까지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9살 나이에 독학으로 마나를 활용한 신체 강화법을 깨우친다?
그게 가능한 천재가 전 대륙을 통틀어도 대체 몇 명이나 존재할까?
성인이 된다면 지미와 매튜가 감히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의 '힘'을 거머쥘 게 확연하기에, 당장 목을 벨 게 아니라면 반드시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야 했다.
'끙. 여기 자리 잡을 때만 해도 9살 꼬맹이의 눈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생이란 게 참 좆 같고 불공평한 거다.
연초를 꺼내 문 매튜는 레이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미리 직원들을 내보낸 건물에 들어서자 지미가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만에 보는 지미의 얼굴에 레이가 입꼬리를 길게 찢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지미가 책상을 내려쳤다.
콰앙!!
"뭘 잘했다고 쪼개 이 개새끼야!!"
지미는 매튜에 비해 꽤 다혈질이었다.
*
어지간히 열을 받았는지 지미는 인사도 생략하고 짜증을 쏟아냈다.
"너는 나에 대한 리스펙트가 전혀 없는 거냐? 존중 말이다, 존중!! 몇 주 얼굴 안 비쳤다고 이딴 대형사고를 쳐?!"
"아니 지미 형님, 좀 진정하시고..."
"내가 니 시다바리냐? 시다바리야? 내가 너 사고 쳐 놓은 거 치우려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알아?! 크아악!"
"형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크윽! 내가 어쩌다 저 악마 같은 놈과 엮여 가지고 이 고생을... 이 고생을!"
지미가 얼굴을 쥐어뜯으며 자기 인생을 반추했다.
지미는 용병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피치 못하고 선택한 직업이었다.
다행히 지미는 운도 좋고 재능도 있었다.
전장을 돌아다니며 얻은 싸구려 마나 연공법을 체득해 결국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니까.
지미는 꽤 잘 나갔다.
힘 있는 귀족에게 아양을 떨며 더러운 물에 몸을 담갔다면, 단승 작위 하나쯤은 받아 낼 수 있었을 정도로.
태생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은 참으로 달콤하고 달콤했지만.
지미는 결국 용병단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은퇴했다.
그게 지미의 한계였고 또한 본질이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칼을 들었지만 마음이 유약했고, 따뜻했다.
은퇴 후 지미는 적당한 변경 지역에 자리 잡고 홍등가의 '주먹' 노릇이나 하면서 평화롭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한 후엔 어린 날 배를 곪았던 기억이 너무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어 모아두었던 자금으로 작은 보육원도 하나 세웠다.
유일무이한 친우인 매튜가 그 여정을 함께했다.
지미는 참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필립스 백작령에 정착했지만 은퇴 후 생활에 만족했다.
어떤 악마 같은 애새끼와 엮이기 직전까지 말이다.
"크아악! 내가 왜! 하필! 하필 필립스 백작령에 정착해서!"
"지미, 드릴 말씀이 있어요."
"크악! 크으윽..."
경기를 일으키던 지미가 자리에 주저앉아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드릴 말씀? 미안하다고 사과 한 번 하겠지.
말뿐인 사과겠지만 일단 듣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해 봐."
"보육원에 기사랑 마법사가 필요해요."
"그래, 기사랑 마법... 뭐, 시발?"
"특히 마법사요. 몸 쓰는 재능이야 저도 알아볼 수 있지만 마법적인 재능은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믿을 만한 마법사를 한 번이라도 초청 가능할..."
"이 씹어먹을 자식아!!"
결국 인내심의 끈이 끊어지는 지미의 모습을 보며 매튜가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오는군.'
"기사랑 마법사가 돈만 주면 오는 용병인 줄 알아?! 걔들은 말단부터도 준귀족 대접을 받아!! 그리고 기사? 그게 왜 필요해? 너 보육원 애들한테 이상한 발차기 가르치는 거 있잖아! 그거면 됐지 또 뭘 가르치게?!"
"태권도요? 그건 실전 무술이라기엔 좀... 그냥 스트레칭 좀 하고 몸 쓰는 법 좀 익히라고 가르쳐 준거죠."
물론 가르쳐 놨더니 1080° 회전 돌려차기를 슝슝 날려대는 녀석도 한두 명 생겼지만 진짜 필요한 건 마나 연공법과 무기술이었다.
"기사가 안 된다면 마법사라도..."
"그게 더 힘들어!! 제발 이상한 욕심 좀 그만 부려. 애들은 그냥 순리에 맞게 키우라고!"
"여기 생활 여건 고려했을 때 순리에 맞게 키우면 깡패 새끼랑 매춘부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게 문제냐?"
"문제죠."
"크아악!!"
머리를 쥐어뜯은 지미가 거품을 물었다.
"네가 지금 무슨 사고를 쳐 놨는지는 알고 이렇게 당당하냐?"
"지미의 권위를 실추시킬만한 행동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것도 그거고!! 제기랄, 레이 네가 어디 소속인지는 자각하고 있어?"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지미 보육원 소속이죠."
"그래! 내 피와 살과 머리카락을 짜 먹고 사는 빌어먹을 보육원 소속이지!! 그런 네놈이 내부 단속한다며 사람 패 죽이고 다니면 남들은 어떻게 보겠냐?"
레이는 지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지미 보육원의 원생이 지미의 적들을 패죽이고 다니면 남들이 보육원을 어떻게 보겠는가.
살인 기계를 육성하는 깡패 훈련소로 볼 거다.
보육원이 순전히 지미의 자금으로 돌아갔다면 상관 없겠지만 백작가와 신성 교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보육원 흉내를 내며 귀족과 교단을 우롱한 후 뒤에선 전투원을 육성하고 있었다는 오해를 받는다면 지미는 얄짤 없이 좆되는 거였다.
"너무 걱정하진 마요. 백작가랑 교단이 저 꼴통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 미친놈이 남의 일이라고 지금!!"
"하여튼 지미, 기사든 마법사든 모셔올 방법 좀 고민해 봐요."
"제기랄!! 이렇게는 못 살아!! 거긴 내 돈 주고 마련한 내 보육원이야!! 내 보육원에서 당장 꺼져!!"
"쥐꼬리만 했던 보육원 제가 키웠잖아요."
"누가 키워달라고 무릎 꿇고 부탁하기라도 했냐?"
끔찍한 스트레스 탓에 혈압이 치솟은 지미가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매튜! 이 새끼 데리고 나가!"
매튜가 한숨을 쉬며 다가오자 레이가 허리춤에 있던 녹슨 검을 뽑아들었다.
지미와 매튜는 당황했지만 긴장하지는 않았다.
구르고 구른 용병인 둘은 마나 조금 다룰 줄 아는 꼬맹이 하나쯤은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못 가.
지미와 매튜는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까.
츠즈즈즉
유형화된 마나가 레이의 검신에 맺혔다.
검기. 엑스퍼트에 도달한 무인의 상징.
마나를 활용하여 신체를 강화하는 기초적인 단계를 넘어서.
체내의 마나를 길들이고 정제하여, 자신의 의지를 사물에 깃들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경지.
엑스퍼트.
지미와 매튜 또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눈앞의 꼬맹이는 9살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새긴 세기의 천재들조차.
가장 이른 시기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고 기록된 나이가 12살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눈앞의 꼬맹이는... 무엇이지?
"지미, 매튜. 내가 누구?"
"..."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
한 박자 쉰 레이가 덧붙였다.
"-내정자."
개소리다.
개소리여야 하는데. 눈앞에 뚜렷한 증거물이 있었다.
눈앞의 검기를 보고도 레이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은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철제가 덧대진 탁자가 괴이한 소음과 함께 반으로 잘렸다.
"지미, 매튜. 당신들은 따뜻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귀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쓴맛을 두루 보고도 본인의 신념을 관철하기는 성자라 해도 쉽지 않았다.
"당신들을 만난 건 나의 가장 축복받은 행운 중 하나겠지."
키득거린 레이가 검을 회수했다.
"조금만 더 날 믿고 내게 투자해줘."
레이가 하늘 위에 별처럼 빛나게 될 순간이 찾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터다.
"과거에 놓고 온 단승 작위? 그딴 걸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때가 되면 세습 가능한 진짜 작위쯤이야 얼마든지 쥐여줄 수 있을 테니.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의 측근이 되어, 진짜 귀족이 되는 거야."
레이가 웃었다.
"날 믿어. 당신들이 베풀어 온 온정과 희망을, 반드시 당신들에게 돌려주도록 할게."
물론 레이는, 본인이 마스터의 경지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건 공수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