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강 (1)
5화
"지금 상황에서 마나를 활용한 육체 강화까지 공개적으로 선보이기엔 어그로가 너무 과한 감이 있는데 말이지."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한 지 9년의 세월이 흘렀다.
환생 이후 절반 가까이의 시간을 가챠 돌린답시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고아를 수집했다.
수북이 쌓여가는 노멀 고아 관리하기 위해 백작가와 교단에 얼굴을 비추었고, 그 와중 간간이 뽑혀나오는 레어 고아의 교육을 위해 선생 역할을 자처했다.
누군가는 나를 미친놈이라 손가락질 했다.
누군가는 나를 범상치 않은 특출난 인재라고 평가했다.
어그로가 끌렸다는 소리다.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천민이었고, 매춘부의 자식이었다.
"소설로 쓰면 제목 어그로는 오질 것 같은데. 엠창 환생? 빡촌 환생? 니미 바로 검열들어가겠네. 유료화는커녕 신문 기사가 먼저 나가겠어."
남성향 소설에 만연한 여성 혐오, 이대로 괜찮은가. 대처 미흡한 문피아 향해 비판 쏟아져. 금강 입장문 발표, "차후 적절한 대책 마련할 것."
"상상만 해도 좆같군. 좀 더 부드러운 제목이 필요해."
어쨌든.
기껏해야 천민 계급인 나는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대처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충분히 어그로를 끌어 놓은 상태에서 내가 '마나'를 다루는 데까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몸 사려가며 세태에 순응하고 살거였으면 가챠 돌리겠다고 설치지도 않았을 거다.
현 시점에서 양아치 새끼들이 분위기 흐리는 거 방치하면 기껏 모아놓은 고오급 고아들 남깡여창 루트 타는 거 시간문제였다.
"에휴, 드가자."
최선을 다해보되 일 꼬이면 코 박고 죽으면 될 일이었다.
이 세상이 멸망해도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나는 김독자가 아니었으니까.
마음을 가볍게 먹으며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하니웰은 비싼 고기를 구워내면서 떫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고기를 돈 받고 파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껄렁껄렁한 잡배들이 자리 대부분을 차지하고서 돈 생각 안 하고 술을 처마시고 있었다.
보호세 수금을 하러 왔으면 얌전히 돈만 받아 갈 것이지, 뭐 이리 가게 기둥뿌리까지 뽑아먹으려고 달려든단 말인가.
하니웰은 한숨을 쉬면서도 불만을 내뱉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이 근방은 지미의 영향력 아래였고, 저들은 지미가 키운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요새는 수도에서부터 번진 유행에 따라 자기들을 '지미 패밀리'라고 자칭하고 다녔는데, 하니웰 입장에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하니, 여기 고기 떨어졌잖아!"
"네네, 나가요."
하니웰이 다급히 고기가 담긴 접시를 가지고 나가자 론이 큼직한 손으로 하니웰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얼굴이 떫어? 우리가 공짜로 먹고 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후... 후후. 아니에요.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에이, 왜 이래. 받아 받아. 오늘 아주 좋은 날이니까."
론이 하니웰의 가슴골 사이로 골드 하나를 집어넣었다.
여기서 말하는 골드는 금덩이가 아닌 제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동전 화폐로, 금이 소량 섞여 있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밥 두 끼 먹을 금액이었다.
하니웰은 삐뚤어지려는 웃음을 어떻게든 다잡았다.
론은 하니웰의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껄껄 웃었다.
"요즘 내 기분이 아주 좋아. 식충이 중에서도 밥값 하는 놈이 늘고 있거든. 안 그러냐? 자! 모두! 오늘의 주인공 필립에게 박수! 오늘 고기는 필립이 산다!"
"우와아!!"
우렁찬 함성과 박수 소리가 조직원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필립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고양감 탓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론은 필립이 옆 마을에서 소매치기로 털어온 주머니를 꺼내 보이며 잘그락 소리를 냈다.
"돼지 새끼도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제 몫은 해야지? 언제까지 입 벌리고 어른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밥만 축내고 살 거야? 그치?"
"예,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필립은 패밀리의 '형님'들이 좋았다.
그들은 강하고, 호쾌하고, 또한 군림했다.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고 여자의 엉덩이를 쓰다듬어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필립에게 형님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레이가 나눠주는 쿠키 따위. 진정한 패밀리가 된다면 제가 먹고 싶을 때 가서 마음껏 주워 먹을 수 있었다.
한참 필립이 끈적한 욕구에 빠져 웃음을 주체 못하던 순간.
"그만 놓아주시겠습니까."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가 곁에서 울렸다.
하니웰의 엉덩이를 매만지던 론의 팔목을 움켜쥔 남자는, 가게의 주인이자 하니웰의 남편인 핀이었다.
"제 아내입니다."
"여, 여보! 괜찮아요! 들어가서 일 봐요."
하니웰이 기겁했으나 론은 사람 좋게 웃으며 순순히 손을 뗐다.
"하하, 이거 미안하군. 친근함의 표시였는데 불쾌했나 봐."
쩌억!!
큼직한 손아귀가 기습적으로 핀의 뺨을 강타했다.
고개가 돌아간 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시발아 니 마누라 엉덩이 좀 만질 수도 있지 뭐 좆도 아닌 걸로 생색이야, 어?!"
연속해서 발길질이 이어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핀이 무방비로 복부를 얻어맞자 하니웰이 기겁을 하며 자기 몸으로 핀을 가렸다.
"꺄악! 그만 해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에이 시발. 밥맛 떨어지게 말이야."
론이 밥그릇을 던지며 투덜대자 다른 조직원들이 낄낄거리며 호응했다.
"적당히 해. 마누라 엉덩이를 남편이 챙겨야지 아님 누가 챙기냐? 네가 챙길래? 하하하!"
"형님, 거 빨리 일으켜 드리고 고기 좀 더 가져오라고 말씀 좀 전해주십쇼! 으흐흐!"
모욕적인 언사에도 핀은 더는 반항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여기서 개처럼 얻어맞은 후 반병신이 된다 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하니웰이 희롱당하자 일순 화를 못 참고 나서긴 했지만 미련한 선택이었다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끄응... 으윽..."
"빨리 안 일어나? 이 새끼가 어디서 엄살이야?"
"죄송합니다... 잠시, 잠시만..."
"쓰읍, 정신 안 차려?"
복부를 붙잡은 채 헛구역질을 하는 핀을 향해 론이 재차 허벅지에 힘을 주며 발길질을 준비했다.
"공짜 밥 처먹을 거면 아가리라도 여물고 드시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높고 고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재밌게들 노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가게 문으로 쏠렸다.
"아주 저렴하게들 놀아요."
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은퇴 후에 홍등가에서 주먹으로 밥이나 빌어먹으려던 지미가 반쯤 타의로 백작령 뒷골목의 거두가 된 이후.
세력의 급격한 확장과 통합 탓에 말을 안 듣는 조직원들이 늘어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입지가 탄탄하지 않은 지미는 당장은 몸을 사리며 상황을 지켜보길 선택했고, 기세가 등등해진 양아치들은 제 손에 들어온 알량한 권력을 믿고 여기저기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다.
레이는 바닥을 기고 있는 핀을 바라보며 애늙은이 마냥 혀를 찼다.
"론 형님, 요즘 자꾸 선을 넘으시네요?"
"하하! 선을 넘어? 내가?"
"적당히 나대세요, 제발. 손목 잘리기 싫으면."
"미친놈. 즈그 애미가 아무한테나 다리 벌리고 다닌다고 자식새끼도 똥오줌 못 가리고 주둥아리를 놀려 대네. 이래서 핏줄 천박한 놈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 된다니까."
"?"
레이가 경악했다.
패드립에 충격을 먹은 건 아니었다.
느금마 용주골 에이스가 팩트인데 화가 날 게 뭐 있는가.
다만 고아인 론이 저런 모욕을 내뱉었다는 게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우리끼리 핏줄 타령 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 아닌가? 즈그 엄마도 궁핍하다고 자식 버리고 튀었잖아?'
혼란에 빠진 레이가 되물었다.
"천박해요? 론 형님은 뭐, 고귀한 귀족 태생이라도 되십니까?"
"내 애미애비가 귀족인지 천민인지는 만나봐야 알지 새끼야. 아무렴 너보다 천할까."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시네요. 긍정적인 사고 보기 좋아요."
"뭔 개소리야?"
"됐습니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끝내자고요."
레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론과 거리를 좁혔다.
"겁대가리가 너무 없네요. 조직, 패밀리 규칙 몰라요? 보호세를 제외한 갈취 행위, 보육원 아이들 범죄 동원, 민간인 폭행... 하지 말라는 건 다 골라 하고 계시네요."
"하하, 그럼 우리가 샛빠지게 벌어온 돈으로 너희 보육원 놈들 뒹굴 거리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지? 응?"
레이는 어깨를 한 번 더 으쓱이고 말았다.
지미가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백작가의 높으신 분들이 지미 패밀리의 성장을 암묵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다.
암묵적 용인의 이유 중 하나는 지미가 보육원 등의 복지활동에 많은 자금을 쏟아부어 사회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고.
론은 그러한 선후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 불만을 내뱉고 있었다.
'저 무식한 깡패놈들 잡아다 앉혀 놓고 사정 설명하며 개화시키려 노력해봤자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걸 확인했으니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론, 당신은 근 몇 달간 패밀리의 규칙을 수백 번은 넘게 어겼어요."
"하하, 그래서?"
"말을 안 들어 먹으면 어찌 되는지 모범을 보여줘야죠. 지미의 권위를 위해서라도요."
"걸레 년들 치마폭 사이에서 자라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졌네."
기가 막혔던 론은 다짜고짜 의자를 잡아 레이에게 휘둘렀다.
레이가 허리에 찬 녹슨 검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뒤지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목재 의자는 조잡했으나 검보다 사거리가 길었다.
레이는 앞으로 걸었다.
단지, 빠르게 앞으로 걸었다.
걸음은 단정하고 정갈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괴이했다.
혹자의 눈에 레이는, 흡사 지면을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콰드득!!
목재 의자가 바닥을 내리쳤다.
론은 의자가 부서지고 나서야 레이가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겁하며 다시 의자를 들어 올렸지만 어째 균형이 맞지 않았다.
론이 고개를 들어 의자를 살폈다.
오른쪽 팔이 잘려나가 의자에 매달려 있었다.
한 발 늦게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아아아악!!"
"아쉽게 됐어, 론."
피를 뒤집어쓴 레이가 웃었다.
"네 독단적인 행동은 조직, 패밀리의 존속을 위태롭게 했어. 그러니 대가를 치러야지. 마음 같아선 죽여버리고 싶지만 거기까진 내 주관이 아니라서. 그게 아쉽다는 거야."
우아한 발걸음으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킨 레이가 망설임 없이 론의 발목을 베어버렸다.
두 다리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론은 재차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끄아아아아악!!"
"하나 남은 팔로 지혈 잘하고 있어."
론 한 명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일을 벌였으니,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조직원들은 전부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레이가 녹슨 검의 피를 털어낸 후 바닥으로 던졌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돼 도망칠까 덤벼들까 고민하던 조직원들은 레이가 무기를 버리자 금세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덮쳐!!"
"죽여!! 죽여버려!!"
"이 미친 새끼가!!"
자리를 박찬 조직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천천히 손목을 풀어낸 레이가 쥐꼬리만 한 마나를 본격적으로 운용했다.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검을 버리긴 했지만 장정 여덟 명이 동시에 달려드는 광경은 심장을 꽤나 쫄깃하게 만들었다.
"쓰읍, 지면 개쪽인데."
판을 벌였으니 무조건 이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