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화 (4/446)

루나 (3)

4화

하루 동안 루나는 아델에게 보육원의 시설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설명 받았다.

외워야할 자잘한 규칙들이 많았으나, 아델은 루나의 안정을 위해 간단한 주의사항만 설명한 후 앞으로 지내게 될 기숙사로 안내해주었다.

지미 보육원은 기본적으로 방 하나에 4명이 같이 생활한다.

루나가 방에 들어서자 세 쌍의 시선이 동시에 루나에게 향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본래 방을 사용하던 세 명의 아이들 중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씩씩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 허리에 손을 붙였다.

"안녕! 난 카렌이야! 넌 이름이 뭐니?"

"...루나."

"루나구나! 내가 이 방 방장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응, 고마워."

카렌은 활발했고, 말이 많았고, 또한 적극적이었기에 루나는 좋으나 싫으나 방의 아이들과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카렌, 미아, 요하나.

셋의 대화를 이끄는 건 대개 카렌이었고, 대화의 주제는 대개 레이가 연관되어 있었다.

100명이 넘어가는 보육원의 아이들 중 8할가량은 레이의 노력으로 보육원과 인연을 맺었다. '너는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냐?'라는 질문이 곧 '너는 어떻게 레이와 만나게 됐냐?'로 귀결되니 아이들의 공통분모엔 항상 레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떠들던 카렌은 루나 옆에 바싹 붙은 채 흥분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은 레이의 수업이 있어."

"...수업?"

"응! 산수 수업! 레이는 엄청 똑똑해서 우리보다 훨씬 나이 많은 오빠 언니들도 직접 가르치고 있어!"

"...우와."

루나는 눈치껏 감탄하는 흉내를 냈다.

카렌은 루나의 처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콧바람을 흥흥 흘리며 목에 힘을 주었다.

"뭐, 레이 다음으로 내가 똑똑하겠지만! 어쨌든 수업은 열심히 들어야 해! 잘 못하면 벌을 받거든!"

벌이란 말에 미아는 덤덤함을 유지했으나 요하나는 두려운 기색으로 목을 움츠렸다.

루나는 가만 앉아서 '벌'이 무엇일지 상상했다. 엉덩이를 맞는 걸까? 아니면 밥을 굶나? 그도 아니면 바닥 청소를 하루 종일 해야 하나?

루나가 불안한 눈빛을 카렌에게 보냈지만 카렌은 손가락을 입에 붙이며 외쳤다.

"자세한 건 비밀이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루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썼다.

이제 취침 시간이었다.

여전히 '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안이 마음에 남아있었지만 지금 덮고 있는 이불처럼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만 제공된다면, 그깟 벌쯤이야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고 다짐하며 루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약 20여 명의 학생들이 보육원 내의 교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스쿼트를 하던 레이는 제시간에 맞춰 모든 아이들이 도착하자 교실 문을 닫으며 첫 마디를 뗐다.

"앞으로는 나한테 존댓말을 쓰도록 해. 너희 전부."

"존댓말?"

"그래, 존댓말."

"나도 해?"

"그래, 카렌 너도 해."

"나는 레이랑 똑같이 9살인데?"

아닌 게 아니라 교실 내에는 레이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도 많았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을 가리켰다.

"나는 너희들의 선생님이니까. 제자는 선생님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앞으로 나한테 반말하면 무조건 벌점이야."

"우씨! 그럼 레이가 나한테 오빠야? 레이 오빠라고 불러?"

"호칭은 마음대로 해."

"바보! 멍청이! 똥개! 말미잘!!"

"선생님이라고 불러."

"싫어! 완전 싫어! 레이라고 부를래!"

"알겠으니까 존댓말. 한 번만 더 반말하면 벌점 줄 거야."

카렌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지만 레이는 무시했다.

아이들의 서열 간에 있어 나이가 꽤 중요한 요소라는 걸 레이는 알고 있었고, 보육원의 기강을 다잡기 위해선 레이 스스로가 차별화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존대는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은연중에 서로의 상하 관계를 규정하고 속박하니까 한 명 한 명 때려잡을 게 아니면 이쪽이 편하고 빨랐다.

"어쨌든... 루나, 셈 할 줄 알아?"

"?"

"더하기 빼기 할 줄 아냐고."

"...알아요."

"글자도 알고 더하기 빼기도 할 줄 알고. 훌륭하네."

8살에 이 정도면 이 세계에선 엘리트였다.

물론 루나는 따로 배운 것이 아닌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을 기억해둔 것이지만, 레이는 거기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두자릿수 덧셈도 가능해?"

"...?"

"34 더하기 77은?"

"...111이요."

주변에서 경악 어린 헛숨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레이의 수업도 들은 적 없으면서 두 자릿수 덧셈을 할 줄 안다니! 게다가 답이 세 자릿수야!

모두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던 와중 카렌이 자기 손톱을 으득 깨물었다.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을 직감한 것이다.

잠시 옆 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되물었다.

"곱하기 나누기는 할 줄 알아?"

"...?"

"ok."

레이는 교단으로 걸어나가 곱하기와 나누기의 개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사과가 두 개씩 세 묶음이 있어요~ 그럼 사과는 여섯 개가 되지요~ 와 같이 아이들 알아듣기 쉽게 말이다.

"복습은 된 것 같고, 다들 구구단 외워왔지? 오늘은 안 봐줄 거야."

"네!!"

호기로운 외침 중에 카렌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 용기를 가상히 여긴 레이가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카렌에게 다가갔다.

"6 곱하기 5는?"

"30!"

"3 곱하기 7은?"

"21!"

"훌륭한데."

"히히!"

레이가 주머니에서 곰돌이 모양의 쿠키를 꺼내 카렌에게 주었다.

카렌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곧장 쿠키를 입에 넣어 깨물었다.

누가 보아도 흐뭇한 광경이었지만, 정작 카렌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요하나는 사색이 된 채로 레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점점 더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요하나를 향해 레이가 운을 뗐다.

"요하나, 4 곱하기 7은?"

"..."

"5, 4, 3..."

"이, 이십 사?"

"마지막 기회다. 9 곱하기 4는?"

"...이, 이십 육?"

"공부 다시 해와."

"흐에엥..."

울상이 된 요하나 앞에 레이가 마주 섰다.

"벌 받아야지?"

"아, 안 돼! 안 돼요!"

요한나의 비명이 처량하게 울렸으나 레이는 굳은 얼굴로 곰돌이 쿠키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힘을 주자 '뽀각!' 소리와 함께 분리된 곰돌이 대가리가 반댓손으로 떨어졌다.

요한나는 일말의 희망을, 그러니까 곰돌이의 몸통을 레이가 건네주길 바랐으나.

"다음에도 틀리면 요것도 없어."

역시나 돌아온 건 손가락 한 마디 크기 밖에 안 되는 곰돌이 대가리였다.

"후에에엥..."

곰돌이 대가리를 받아든 요하나가 허망한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꼴을 바라본 루나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벌 준다며? 벌이 저거야? 간식 좀 덜 주는 게 벌이라고? 그게 서럽다고 요한나는 또 펑펑 울고 있고?

요한나가 깨작거리며 곰돌이 대가리를 긁어먹는 모습을 루나는 혼란에 빠진 채로 지켜봤다.

그 사이에도 구구단 퀴즈는 계속 이어져서, 아이들 대다수에게 쿠키를 돌린 레이가 루나 앞에 섰다.

"2 곱하기 3은?"

"...6."

"3 곱하기 2는?"

"...6."

"잘했어."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마지막 남은 쿠키를 꺼내려던 순간.

"잠깐! 잠깐만요!"

카렌이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났다.

"왜 루나한테만 쉬운 문제 내!! 반칙이야!! 불공평해!!"

"존댓말."

"불공평해요!!"

"그래, 불공평하지."

곱셈을 오늘 배운 친구한테 난이도 똑같이 맞추라는 카렌 네가 말이야.

카렌도 자기 고집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서로의 실력 차이를 명확히 다져두고자 하는 마음이 한참 앞서 있었다.

네가 똑똑해 봤자 얼마나 똑똑하려고?

나도 세 자릿수 덧셈 정도는 할 줄 알거든? 구구단도 완벽하게 외웠거든?

경쟁심에 불타는 카렌의 눈을 바라본 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어, 그렇다면..."

마침 레이도 루나의 수리 감각과 연산 능력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9 곱하기 7은?"

"...63."

"6 곱하기 8은?"

"...48."

"12 곱하기 27은?"

"...324."

두 자릿수 곱셈!!

여기저기서 재차 경악이 튀어나오는 중 카렌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오늘 막 곱셈은 배운 녀석이 벌써 두 자릿수 곱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 수나 막 뱉었겠지. 카렌은 확신했다.

한편 레이는 위화감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답이 맞은 거야 둘째 치고, 어째 루나는 쉬운 곱셈이나 어려운 곱셈이나 답을 말하기까지 딜레이가 동일했다.

레이는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1254 곱하기 627은?"

"...786258."

"..."

레이는 가만히 굳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얼핏 보면 경악한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암산하느라 바쁜 거였다.

그냥 연필 잡고 계산했다간 선생으로서 권위가 우르르 무너져 내릴 게 뻔했기에 식은땀을 뒤로 흘리며 두뇌를 팽팽 돌렸다.

답이 나오기까지 30초가 넘게 걸렸다.

"어, 음."

786258. 정답이었다.

"잘했어, 루나. 정답이네."

"말도 안 돼! 그냥 막 던진 거겠지! 아니면 레이, 루나랑 짜고서 우릴 놀리는 거야?!"

"내가 굳이 왜 그러겠어, 카렌."

"그럼 나도 못 푸는 문제를 루나가 풀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렌."

너는 레어 고아지만 루나는 유니크 고아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을 들어본 적 있니? 루나가 바로 나는 놈이야. 네가 얼마를 뺑이쳐가며 뛰어가도 멀어지는 나는 놈의 꽁무니만 바라보게 되겠지.

머리 속을 주르륵 훑고 지나간 문장들을 레이는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했다.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네? 긴장해야겠어, 카렌."

카렌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

"아이고야, 얘는 진짜 천재네."

레이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내며 루나가 적어낸 공식을 바라봤다.

사실 곱하기 빼기 연산이 빠른 것 정도야 그렇구나하고 넘겨버릴 수 있다.

연산 속도가 지능의 무조건적인 척도도 아닐뿐더러, 루나가 어딘가에서 암산법을 따로 배워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레이는 루나를 따로 앉혀 놓고 약 1시간 동안 곱셈, 나눗셈, 데카르트 좌표계, 면적 개념, 직각 사각형과 삼각형의 넓이 공식, 미지수, 명제논리에 대해 가볍게 줄줄 읊었다.

그러고선 둔각 삼각형을 하나 그려준 후 밑변과 높이만 알려주고 넓이를 구하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루나는 곧장 공식을 도출했다.

(a+χ) × h ÷ 2 - χ × h ÷ 2 = a × h ÷ 2

"아니 시발... 이게 어떻게 되지?"

둔각 삼각형 넓이 공식이야 대한민국 초등학생도 알고 있지만 그걸 한큐에 유추하고 증명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도 수학 배운지 1시간 된 친구가 말이다.

혹시 우연인가 싶어 좌표평면에 곡선 길게 그어놓고 넓이 근사값 구해보라고 했더니 곧장 x축과 직각으로 곡선을 잘게 쪼갠 후 높이 평균 내서 직사각형 넓이 합을 더해서 가져왔다.

"얘도 대한민국에서 환생했나?"

환생이 아니라면 루나의 지능은 평범한 영재의 영역조차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어지간한 인간은 원숭이랑 엇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우끼끼 우끼끼?

"선생이 필요해."

학문적인 부분이야 레이가 상당 부분 케어할 수 있긴 하다.

아아, 이건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라고 한다. 대학 가면 첫날 배우는 거지.

아아, 이건 패러데이 법칙이라고 한다. 이걸 알면 전기 발전이 가능하지. 대한민국에선 중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하여튼.

보육원에 비범한 아이는 몇 있었지만 그들이 지닌 재질의 정확한 쓰임새까지 레이가 재단할 수는 없었다.

꽃 피울 수 있는 분야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선생들이 필요했다.

루나도 연산력과 지능만 놓고 보면 고위 마법사의 재목처럼 보였지만 마나를 다루는 소양이 젬병일 수도 있고 마법이 아닌 평범한 학문에 뜻을 가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어쨌든 마법사와 기사는 주기적으로 초청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제는 지미를 설득해야 한다는 거지."

지미가 아무리 호구라고 해도 보육원 애들 가르치는데 마법사나 기사를 초청해줄 리는 없었다.

"뭐, 지미의 호구력이면 몇 달 꼬시면 한 번쯤은 들어줄지도...?"

"그만 처먹어라."

잭이 레이가 쥐었던 세 번째 사과를 뺏어가며 툴툴거렸다.

"요즘 팔아먹는 것보다 니들 패밀리에 뜯기는 게 더 많을 지경이다."

잭의 불만에 짐작 가는 게 있었던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이 좀 안 좋아지긴 했죠? 조직 커지기 전에는 다들 지미 말도 잘 듣고 얌전했는데 말이죠. 보호세를 제외한 갈취 행위는 두 번만 걸려도 손목을 잘라놓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도 변하는 게 없네요."

"네가 할 소리냐?"

한숨을 푹 내쉰 잭이 사과를 다시 던져주며 부탁했다.

"네가 지미에게 잘 좀 얘기해봐. 근래 들어 길거리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졌어. 저런 행패가 계속 벌어진다면 나도 널 도와주기가 힘들 것 같구나."

잭이 눈짓을 보낸 건너편 가게 안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불안과 분노에 휩싸인 잭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잭의 감정을 이해한 레이가 사과를 마저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기강을 좀 다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벼르고 있긴 했어요."

"...레이?"

"원래는 지미가 직접 해결할 때까지 시간을 가질까 하기도 했는데, 자기 어필도 좀 해야 될 것 같고 저런 새끼들은 빠르게 조져놔야 되기도 하고..."

소란이 일어난 가게로 걸어가려는 레이를 잭이 붙잡았다.

"잠깐만, 레이. 위험해. 지미 말도 제대로 안 들어 먹는 놈들이야."

"걱정 마요, 잭."

레이가 시원스레 웃었다.

보육원 애들 꼬셔다가 범죄 행위 동원하는 새끼들과 지미 말 안 들어 처먹고 조직 기강 해이하게 만드는 새끼들, 같은 놈들이었다.

"기강만 좀 다지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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