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2)
3화
"아악! 이 미친 작가 새끼!"
"왜 또 지랄이냐."
"용사가 마왕한테 죽었어!"
용사가 죽어?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한시현이 몸을 돌려 발광하는 불알친구를 쳐다봤다.
"그 소설 이야기지?"
"응."
"용사 키운다고 빌드업만 한 300화 하지 않았냐? 다시 소생시키겠지."
"아니라고! 쪽도 못 써보고 진짜 영혼까지 싹 쓸려 뒤졌다니까?"
"용사 존나 강하다며? 어케 한큐에 골로 가냐?"
"몰라, 이씨... 꼭 하꼬 새끼들이 작가병 걸려서 클리셰 비튼다고 급발진을 한다니까? 아악!"
장장 10분이 넘게 불알친구의 지랄이 계속되자 한시현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근데 마왕은 정체가 뭐냐? 고위 마족 그런거야?"
"떡밥 조금씩 뿌려지는 거 보면 인간 같던데? 말만 마왕이지 고위 마족이랑 맨날 트러블 있고 그래."
"인간? 인간이 왜 용사를 패죽이고 다니냐."
"어디서 인간한테 험한 일이라도 당했나 보지. 좆간, 좆간 네버 체인지..."
"하긴 니가 하는 얘기만 들어보면 그쪽 세계 좆간들도 어지간하긴 해?"
*
기절해 널브러져 있는 한스의 팔을 지혈한 레이가 마찬가지로 널브러져 있는 칼의 턱을 툭툭 찼다.
여기서 칼과 한스를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조직과 조직과의 싸움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라 손속을 두었다.
다만 기절한 녀석들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고개를 돌린 레이가 손을 뻗자 줄을 잘못 섰던 루나가 찔끔 놀라며 목을 움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름이 줄줄 흐르는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레이가 등을 내보였다.
"업혀봐."
빨리 주변을 떠야하는데 아무리 봐도 루나는 체력이 부족해 보였다.
망설이는 루나를 억지로 잡아당겨 들쳐맨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루나는 정말로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9살 먹은 육체에 아무 부담이 안 갈 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아이고 허리 휜다."
혹시나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참 열심히 달렸다.
영지와 영지 사이에 위치한 자그마한 숲을 지나치고 나서야 레이는 긴장을 좀 풀었다.
꼬맹이가 꼬맹이를 업은 채 핵핵거리며 걷는 모습을 마주한 마을 사람들이 한 마디 씩 던졌다.
"저놈 저거 또 시작이네."
"이번엔 또 어디서 데려왔데?"
"저러고도 잘도 안 쫒겨나고 붙어있는구먼."
"철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엥이."
'아니 왜 애니멀 호더 취급이지?'
레이는 억울해했지만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레이는 오펀 호더가 맞았다.
저리 데려가서 깡패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기는데 마을 사람들 눈에 보육원은 양아치 도둑놈 양성소였다.
"거 좋은 일 하는 애한테 다들 왜 그래?"
그나마 과일장수 잭이 유일하게 편을 들어주며 사과 하나를 던져주었다.
사과를 잡아챈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업혀있던 루나를 내려놓았다.
목덜미에 닿는 호흡이 불규칙하면서도 미약한 것이 어째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았다.
굶주린지 오래된 듯한데, 아무거나 던져줬다가는 곧장 체할 모양새라 레이는 자기 입에 사과를 가져가며 잭을 바라봤다.
"사과 주스 만들어 놓은 것좀 있으면 꺼내봐요."
"맡겨뒀냐?"
"거 미래의 새싹들을 위해 사과주스 한 잔쯤은 투자할 수 있잖아요? 자꾸 째째하게 굴 거예요?"
"너는 그 밉쌍스러운 아가리만 덜 놀려도 충분히 사랑받을 거다."
"좀 믿어봐요. 오늘의 사과주스 한 잔이 이십 년 후 지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거대한 과수원으로 돌아올거니까."
"다물고 이거나 먹여라. 비실비실한 게 금방이라도 눈 뒤집어 질 것 같네."
잭은 툴툴대면서도 오늘 아침에 갓 만들어낸 사과주스를 건네 주었다.
컵을 받아든 루나는 조심스레 한 모금 맛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황급히 컵을 기울였다.
"천천히 씹어 마셔. 괜히 체해서 고생하지 말고."
컵바닥을 붙잡은 채 타박을 놓은 레이를 향해 잭이 사과 하나를 더 던져주었다.
"이 동네 고아는 네가 다 주워갔을 텐데 저건 또 어디서 주워온 거냐?"
"디나르에 갔다 왔어요."
"디나르? 거긴 자작령 아니냐? 사고 친 건 아니겠지?"
"뭐, 지미가 어떻게든 해주겠죠."
"...그러다 오래 못 산다."
"충고 고마워요, 잭. 사과는 외상 장부에 달아놓으세요. 기한은 20년으로."
"일 없다. 주스 한 잔 더 주랴?"
옆을 돌아보니 루나가 컵 안 쪽을 열심히 혀로 핥고 있었다.
냉정히 컵을 뺏어들어 잭에게 돌려준 레이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래, 잘 들어 가라."
루나는 생기가 좀 돌아온 것처럼 보였기에 제발로 걷게 시켰다.
시장을 지나, 활기가 도는 번성한 마을을 지나쳐서, 조금은 낙후되고 음습해 보이는 길거리로 들어섰다.
밤이 되면 꽤나 화려해지지만 이곳이 홍등가라는 것을 모르는 루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말로 해봤자 오해가 풀리지 않을 걸 알기에 레이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루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 레이 형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이들 여럿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 보육원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가 왔다는 소식에 보육원 안에서도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머?"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수녀복을 입은 중년의 여자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미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하고 있는 아델이었다.
"레이, 또 새로운 친구를 데려왔니?"
"루나라고 한다네요. 잘 부탁드려요."
꼬질꼬질한 루나의 몸을 한 번 더듬은 아델이 측은한 얼굴로 루나의 손을 맞잡았다.
"많이 야위었구나. 씻고 식사부터 하자꾸나."
루나는 말 없이 아델을 바라보다 우스꽝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 더러운 굴로 끌고 가져 못볼 꼴을 당하는 게 아닐까.
아님 또 다시 길거리에 버려지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끊임없이 피어오르던 의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또래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머물고 있는 보육원에 발을 들인 루나가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흑, 흑, 흐윽..."
"괜찮다. 괜찮아. 고생 많았구나."
"흐아아앙..."
아델의 위로에 더는 자기 감정을 주체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루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이가 뚱한 얼굴을 했다.
'으음... 저건 쫌 '평범'한 애들 같지 않나?'
내심 루나가 보육원에 도착하고나서도 첫만남과 같은 냉정함을 유지해줄줄 알았던 레이는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평가를 유니크에서 레어로 하향 조정 해야하나...'
그는 어느새 전생의 자신이 '좆간'이라 표현했던 종족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
루나에게 아이들의 관심이 쏠린 덕분에 레이는 잠깐의 여유를 되찾았다.
물론 트러블이 끊임 없이 발생하는 보육원답게 입구에서부터 금세 큰소리가 울렸다.
"여기 원장 어디갔어!!"
정문의 울타리를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사내 아이의 귀를 거칠게 붙들고 씩씩대고 있었다.
레이는 뺨에 멍자국이 난 아이를 확인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의 이름은 마스.
이 보육원에 들어온지 3년 정도 된 아이였는데, 영 말을 안 들어처먹은 놈이었다.
그렇다고 가만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입구로 걸어갔다.
"아저씨, 여기 보육원 원장은 지미야. 지미 불러줘?"
지미라는 이름에 흠칫 놀란 남자, 리오가 말을 더듬으며 보육원을 가리켰다.
"그, 그 원장 말고! 이 새끼 먹이고 가르친 선생 데려오라고!"
"리오, 목소리 좀 낮춰."
리오는 레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흠칫 놀라 얼을 탔다.
리오 입장에서야 레이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듯 몇 번 봤을 뿐이지만 레이는 리오를 잘 알고 있었다.
리오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잡다한 심부름이나 사냥을 하며 하루 먹고 하루 사는 모험가로, 운이 좋아 목돈을 만질 때마다 창관을 방문했다.
그는 요즘 리사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매춘부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리사는 '라일락의 저녁'이라는 창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 근방에선 가장 알아주는 창관이었다.
그리고 '라일락의 저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매춘부가-
'내 엄마지.'
친모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환생하니 엄마가 용주골 에이스라.'
그녀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레이로서의 삶이 꼬인 건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애미 애비의 탓이었다.
"하여튼 리오."
흥분이 좀 가라앉은 리오에게 레이가 말투를 바꿔 물었다.
"마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화가 났어요?"
"그, 그, 이 새끼가 내 주머니를 털고 도망갔다고!"
"소매치기를 당했다고요?"
"그래! 안 그래도 요즘 소매치기가 많아졌다고 주점에서 떠드는 녀석들이 많던데, 이제보니 그게 다 여기 고아 새끼들이 저지른 일이었어!! 윽!!"
대화 도중 리오의 손길을 뿌리친 마스가 보육원 안쪽으로 도망가려 했다.
레이가 손을 뻗어 마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거 놔!"
레이의 제지를 가소롭게 여긴 마스가 거칠게 어깨를 털었다.
마스는 레이보다 나이가 많았고 신장 또한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완력에서 본인의 우위를 자신한 마스였으나, 레이가 작정하고 손아귀에 힘을 주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으음, 리오, 털린 물건은 돌려받았죠?"
"그, 그야 이 녀석을 내가 잡았으니까. 그래도 피해자가 한둘이 아닌...!"
"일단 미안해요, 리오. 앞으로 이런 일 없게, 이 녀석은 내가 잘 교육해 놓을게요."
리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으나 이어지는 레이의 설득에 표정을 풀었다.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줘요. 리오는 참 정의롭고도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리사에게 잘 이야기해 둘 게요. 알잖아요? 거기 누나들이 나 귀여워하는 거."
꽤 혹하는 이야기에 리오가 헛기침을 했다.
"흠, 정, 정말이냐?"
"당연하죠. 그리고 리사 누나는 리오가 해주는 여행 이야기를 엄청 좋아해요. 그러니 다음주쯤 한 번 들러 저번에 끊겼던 이야기 좀 마저 해주세요. 궁금해서 애가 탄다고 하네요."
"크흠!"
리오는 만연하게 떠오른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번 정도 더 확답을 받은 리오가 보육원을 떠나자, 제자리서 버둥거리던 마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이거 안 놔?!"
"..."
레이는 평소 아이들을 다룰 때 폭력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힘 자체가 부족해서고, 나머지 하나는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탈이 아직까지는 발생하지 않아서였다.
허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쫘악!!
고작 9살 아이의 손찌검에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터졌다.
너무도 큰 충격에 정신을 못차리고 휘청거리는 마스의 멱살을 레이가 붙잡았다.
"대가리 원위치."
"..."
"대가리 원위치."
"..."
쫘악!!!
"대가리 원위치."
"흑... 흑..."
"질질 짜지 말고 대답해."
레이가 재차 손을 들어올리자 마스가 질겁하며 팔을 들어올렸다.
마스의 팔을 툭툭 쳐낸 레이가 얼굴을 들이댔다.
"소매치기, 혼자 했어?"
"그, 그건 아닌데..."
"같이 한 새끼들이 누구야."
"피, 필립이랑 드웨인... 마, 마리도 했고..."
"처음 종용한 새끼가 누구야."
"조, 종용?"
"꼬신 새끼들이 누구냐고. 니들끼리 갑자기 미쳐서 그런 짓을 시작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잠시 레이의 상황을 복기하자면.
레이가 굳이 절망에 빠진 고아들을 수집하는 이유는 그들 중에 '영웅의 자질을 지녔으나 제대로 피지 못한 아이' 혹은 '열약한 환경 탓에 타락해 결국 거악이 된 아이'가 존재할지도 몰라서였다.
때문에 레이가 가장 경계하는 건 자기가 모아 놓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요인들이었다.
가뜩이나 환경이 환경인지라 못볼 꼴도 자주 보는데 아이들에게 대놓고 범죄를 종용하는 자들이 있다?
'작살을 내야한다.'
레이의 가설(초월자가 발굴자/암살자 역할을 레이에게 맡겼다는 설)이 옳다는 전제하에,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범죄에 노출되다보면 어떤 나비 효과가 발생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예컨데 용사의 씨앗이 어릴적 소매치기 경험을 바탕으로 뒷골목 거악으로 성장한다면, 이쪽 세계는 나가리였다.
"야, 누가 꼬셨냐고."
사실 이런 저런 이유를 떠나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놨더니 은혜 모르는 짐승 새끼가 되어서 짖어대는 꼴을 레이는 볼 생각이 없었다.
레이의 감정에 감응한 마나가 살기와 뒤섞여 맞닿아 있는 마스를 찍어눌렀다.
공포에 빠져 덜덜 떨기 시작한 마스가 절로 입을 열었다.
"로, 론 형님이랑 나기아 형님이 방법을 가르쳐줬어. 너희들도 빨리 1인분 몫은 해야한다고..."
론과 나기아라면 지미가 우두머리로 있는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레이는 상황을 이해했다.
지미의 부하들 중 대다수가 보육원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열심히 돌아다니며 수금한 돈 중 상당한 액수가 보육원 유지에 투자되고 있으니 불만이 없을리가.
때문에 보육원의 아이들보고 앵벌이라도 시켜야된다며 자주 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 기강 잡을 때가 되긴 했지."
동네 양아치놈들이나 철 없는 애새끼들이나.
마나도 활성화시켰으니 괜히 더 나쁜 물 퍼뜨리기 전에 기강을 잡아야 했다.
작게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길게는 세계를 위해, 궁극적으론 레이 본인을 위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