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 (1)
2화
집 안에 본인을 제외한 온기가 없어진 지 사흘이 지났다.
루나는 탁해진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얼마 없던 재화와 쓸만한 가구들은 이미 누군가가 쓸어간 후였다.
여기저기 찢어진 낡은 옷가지를 저며본다.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속살을 파고드는 시린 한기는, 달라붙은 뱃가죽 탓인지 뻥 뚫린 마음탓인지 사라지지 않고 곁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 굶주림에 속이 배배 꼬이며 도리어 구역질이 났지만 입으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선 당장에라도 움직여야 했으나 루나는 자리를 지켰다. 그게 효율적이었으니까.
"에이 시발, 이 새끼들 도망갔네?"
마른 남자 하나가 삐걱거리는 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성질을 냈다.
뒤이어 들어온 덩치 좋은 남자가 집 안을 한 번 돌아보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칼 형님. 그사이 날랐을 줄은..."
"이게 주둥아리만 살아가지고. 그 새끼들이 안 갚고 튄 빚이 얼만데. 네가 대신 갚을 거냐? 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부모라는 놈들이 제 자식 새끼까지 버리고 도망갈 줄은 몰랐습니다."
"에이씨, 일단 저거라도 붙들고 와. 돈 생기면 찾으러 오겠지."
어설픈 연기였다.
루나에게 아직 감정을 짜낼 기력이 남아있었다면 분명 비웃었을 터다.
힘이 모자라 숨을 끅끅 쉬고 있는 루나를 향해 덩치 좋은 남자가 다가왔다.
"엄마 보고 싶냐?"
보고 싶지 않았다. 허나 보고 싶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덩치가 웃었다.
"그럼 아저씨랑 같이 가자. 울지 말고. 그럼 엄마 만나게 해줄게."
성인 남성의 기세에 루나는 어깨를 좁히면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치 좋은 남자는 아이 우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는 것에 만족해하며 가느다란 루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아이가 추후 어디로 팔려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남자에겐 관심 밖이었다.
아이를 넘긴 후 자신에게 두둑이 떨어질 수당으로 행할 수 있는 사치만이 머리를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집을 걸어 나오는데 집 앞에 웬 세상 싸가지 없이 생긴 꼬맹이 하나가 무릎을 접은 채 앉아있었다.
"...? 야, 꺼져."
저 나이 때 애들은 대개 인상 한 번 쓰면 후다닥 도망가기 일쑤였다.
헌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년은 똑같이 인상을 한 번 쓰더니 루나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거 가져다 팔 거지?"
*
레이가 머물고 있던 마을은 필립스 백작령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말이 백작령이지 이미 한참 전에 세가 기울어서 땅덩어리 자체는 쬐끄만 했다.
돈이 많이 도는 것도 아니고 지리적 요충지도 아니여서 중앙 정부 입장에선 관심 밖에 나 있는 지역이었다.
레이는 보통 필립스 백작령 내에서만 빨빨거리며 돌아다녔으나, 오늘은 필립스 백작령과 오시리스 백작령 사이에 낑긴, 가디 자작령에 속한 마을에 발을 들였다.
'거리가 깨끗하단 말이지.'
가디 자작의 수완이 좋았던 탓일까.
가디 자작령은 백작령 사이에 낑기고도 꽤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다만 후계를 얻지 못한 가디 자작이 작위를 내려놓고 은퇴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분위기가 숭숭한 곳이기도 했다.
레이는 돌맹이를 툭툭 차며 길을 걸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있을 때는 굳이 레이에게 먼저 시비를 거는 자가 없었다.
애새끼가 건방지게 녹슨 검을 차고 다녀도, 가게에서 과일 한두 개를 훔쳐먹어도 대부분 겉으로는 웃어주며 넘어갔다.
허나 이곳은 '지미의 영역'이 아니다.
자작령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을 걷고 있자면 꼭 시비가 걸려 왔다.
"어이, 검 좋아 보인다?"
애들 용돈 모아 산 싸구려 검이라 해도 대장간 가서 팔아먹으면 간식값은 받는다.
레이는 망설임 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고 튀었다.
"어어? 저 새끼 잡아!!"
양아치들이 쫓아왔지만 몸뚱아리가 가벼운 레이는 남들이 보기보다 굉장히 오래 뛸 수 있었다.
양아치들을 따돌린 후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디 길거리에 나앉은 애들 없나 하고 살피길 한참.
홀쭉한 소녀가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나오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집 앞에 앉아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 인상을 쓰는 남자에게 되물었다.
"저거 가져다 팔 거지?"
"이게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곧장 손찌검이 날아왔지만 쓱 몸을 기울여 피한 레이가 소녀가 끌려 나온 집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냉기가 서린 집은 텅텅 비어있어, 집주인이 이미 짐을 들고 날랐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레이는 다시 한번 소녀, 루나를 바라봤다.
어린 아이에게 미색 운운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나 피부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탓에 누가 보아도 예쁘다고 칭찬해줄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저런 아이들은 구매자만 잘 찾으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
허나 어린아이의 인신매매라는 게 세력을 지닌 깡패들에게도 리스크가 꽤 큰일이라, 대부분의 경우 트러블이 생기지 않도록 밑 작업을 친다.
예컨데 가난한 부모를 꼬셔 꽤 많은 액수의 금전을 빌려준 후 갚지 못해 도망가게 만든다던가.
그 와중에 자식을 버리고 가면 뒤를 쫓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흘린다던가.
"진짜 버리고 튀었나 보네."
자주 있는 일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자식 버리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데 기초 교육 시스템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이쪽 세계에선 비도덕적인 선택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작업을 친 갱들은 채무자를 찾을 때까지 아이를 보호한답시고 데려갈 터다.
그리고 잃어버리겠지. 남들에겐 꼬맹이 새끼가 도망갔다고 툴툴댈 거다.
눈에 빤히 보이는 짓이었지만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만큼 혹시라도 문제 생길 때를 대비해 그림 예쁘게 그리는 게 중요했다.
"뭐, 어쨌든..."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잃어버린 소녀는, 돌발적인 상황에서도 입을 다문 채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누군가는 괴이함을, 누군가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테지만.
정작 레이는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안 우네?'
본디 열 살도 못 먹은 애들은 우는 게 일이었다.
지 감정 조금 수틀리거나 피부에 생채기만 나도 빽빽거리며 울어 재끼기 바빴다.
근데 부모는 도망가고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덤덤함을 유지한다?
누가 봐도 비범한 아이였다.
'레어 떴다!'
레이의 뇌리 속에서 루나의 평가가 '노멀'에서 '레어'로 상승했다.
혹자는 루나의 태도가 학대의 방증이라며 슬픔을 느끼겠지만 레이의 인성은 앳저녁에 박살 난 지 오래였다.
한동안 노멀 고아만 마주쳤던 레이는 비범한 루나의 모습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꼬마야, 나랑 같이 갈래?"
꼬마가 꼬마보고 꼬마라 부르며 손을 내미는 꼴을 보며 덩치 좋은 남자, 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완전 정신 나간 새끼 아니야. 뒤지고 싶어 환장했냐?"
"잠깐."
아이 상대로도 거리낌 없이 단검을 뽑아 드는 한스의 어깨를 칼이 붙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칼 형님?"
"저거 그놈이다."
세상 싸가지 없어 보이는 눈매. 검은 머리. 아이가 다루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큰 녹슨 검. 마지막으로 겁 없이 고아에게 접근해 손을 내미는 모습까지.
"필립스의 고아 수집가, 레이."
"네? 그 정신 나간 꼬맹이가 이 녀석이라고요?"
"쭉 찢어진 눈매 가진 놈 중 저렇게 사리 분별 못하는 애새끼가 이 근방에 또 있겠냐?"
둘의 대화를 들으며 레이가 뒷목을 긁적였다.
언제 저런 병신 같은 이명이 자신에게 붙었지? 이명만 보면 고아 잡아다 실험하는 흑마법사 같다.
내심 '필립스 백작령의 어린 성자'같은 별명을 바랐던 레이는 자기 행적은 고려도 안 한 채 억울함을 내비쳤다.
"좋은 단어 다 내버려두고 대체 왜..."
"주변에서 오냐오냐해주니 간이 배 밖에 나왔나보군요. 우리 구역까지 와서 기웃대다니."
"일단 단검은 집어 넣어. 어쨌든 지미의 관심을 받는 녀석이니, 괜히 죽였다간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씁, 알겠습니다."
"그리고 꼬맹아, 놀 거면 너희 구역 가서 놀아라. 여기는 지미의 구역이 아니야. 거기서처럼 까불었다간 팔다리 병신 돼서 돌아갈 거다. 특히 이번처럼 조직의 일을 방해하면 정말 재미없을 거야."
"아니, 아조씨, 조직의 일도 조직의 일 나름이죠."
서슬 퍼런 칼의 기색에도 레이가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애들 인신매매는 룰 밖의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갱스터, 그러니까 깡패 집단 간의 암묵적 합의 안에 미성년 아이의 인신매매는 속해있지 않았다.
말인즉슨 해도 상관은 없지만, 하다가 들킬 경우 무력 충돌이나 익명 고발 등의 방해 행위를 받아도 불평할 수 없다는 거다.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아가리를...?"
"맛있는 거 주는 곳으로 갈래요."
"?"
모두의 시선이 루나에게 쏠렸다.
깡패들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덤덤함을 유지하던 루나는,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재차 표했다.
"맛있는 거, 많이 주는 곳으로 갈래요."
"하!"
하도 어이가 없으니 웃음부터 나온다.
고개를 저은 칼이 입꼬리를 올리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꼬마야. 날 따라오면 평생 구경도 못 할 음식을 하루종일 대접받게 될 테니까."
재수가 좋아 친절한 귀족에게 팔린다면 식도락이야 원 없이 즐길 수 있을 터다. '할 일'만 똑바로 한다면 귀한 옷과 장신구도 선물 받을 수 있겠지.
루나가 눈을 깜박이며 레이를 쳐다봤다.
프레젠테이션을 요구하는 눈빛에 레이가 레이저포인터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잠깐. 저 아저씨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 이름이?"
"...루나."
"그래, 루나양. 이런 말이 있어. 높은 리턴엔 높은 리스크가 따른다. 뭐, 저 인간들 따라갔다가 마음씨 좋은 귀족에게 팔려 가면 꿀 빨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런 귀족이 몇이나 되겠어? 하물며 어린 소녀를 굳이 음지에서 돈 주고 사가는 인간이 뭐 얼마나 제대로 된 인격자겠냐 이 말이야. 반면에 이쪽은 낮은 리턴에 비해-"
"...낮은 리스크?"
레이가 두 손을 마주쳤다.
"그렇지! 변태 귀족이나 상인한테 팔려 가서 못 볼 꼴 보지 말고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우리 지미 보육원에..."
"이런 시발."
한스가 참지 못하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형님, 언제까지 애새끼 놀음에 어울려줘야 합니까?"
"후우. 어이, 꼬맹아. '룰 밖의 일'이란건 말이다, 불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힘으로 해결하란 뜻이다. 알아듣냐?"
최후의 경고였다.
적당히 까불고 꺼지라는.
지미가 신경 쓰는 아이든 뭐든 더 이상 성질을 긁으면 아예 병신을 만들어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루나는, 슬그머니 레이와 거리를 벌리며 칼과 한스 쪽으로 몸을 붙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둘과 비실거리는 꼬맹이 하나.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승자가 누가 될지는 누굴 붙잡아 물어도 뻔했다.
참으로 현명한 루나의 선택에 레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월척인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차분함.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지를 고르는 판단력.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을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신속함과 대담함까지.
도저히 레이의 또래라고는 보이지 않는 비범함이었다.
'저건 데려가야 해.'
루나에 대한 레이의 평가가 '레어'에서 '유니크'로 상승했다.
유니크 고아라면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인재였다.
결단코 변태들의 노리개로 낭비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충돌을 감수한다.
레이의 입가에 머문 시건방진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좋아. 힘으로 해결하자고."
쾅!
흥분을 참지 못하고 지면을 박찬 한스가 다짜고짜 앞발질을 해왔다.
삽시간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한스의 발바닥에 레이가 혀를 찼다.
'신장이 두 배쯤 차이나니까 뭔 거인이랑 싸우는 것 같네.'
곧장 옆으로 뺀 왼발을 축으로 삼은 레이는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공격을 피한 후 한스의 허벅지를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크악!"
급소를 찍힌 한스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설프게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을 피한 레이가 한 발짝 물러서며 균형을 다시 잡으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철심이 박힌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타격 범위가 광범위하다.
레이는 회피를 포기하고 녹슨 검을 검집 채로 들어올렸다.
까앙!!
성인이 힘껏 휘두른 쇠몽둥이다.
꼬맹이의 가냘픈 팔뚝으론 버텨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허나 레이가 들어올린 검집은 쇠몽둥이의 충격을 완벽히 상쇄시켰다.
'마나가 좋긴 하군.'
극소량의 마나라도 근육에 깃들이면 범인을 웃도는 강인함을 부여한다.
마나통이 조루라 함부로 사용할 순 없었지만 일시적이나마 성인과의 힘싸움을 가능케 했다.
칼은 제 몽둥이질이 막혔다는데 당혹하면서도 아래로 레이를 찍어눌렀다.
"건방진 새끼가!!"
그 틈을 노리가 한스가 레이의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옆구리에 구멍이 생기기 직전.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우득!
싸구려 목재로 이루어진 검집에 파열음이 울린다.
직후 검집을 부수고 검신을 드러낸 녹슨 검이 맞닿은 몽둥이를 파고들었다.
까가각!!
몽둥이 내부의 철심이 휘어지는 충격에 칼이 몽둥이를 놓쳤다.
반달을 그린 검이 한스의 팔뚝을 깊게 베었다.
"끄아악!!"
녹슨 검인지라 날붙이가 울퉁불퉁해 살갗을 거칠게 찢어놓았다.
비명을 지르는 한스와 몇 발 물러선 칼을 둘러보며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미가 왜 날 싸고돌며 좋아하는 지 알아?"
구라였다. 지미는 레이를 정말로 끔찍하게 생각했다. 안 좋은 쪽으로.
"내가 잘나서 그래."
이 또한 구라였으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웃어재끼는 꼬맹이의 모습은 칼과 한스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