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난간에 서서 멍하니 감옥섬 쪽을 바라보다가 흠칫 떠는 그를 보고 자신이 한 말에, 그렇게 답하는 다인오빠를 보고 한서은은 자기도 모르게 볼을 긁었다.
다인 오빠. ...역시나 오빠는, 오빠가 말했던대로 기억을 잃은 모습.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며 정중하게 대하는 것만봐도 틀림없었다.
어쩐지 멀어진듯한 느낌에, 역시나 섭섭하기는 하면서도...
"...으응."
한서은은, 묘하게 가슴이 들뜨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기억을 잃은 다인 오빠는 분명...
"...서은씨. 왜 그러시나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후훗."
그녀를, 어른으로 봐주고 있었기 때문.
늘 자신을 애 취급하던 때와는 다른, 사뭇 정중한 모습에 한서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한서은은 이미 겉보기에는 애가 아니였다. 벌써 대학교 2학년에 가까워지는 만큼, 청순하면서도 귀여운 외모로 이미 거리를 걸으면 몇몇은 돌아볼 정도는 되었다. 키도 에고스틱이 그를 처음 봤을때보다는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몸도 어른스러워 졌으니까. 머리카락도 기존의 단발에서 살짝씩 더 길렀고.
사실상 이미 지금의 그녀를 보고 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인은 이미 워낙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봤기 때문에 그걸 전혀 체감을 못챌뿐.
...그에게 있어서, 한서은은 어디까지나 여동생같이 귀여운 고등학생 서은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한서은 자신도 꽤나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이건 기회야!'
그랬기에 서은이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역시나 기억을 잃고나니, 자신을 완전히 어른으로 인식하고 있는 다인 오빠. 그러니 지금 꼬, 꼬, 꼬신... 아니지, 어른으로 인식을 확정지어 놓으면, 기억을 되찾아도 영향이 가지 않을까?
'...근데, 기억을 잃은 오빠도 새롭네.'
그런 생각을 하며 옆에 난간에 기댄채 서있던 다인을 보던 한서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을 잃은 오빠는 어쩐지... 무언가 차가운 느낌. 자신한테 그런다는게 아닌, 어쩐지 분위기가 그랬다. 눈매도 평소보다 날카로웠고, 훨씬 진중한 느낌.
...생각해보면 그녀는 다인의 과거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그가 원채 말을 아끼기도 했고, 푼 썰도 없으므로 더더욱.
어쩌면, 이번에는 오빠에 더해 더 알게 될 기회 아닐까...!
한서은이가 그렇게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꼭 쥔채 생각했다.
...이미 그녀는, 일기장을 바로 돌려준다는 생각따위는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커다란 저택에 도착했다.
"오빠, 여기가 우리 집이예요!"
나를 향해 그렇게 설명하는 서은이.
산 속 깊숙한곳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지어진 목조 저택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집이 딱 내 스타일인걸 보니까 내가 지은 집이 맞는거 같다. 예전부터 이런 분위기를 원했거든.
그렇게 초록초록한 정원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나.
...그런 내 주위를, 내 동료라는 이들이 애워싸서 걷고 있었다. 무슨 전쟁하러 가는것도 아니고...
집까지 오는 길. 나는 커다란 비행선 안에서 내 동료들이란 자들을 소개 받을 수 있었다.
"오빠, 여자친구 있었어요?"
나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질문을 한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하얀 중단발 머리의 여자가 서은이. 원작의 하얀마녀.
"...서은씨, 막 기억을 잃어 혼란스러운 다인 오빠한테 그런 질문은 실례예요."
그런 그녀를 나무라는 하얀 무녀복을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은월이. 월광무녀였다.
둘 다 친숙한 느낌이 드는걸 보니, 꽤나 친했던 모양.
그리고 어째서인지, 다 큰 애들임에도 불구하고 막 챙겨줘야 할 것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들이 있었다.
[하하! 다인, 기억을 잃었다고? 그럴수 있지. 원래 사나이는 살면서 기억도 잃고 그러고 사는거 아닌가!]
내 등을 팡팡 치면서 그렇게 말하는 검은색 갑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한 그는 데스나이트.
"흐음... 내가 지금 장난치면 나중에 기억하려나..?"
나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보라색 단발머리에 후드를 쓰고있는 윤회안같은 보라빛 눈동자를 한 여자가 서자영. 원작의 흑령, 이 세계에서의 미스트.
"넌 진짜, 에휴..."
쯧쯧하며 노란색 포니테일을 흔드는 그녀가 아까 본 일렉트라일꺼고.
"...지금 다인의 기가 굉장히 허약하네. 아마 안정을 취해야 할거야."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비녀를 꽂고 머리에 작은 용의 뿔이 나있는 하얀 소복을 입은 그녀가 신령.
"오빠, 괜찮아요?"
내 팔에 매달려 울먹이고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애가 아리엘, 원작에서는 설정으로만 있던 인물. 그리고 그 옆에있는 착해보이는 여자가 빌런들의 성녀 이하율.
그리고.
"다인씨, 이쪽이예요."
싱긋 미소지으며 맨 앞에서서 나를 이끌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한 이 사람이, 이수빈. 원작에서 한번도 본적 없는 인물이자... 어째서인지, 믿음이 가는 그녀였다.
하여튼 그렇게, 나는 저택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목재건물에, 전체적으로 창이 많아 햇볕이 잘 들어오는 훈훈한 분위기의 이 곳.
'...근데, 이게 빌런들의 아지트가 맞나?'
사악한 S급 빌런들이 사는 곳이라기에는 어쩐지 너무 포근한(?)분위기의 이곳에서, 나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일단 다인씨 방을 먼저 안내해 드릴게요."
나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수빈씨의 말에, 나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느낀 거지만, 그녀는 참 착한 사람 같았다. 말도 나긋나긋하게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기본적으로 담겨있고. 원작에는 분명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인물임에도 내가 등용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일단 방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겠다고 말한 뒤 잠시 혼자 남게된 나는.
"휴우..."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일단 코트를 벗고, 대충 옷장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은 나.
그리고 코트 주머니 안에있던 녹음기를 닮은 무언가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내 기억은...
[아 그리고, 기억은 서은이한테 맡긴 일기장을 펼쳐보면 저절로 마법처럼 촤르륵 돌아올거야. 아마 서은이가 줄테니까, 그거 봐.]
...아마, 기억을 잃기전의 내가 마지막으로 말한 그 말에 따르면 될거다.
문제는 그 서은이가 나랑 눈을 마주치면 어색하게 눈을 피하며 도망가는걸 보면 딱히 일기장을 바로 줄 생각이 없어보인다는건데...
'뭐, 나쁘지않나.'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기억을 바로 되찾을 생각은 없었거든. 왜냐하면...
이번이, 나를 돌아볼 기회이기도 하니까.
"..."
그래. 나는 현재 이 세계와 관련된 기억을 잃은 상태. 그런만큼, 지금의 시각으로 이때까지와 현재의 상황을 되돌아보면 뭔가 새롭게 깨닫는게 있을 수도 있다. 이게 진정한 자기객관화 아니겠어?
즉, 이 기회를 내가 이 세계에서 진행하고 있던 것들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삼겠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사실상 막 빙의해 혼란스러운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성을 중시했기에 내릴 수 있었던 냉철한 판단. 어차피 여기서 질질짠다고 뭐가 돌아오지도 않고, 어차피 기억도 되찾을테니까 이게 제일 이득인 판단이었다.
한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 가면을 벗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수를 한 뒤 거울로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
이상하게도, 분명 이 세계에서 몇년을 보냈다고 들었는데도 어째 전날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얼굴.
...처음부터 어려져서 이 세계에 온건지, 내가 알고보니 동안이었던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하아, 이게 무슨 일인지."
나는 그렇게 손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루아침에 히어로 만화에 빙의하다니, 하.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정말 황당한 꿈. 솔직히 현실성이 없는 기분.
...그랬기에, 나는 멘탈을 좀 챙길 수 있었다.
특히 기억을 되찾으면 다 끝이라는 생각도 있고, 내 옆에서 나를 챙겨주는 동료들도 있고, 미래의 내가 남겨놓은 지침도 있으니까.
다만.
'.....'
그래도, 무언가 공포스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 친구들, 부모님을 전부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
그나마 아까전에 말한 이유들과, 일주일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참을 수야 있었지야...
'이 세계에 처음 빙의했을때, 그때 나는 대체 어떻게 버틴걸까.'
지금이야 이미 쌓아올린 것들도 정말 많아보이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동료들도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일반인의 몸으로 모든걸 잃은 채, 이 파워밸런스라고는 박살난 피폐물 세계에 떨어졌을 때.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고, 친구 하나 없고 지침서도 없이 막막하게 이 세계에 왔을때 나는 대체 어떻게 버틴건지. 그게 의문스러웠다.
'...일단, 차차 알아가보도록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닦은 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일단은 내 동료들이란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자.
***
[카르케아스에서 일어났던 에고스틱 주도의 감옥 파괴 테러, 일명 대탈옥도 마침내 정리된 분위기입니다. 탈옥을 시도한 빌런들도 대다수 잡혔으나... 에고스틱, 크로커다일맨, 던전메이커를 비롯한 5인의 빌런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협회당국은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하며,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그렇게 내가 기억을 잃고 깨어난 직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나는 여러가지를 알게됐다.
[한편, 에고스틱을 풀어내라는 석방 시위를 하던 이들은 에고스틱이 탈옥한 이후 모두 만족해하며 해체된 분위기입니다. 특히 시위를 주도한 에고스틱 팬카페 멤버수는 시위 기간동안 가입자수가 매일 만단위로 늘었으며...]
바로, 이 세계에서 내 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그러니까 농담이 아니라, 빌런인 내가 히어로인 스타더스보다 인기가 더 많아보이는 모습이었다. 빌런인 내 팬카페까지 있는걸 봤을때는 정말 어이가 없더라.
특히 저번에 서은이가 보여준 내 팬카페의 인기글들 모습은...
*
[에고스틱이 당연히 ㄹㅇ 일부러 잡힌거겠지 그거 의심한 새끼들은 뭐냐??? 감다뒤ㅋㅋㅋㅋㅋㅋ]
[순혈 망고단 특) 사실 에고가 탈옥할거 알고 있었음ㅇㅇ...]
[아니ㅋㅋㅋㅋ 애초에 망고 잡혔는데 에고스트림 멤버들이나 동맹들이 안 나선게 다 이유가 있던거겠지ㅋㅋㅋ]
[[팩트]그래도 시위하러 나선 망붕이들이 부끄러워할 것 하나없는 이유... royalty]
[호감고닉 철우좌 근황... 감동의 망고빵 기부]
[사실 이거고 저거고 망고 방송 다시 볼 생각에 그저 기쁠뿐인 망고단은 개추ㅋㅋㅋㅋㅋ]
[빌런들 탈옥하건 말건 신경 1도 안쓰는 망붕이면 개추ㅋㅋㅋㅋ ㄹㅇ 탈옥하던 알빠노? 어차피 에고스타가 다 다시 잡아준다고ㅋㅋㅋ]
[음모론)에고스틱이 잡혀있던 1주일. 그리고 그 1주일동안 공개석상에서 사라져있던 스타더스... 둘이 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