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2화
화도움과 연락
"아이고, 당연히 저희가 힘 좀 써봐야지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회장님 부탁인데, 어찌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사해요."
고급스러운 한식당.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과 하늘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성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다 이설아 회장님께서 나라를 생각해서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남자의 아부섞인 말에, 조용히 미소지을 뿐인 그녀.
이내 자리가 파할 무렵, 그녀는 흘러가듯 그에게 말을 건냈다.
"요즘 야당이 재미를 못 본지도 한참 되었다던데..."
"아이고... 저희가 더 잘해야지요."
"이번에 잘됐으면 좋겠네요. 특히... 감의원님처럼 능력있는 분이라면 그 과정에 충분히 기여하실거 같네요."
해석. 이번에 한자리 해먹을 수 있게 팍팍 밀어주겠다.
정치짬밥이 있는 만큼 그 속뜻을 모를 리 없는 감의원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이내 감의원은 희희낙락하게 웃으며 사라지고.
썬팅된 검은 리무진의 뒷자석에 올라탄 이설아는,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유성그룹. 그리고 이설아. 그녀는 이미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넘보기 힘들 정도의 권력을 쥐는데 성공했다.
이미 사실상 한국의 경제는 그녀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상황. 이에 압도적인 재계 장악력을 바탕으로 정계도 차츰 먹어치우기 시작한 그녀는, 이미 여의도를 반쯤 장악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에 정부와 의원들도 이설아와 유성기업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당근과 채찍을 조금 잘 이용하면, 유성기업이 그 어떤일을 하든 정치권에서 말이 나오는걸, 어느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거기에 이미 여권은 예전에 장악 끝낸 그녀가, 야권에서도 다른 말이 안나오도록 오늘 만남을 가진거고.
"휴우..."
바쁜 와중에 정치권 인사들과 여럿 만나 말을 맞추는건 그녀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끝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고스틱. 다인의 부탁이었으므로.
"..."
PMC.
에고스틱이 자신한테 꺼낸 이 사업은, 생각보다 문제가 많은 사업이었다.
일단 기업이 사적으로, 그러니까 돈으로 능력자들을 고용한다는건데, 이게 잘못하면 기업이 무장 조직을 가지려 든다며 여러 소리가 나올 수 있기 때문.
이미 능력자들의 전쟁터가 된 다른 나라에서야 꽤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한번도 없던 일.
이에 이설아는 처음부터 신중히 접근해야했다.
사실 정계나 언론보다 더 큰 문제는 협회였지만, 이는 협회장과 그녀의 끈끈한 커넥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거다. 애초에, 그녀도 히어로 아닌가. 협회 탈퇴는 절대 안한다고 하고, 여러 지원을 약속하며 다 인류를 위한거라고 넘어가면 어떻게 잘 될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느새 이설아는 예전에 다인과 나눴던 대화를 반추해봤다.
...
"...능력자들을 모아, 사기업을 하나 만들꺼야. 일명 PMC."
"네?"
그날. 유성기업 꼭대기 사장층.
이제는 그녀와 다인의 공식적인 만남의 장소가 된 그곳에서, 다인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설명했었다.
A급 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B급 이하의 능력자들을 다수 고용해서 경호업체 같은 걸 만든다든 그의 계획.
물론 표면만 그런거고, 실제로는 훈련부터 실전투입까지 준비할 PMC.
"능력자들이 협회에 히어로가 되는걸 꺼리는 이유가 뭔지 알아?"
박봉에, 일은 고되고, 욕은 많이 먹기 때문.
히어로가 한번의 실수라도 하면 매도당하는게 일상인 대한민국에서, 히어로로 살아가는건 쉬운게 아니다. 아싸리 돈 많이 주는 A급이여도 안할 마당에, B급 이하는 더더욱.
그렇게 설명을 한 에고스틱은, 이내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런 잉여인력들을 놀리느니, 차라리 싹다 고액에 고용해서 훈련에 정신교육까지 시키는게 맞다고.
왜냐하면...
"앞으로, 치안이 굉장히 혼란해질거야."
마치 미래를 보고 온듯 마냥 확정이라는듯 단언하는 다인의 진지한 말에, 이설아는 자기도 모르게 납득했다. ...대체 어떻게 아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즉... 앞으로 능력자들이 돈벌겠다고 빌런타락하기 전에, 아예 고용하는게 나쁘지 않을거란 소리지. 그리고 걔들도 다 쓸데가 있을거고."
그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거였다.
대한민국은 모종의 사건으로 치안이 무너지고 빌런이 판을 친 날이 올거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능력자들을 사적으로도 고용해 유사시 전력으로 훈련시켜야한다.
사실 따져보면 근거도 뭣도 없는 말.
그러나 이설아는 그걸 믿었다. 지금까지 그가 한말이 틀린적이 없기도 한... 에고스틱. 다인의 말이었으니까.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야."
다인은 그녀의 눈을 마주쳐오며, 그렇게 말했었다.
능력자들로 사조직을 만든다. 그 누가 시도하는 순간, 정부와 협회의 역풍에 그대로 바스라 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반쯤 먹은 유성기업이 아니라면, 누구나.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하는 다인에게, 이설아는 순순히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뭐... 애초에 이제 대한민국이 거의 그녀꺼인만큼, 한국을 지키는건 그녀 입장에서 좋기도 하고. 애초에 자신이 잘못한 게 있기도 하고. 다인씨에게는 받은게 많을 뿐더러...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도와줄 수 있는거니까...'
그렇다.
이건 오직 이설아, 자신만이 에고스틱에게 해줄 수 있는 일.
거의 미래를 보는 능력을 지녔을 정도로 판단력이 좋은 에고스틱도, 그의 능력만 강한 동료들도, 심지어 스타더스도 할 수 없는.
이설아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으흥..."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왜인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진 이설아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하며 리무진 뒤에서 다리를 까딱거렸다.
그래. 지금까지 대한민국 먹어보겠다고 아옹다옹 한 보람이 있다. 이게 아니였으면, 과연 그녀가 에고스틱에게 이런 걸 도와줄 수 있었을까?
앞으로 에고스틱이 PMC를 떠올릴때면, 자연스럽게 이설아 자신도 떠올리게 되겠지.
그렇게 천천히 그의 마음을 자신으로...
기분이 좋아보이는 듯 리무진 뒤에서 다리를 까딱거리던 이설아는, 이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곤 운전기사에게 말을 건냈다.
"아 맞다. 여기 이 주소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래, 서울에 온 김에 오랜만에 하루 얼굴이라도 볼까.
그렇게 생각한 이설아는, 차를 돌려 하루의 집으로 향했다.
"하루..."
오랜만에 보고싶네.
사실, 하루는 설아에게 있어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이제는 다인이 생겨 예외라지만, 그전까지는 거의 유일.
어린시절부터 만나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으니까...
"오랜만에 가면 좋아할려나?"
사실 최근에는 에고스틱 관련 일로 몇번의 사소한...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걸로 둘의 사이가 멀어질정도는 아니다.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 거의 유일한 상대였으니까. 이설아가 말을 놓는건 하루가 유일하기도 했고.
어쨌든 그녀는 이번에 하루의 집에 깜짝 방문하기로 했다. 협회에 없다니 아마 집에 있을거다. 특히 최근에는 에고스틱이 테러를 안한지도 벌써 3개월이 넘었으니, 할 일도 없을테니. 워커홀릭 아니면 집순이인 신하루가 어디 있을지는 뻔한일.
그렇게 생각한 이설아는, 이내 차를 타고 하루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이내 현관문 앞까지 도착한 그녀.
"흐흥... 깜짝 놀래켜줘야겠다."
이내 이설아는 자연스럽게 신하루의 집에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서로 워낙 친하다 보니 아무때나 오라며 이미 서로의 집 비밀번호는 알고있는지 오래.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간 이설아는, 밝은 소리로 외쳤다.
"하루야, 나 왔어~."
이내 미소를 띄우고 들어온 이설아를 맞이한건.
어떻게 된건지 약간 어두컴컴한 집.
왜인지 느껴지는 싸한 분위기에, 이설아는 작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하루야..?"
돌아오지 않는 대답.
하루가 없나, 하고 거실쪽으로 향하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벽쪽에 붙어있는 에고스틱의 사진에 순간 멈칫했다.
"...?"
에고스틱의 사진과, 그 옆에 적혀있는 글씨들.
이게 왜 여기 하루 집에 걸려있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가던 그때.
"설아야?"
"힉!"
순간 뒤쪽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얼음을 쏠 뻔했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보인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신하루.
갑작스러운 공포분위기에 이설아의 몸이 굳을때.
"언제왔어?"
금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반갑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 하루는, 이내 거실에 불을 켰다.
다시 밝아진 집. 이내 아까의 무서운 분위기와 다르게 밝아보이는 하루를 보며, 설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놀라긴 했지만, 역시 하루는 하루였다. 겉으로는 강하고 무뚝뚝한 스타더스인척 해도, 친구들에게만 보여주는... 사실은 착하고 따뜻한 신하루.
"방금왔어... 씻고있었구나. 순간 없는줄 알았네."
"아하하, 잘왔어."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는 하루.
요즘 뭐하고 지내나 살짝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밝아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에 안심한 설아는,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채 웃으며 말했다.
"잠시 서울 온 김에, 우리 하루 얼굴이나 볼까해서 왔지. 아 근데 하루야, 이건 뭐야?"
이설아는 궁금하다는 듯 벽에 걸린 에고스틱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고.
이내 신하루는 살짝 어두워진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 에고스틱 어떻게 잡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 물론 걔가 요즘 테러를 안해서 이렇게 혼자 생각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긴 하지만. 집에서 자기 동료들이랑 놀고있나보지."
그렇게 말하며 아하하- 웃는 하루.
...그리고 그 짧은 틈사이에 하루의 눈에 있는 약간의 다크서클과, 뭔가 영혼없는 웃음을 캐치한 이설아는 본능적으로 싸함을 느꼈다.
...아니, 애초에. 하루가 저렇게 아하하 거리며 잘 웃는 애가 아닌데...
"하하, 그래? 음, 일단 나 목이 좀 말라서. 혹시 여기 마실거 있어?"
"아. 기다려봐. 꺼내줄게."
가까스로 대화의 주제를 돌린 이설아는, 역시나 뛰어난 사업가답게 현재 하루의 상태를 눈치챘다. 음. 오늘 하루 앞에서 에고스틱 얘기는 꺼내지 말아야겠다. 분위기 안좋네.
다시한번 에고스틱에게 스타더스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설아는, 이내 자리에 앉아 하루와 이 얘기 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떠드는거라 그런지 분위기는 좋았다.
...물론 중간에 에고스틱 얘기가 실수로 나오는 바람에, 왜 자기가 꼭 에고스틱을 잡을것이고 왜 그녀 자신이 잡아야하는지에 대해 눈에 불을 키고 말하는 신하루의 열변에 살짝 이설아의 몸이 떨리긴 했으나.
그걸 제외하고는 화기애애했다.
정확히는, 둘의 대화 도중에 협회에서 '에고스틱을 잡기 위해 미국의 S급 히어로를 한국에 파견했다'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