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8화
화유성
유성기업.
대한민국 제 1위의 초거대기업.
세계 대기업 순위에서 유일하게 10위안에 들어가는 이 기업은, 처음부터 이렇게 독보적인 기업은 아니었다.
늘 3대 대기업에는 자리를 올렸지만, 그뿐.
시총과 인지도 자체는 한은그룹에 살짝 밀리는, 그냥 평범하게 유명한 대기업들 중 하나였을 뿐.
그러나 이는 최근 몇년사이에 크게 뒤바뀌었다.
바로 한은그룹이 스스로 자멸하면서, 판이 흔들어져버린 것.
간크게도 서울 지하에서 생체병기 제조를 시도하던 그들의 만행이 연구실패로 만천하에 드러나며, 기업은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한은그룹의 고위급 간부들은 전부 해외로 도주하고, 남은 핵심 개발진들은 테러를 일으키다가 다른 빌런한테 제압당하고.
그렇게 조각조각난 한은그룹 계열사들과 갈 곳 잃은 임직원들, 공중에 붕 뜬 기술들과 상표들을 전부 유성기업이 먹어버리며 상황은 굉장히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런 때만을 노렸다는듯 한은그룹의 부도와 연이은 테러로 국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비와 협박으로 다른 기업들마저 하나 둘 인수하기 시작한 유성기업.
그리고 정부가 눈치챘을 때, 유성기업은 이미 대한민국 재계를 거진 장악한 뒤였다.
그렇게 재계를 넘어 정치계까지 집어삼키고 있는 유성.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설아라는 여자의 지휘아래 일어난 일들이다.
이설아.
재벌 3세와 A급 히어로라는 둘 중 하나도 갖기 힘든 타이틀을 둘 다 가진 그녀.
갓 성인이 된 나이에 회사의 실권을 장악한 그녀는, 회장의 비공식 은퇴후 사장으로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유성기업의 이 모든 업적들은 이설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게 세간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신묘한 정치질과 속을 알 수 없는 행보, 어디서 알아온건지 모르겠는 고급 정보들로 기업과 정부를 뒤흔드는 그녀는 이미 기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거기에 본인 스스로가 히어로라 대중에게 나름 인기가 있고, 협회 소속이기에 직접적으로 보내버릴 수도 없고, 부산을 거점으로 해 지역의 충성도까지 지닌.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
이제는 그녀가 재계 정치계를 넘어 대한민국 그 자체를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공포감이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 팽배한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현재 제일 경외시되는 존재인 그녀는.
지금 내 앞에서 머리를 푹 숙인채 쩔쩔매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네...."
부산에서 제일 높은, 유성기업 본사 건물의 최상층.
그곳을 혼자 다 차지하는 사장실에서, 나는 앉아있었다.
정확히는 훨체어에 링거 맞으면서 앉아있었다.
"아니, 대체 그 상황에서 신하루를 데리고 온 이유가 뭐라고요?"
"...그, 하루가 당연히 다인씨를 못알아 볼줄 알고... 좀 사석에서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아."
그녀의 말에 내가 한숨을 쉬자, 흠칫 놀라며 나를 곁눈질로 흝어보는 이설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목소리를 깔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평소처럼 편하게 말을 놓지않고, 딱딱하게 존댓말로.
"....휴, 이미 지나간 일을 말해봤자 뭐하겠습니까. 비록 무리해서 능력 남용하느라 몸상태는 엉망이고, 이제는 스타더스마저 제 정체를 알아내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대놓고 안괜찮다는 듯 하는 내 말에 이설아는 계속 불안한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들더니, 내 가라앉은 시선을 보고 다시 푹 숙이는 그녀.
나는 그녀한테 다시 말했다.
"...그건 괜찮지만, 이설아씨한테는 개인적으로 실망했습니다. 앞으로 뭘 믿고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이러다가는 제 집 위치도 무슨 이유가 있다며 다른사람들에게 알리는거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절대!"
"조용히 하세요."
"네..."
다시 이설아의 입을 다물게 한다음, 나는 그녀한테 물었다. 아까처럼 압박의 의미도 있지만, 진짜 궁금하기도 해서.
"그래서, 왜 그러셨습니까?"
"네?..."
"아니, 무슨 이유야 있었겠죠. 제 말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누가봐도 위험천만한 계획이잖아요? 애초에 그 이후에 당연히 제가 이설아씨를 좋게 볼리도 없고요. 왜그러신거에요?"
"그게..."
그리고 이내 이설아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듣고보니 그 이유가.
"술?"
"네. 술을 마시니까 잠시 이성적 판단이 흐려져서..."
술마시고 심신미약으로 그랬다는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은데.
다만 혹시 모르니 나는 원작을 곰곰히 떠올려봤다.
이설아에게는 스타더스만큼 관심이 없었어서 세세한 설정은 잘 모르는데...
술, 술이라.
그렇게 잠시 기억의 세계에 빠진 나는, 원작에서 이설아가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기업체 하나를 박아버렸다는 걸 생각해냈다.
아니, 원래부터 그랬었네.
"앞으로 술 마시는건 금지에요. 오케이?"
"...네?"
"술. 금지. 싫으면 우리 이제 더이상 만나지 말고."
"...네! 알았어요, 이제부턴 정말 안마실게요!"
내가 훨체어를 돌려 문밖으로 나갈려고 하자, 다급히 대답하는 그녀.
사실 나는 원래부터 순간이동으로 사라져서 문밖으로 나간적은 없으니, 그냥 뭐 보여주기긴 하다만.
뭔가 스스로 말해놓고도 자신이 정말 술을 안마실 수 있을지 긴가민가해 보이는 이설아를 보고, 나는 한숨을 흘렸다.
대체 누가 쟤를 알콜중독으로 만든거야?
...따지고보면 나긴 한데, 그런 사실은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하아... 쿨럭, 쿨럭."
내가 잠시 한숨을 쉰 뒤 다시 피를 토하자 얼굴이 새하얘지는 그녀.
나는 미리 준비해온 손수건으로 닦은 뒤, 다시 피곤한 듯 말했다.
"에휴... 그래. 생각해보니 이게 왜 이설아씨 잘못이겠습니까. 이설아씨를 믿은 제 잘못이죠. 제가 조금만 더 주의했어도 됐을텐데, 이설아씨를 너무 신뢰했었네요. 쿨럭. 생각할수록 부주의한 제 잘못인거 같습니다."
"....죄송해요, 흑."
이런. 너무 돌렸나?
좀 압박을 여러차례 하다보니 이젠 눈물까지 찔끔 흘리려 드는 이설아를 보니 살짝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어서 확실히 해놔야한다. 고의는 아니였데도, 신하루한테 들켜서 그대로 다 망할뻔하기도 했고.
"잘못했죠?"
"진짜 잘못했어요..."
흠. 원래는 더 친해지고 부탁하려 한건데.
이 기회에 그냥 해버리자.
"잘못했으면 저랑 사업 하나 하시죠."
"....네?"
갑작스러운 내 사업제안에 의아한 듯 고개를 드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일은 나중에 벌인다고 해도, 일단은 허락만 먼저 받아놔야지.
어차피 얼굴 이름 팔린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다.
***
"휴...."
다인이 떠난 직후.
이설아는 조용히 와인잔에다가 포도주스를 따라 마셨다.
"...그래도 손절은 피했네."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포도주스를 원샷해버린 그녀.
도수가 없어서인지 머리가 아픈건 나아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폴라시보 효과로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하아. 미친년. 진짜 왜그랬지."
이설아는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며 머리를 감쌌다.
대체 거기서 왜 하루를 데리고 온다는 결론이 도출된걸까. 술에서 깬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결국 그 결과 다인과 거리가 다시 멀어지고, 그도 자신한테 다시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불같이 화를 내며 손절을 안한게 고마울지경. 이미 무릎꿇고 읍소할 자신마저 있던 이설아였던 만큼.
"...그래. 앞으로는 이런 짓 안하고 다시 신뢰관계를 회복하면 돼."
아마 될거다. 아니, 되야한다.
에고스틱, 다인. 그를 보내줄수는 절대 없으므로.
하아. 그놈의 술이 웬수지.
...그 미친놈들이 지랄만 안했어도 술 안마셨을텐데.
"....내가 기필코, 올해 안에 여의도 다 먹고, 말거야 진짜..'"
이설아는 그렇게 눈을 불태웠다.
대한민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나면, 다인씨도 자신을 다시 봐주지 않을까?
아직도 그의 실망한 눈빛만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거렸다.
...아, 그리고 다인씨가 마지막에 말한 PMC랑 학원인가 뭔가 그것도 알아봐야하고.
그래. 바쁘다.
이제부터 앞뒤 가리지 않고 진심으로 다 조져서 인수한다.
그렇게 이설아의 눈이 화르르 불꽃이 튀기듯 빛나며.
그날부터, 유성기업의 확장주의적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
다시 집에 돌아온 나는, 일단 이놈의 훨체어랑 링거부터 뜯었다.
이럴 정도로 아픈건 아니다. 다만 이설아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 좀 오버했을뿐. 애초에 링거안에 있는거 수액이다.
"다인씨! 수액팩을 뜯으시면 어떡해요!"
"아니, 이거 그냥 연기..."
"연기 아니니까 다시 붙이세요."
수빈씨의 말에 얌전히 다시 붙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해변에서 일어났던 일로 연속된 이벤트들은 이제 어느정도 끝이 났다.
스타더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설아를 통해 알아보라고 시켰지만, 일단 내 얼굴 이름이 현상수배되지 않은걸 봐서 아직은 괜찮아보인다. 애초에 따지고보면 얼굴은 인식저해 걸려있고 이름이야 가명쓰면 되니 상관은 없지만. 다만 이 신분은 버려야겠지.
하여튼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 기회에 테러도 미리미리 일으키고 이설아로부터 PMC 허락도 받아냈으니 좋은게 좋은거 아닐까? 어차피 제일 들키면 안되는 스타더스한테 신분이 털려서 이 신분도 거리낄것 없이 써도 된다는 장점이 있고.
하하.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수액을 질질 끌고 거실로 향했다. 이거 진짜 불편하네.
그리고 마침 거실에 있던 서은이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오빠. 이거 봤어요?"
"응? 뭘?"
그러자 티비를 조작하더니 그대로 뉴스를 하나 띄운 서은이.
그리고 그곳에는.
[속보입니다! 현지시각 오늘 브라질이 문자 그대로 멸망했습니다! 현재 브라질 당국이랑 그 어떤 연결도 안되고 있으며, 위성상으로 보이는데로 수도를 중심으로 국토가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는데요. 유례없는 일에 지금 국제사회가 마비되었습니다. 코스피가 폭락하며 각국 지도부들이 일제히 성명을 내고 있는데요...]
나라 하나가 그냥 문자 그대로 망했다는 속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 역시 원작대로 슬슬 개지랄 나기 시작하네.
"...이제는 진짜 진지하게 슬슬 준비해야겠구만."
멸망을 대비할 준비를.
스타더스는 쉬고 있어.
내가 나머진 알아서 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