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2화
화어긋난 만남
정말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것인만큼, 진짜 푹 놀았다.
썬베드에서 낮잠도 자고, 바다에서 물놀이도 하고, 해변에서 배구도 하고.
그렇게 다시 엑티브한 일을 한 다음.
저녁은 펜션에서 바베큐를 구워먹었다.
맛있더라.
그리고 또 해가 지고.
근처에 야시장이 열렸길레 다함께 구경나갔다.
머리카락이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우르르 뭉쳐다니면 상당히 눈길이 끌릴수도 있지만, 인식방해마법이 확실한지 아무도 우리쪽으로는 눈길도 안주는 모습.
물론 인형탈은 그래도 좀 오버같에서 데식이는 반지안으로 들어갔다.
"야! 이거 봐봐!"
그렇게 다들 구경하며 걷고 있을때, 저쪽에서 우리를 부르는 최세희.
"뭔데 그래?"
뭔가 재밌는걸 봤다는 듯이 손을 휘젓는 최세희. 그녀가 있는 쪽으로 우리는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내가 본것은.
"야 이것봐. 에고스틱 인형임!"
다트 던져서 풍선 맞추기 부스에 상품으로 걸려있는.
2등신의 에고스틱 인형이었다.
"....와. 이건 예상 못했네."
"푸흡. 야. 인형도 생기고, 아주 그냥 연예인 다됐다? 아니지, 연예인들도 자기 인형이 있지는 않지 않냐? 슈퍼스타야 슈퍼스타!"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놀리는 최세희에게 고개를 저어주며, 나는 다른 인형들도 살폈다.
근본 없어 보이는 녹색 공룡 인형같은게 대다수긴 했지만, 에고스틱 인형처럼 특이한 것들도 있는 모습.
오, 자세히 보니 스타더스 인형이랑 아이시클, 섀도우워커까지. 히어로들 인형도 있네. 스타더스는 좀 탐나는데.
...잠깐, 저건 뭐지?
"야! 이건 너 아니냐?"
"푸하하... 응?"
옆에서 에고스틱 인형에 정품이라 적힌걸 보며 웃던 그녀는, 내가 주황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의 인형을 꺼내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황스럽네."
"여기 상표에 일렉트라라 적혀있네. 야, 이건 무녀복 입고 있는데 은월이인가?"
"어머, 이건 데스나이트 아저씨인거 같네요."
"오빠, 저는 없어요?"
"서은이? 어디보자... 없는거같은데?"
".....내가 진짜 억울해가지고, 다음 테러는 제가 일으킬꺼에요!"
"그래. 그래."
그렇게 볼을 부풀리고 삐진티를 내는 서은이를 달래줄 무렵, 최세희가 팔을 걷고 나섰다.
"다 나와봐. 언니가 인형 따줄게."
"언니. 다트 잘던져요?"
"그럼! 이 언니만 믿어. 아저씨! 저희 한판 할게요!"
"어서옵쇼! 한판? 자, 여깄습니다. 이 인형들은 10발중에 8발 맞추면 드립니다, 그 이하는 이것들! 그리고 10발 다 맞추면 이 커다란 인형!"
"아... 이거 큰일났네. 일부러 2개 틀려야겠는데?"
그렇게 허세를 부리던 최세희는.
"4발! 자, 4발 상품은 이거입니다."
"......"
"언니..."
오징어 키링을 하나 받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에 키링을 들고있는 그녀.
그래, 지금이 나설 타이밍이지.
"훗. 나와라. 내 차례다. 10발중에 10발의 힘을 보여주지."
"....참나. 흥, 이거 풍선이 계속 이동해서 생각보다 어렵거든? 넌 나보다 못맞출걸?"
최세희의 저주 비슷한 말을 흘려들은 채 다트를 던졌다.
10발 던져서 10발 맞췄다.
"....."
"허업... 다, 다 맞추셨네요... 상품은 이, 이 인형이..."
"아, 이렇게 큰건 괜찮고요, 대신 저 작은인형 몇개 가져가도 되나요?"
"예? 예! 됩니다! 3개 가져가시죠!"
"자 애들아, 인형 골라라."
"...이건 반칙이야. 너 능력 썼지?"
"아닌데? 증거있어?"
"아, 얄미워..."
당연히 염동력으로 다트 조작했지, 안했겠어?
"저흰 당연히 이거!"
은월이랑 서은이는 바로 에고스틱 인형을 낚아챘다.
....꼭 그걸 가져가야겠니?
최세희와 은월이가 자기들 인형 가져가는건 극구반대 하길레 데식이 인형 하나랑 스타더스 인형이나 챙겼다.
"....오빠, 스타더스 인형은 왜 챙긴거에요?"
"어? 아니,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적을 알아야 쉽게 물리치지. 스타더스 인형을 딱 장식장에 올려놓으면 전의가 불타지 않겠어?"
"....그냥 사심인거 같은데요."
심지어 조용히 있던 수빈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
참, 이렇게 억까를 당해서야 억울해서 살겠나. 수장을 못믿는 부하직원들의 모습에 통탄스러울 지경이다.
하여튼 야시장에서 그 이후로도 뭐 먹고 놀고 이것저것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펜션으로 돌아왔다.
짐 풀고, 씻고, 잘 준비 하고...
"오빠. 대체 이 가면이랑 총같은 것들은 왜 들고온거에요?"
"서은아, 인생은 어떻게 될지 뭘라. 저번 부산사태 기억 안나니? 밤새 펜션에 누구 쳐들어오면 어떡해."
"...과민반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생각해보니까 저번에 진짜 그런일이 있었네요."
"그렇다니까."
"....뭔 얘기에요?"
"아, 내가 알려줄게. 들어봐, 저번에 오빠랑 놀러갔을때..."
우리의 대화에 궁금증을 느끼는 은월이의 질문에 서은이가 열심히 답변해줄때, 다시 최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것봐라!"
"응?"
갑자기 들려오는 나를 찾는 목소리.
펜션 밖 작은 정원쪽으로 나가보니 최세희가 데스나이트랑 뭘 하고있었다.
"왜?"
"아니, 이것봐봐."
[크하하, 다인. 봐보게, 자네도 깜짝 놀랄걸세.]
"...여기서 뭘할려고? 좀 불안한데."
"걱정말고 봐봐! 일렉트릭 나이트다!"
그 말과 동시에 최세희가 데식이한테 그대로 전기를 쏘았다. 아니, 뭐하는거야?
[크하하하! 찌릿찌릿하군!]
그러나 데식이는 마치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통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색 갑옷과 속에 영혼까지 전기가 흐르는 모습.
...이게 뭐람.
"봐봐! 내가 이렇게 전기를 공급해주면 데식아재가 전기타입이 된다니까?"
[그말이 맞네. 으랴!]
그 말과 함께 데식아재가 검을 휘두르고.
전기가 그의 검에서 뿜어져나왔다.
"어때?"
"....나쁘지 않은데?"
"엥? 진짜?"
자기가 한 말에 당황하는 최세희.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최세희가 주기적으로 전기만 쏴주면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거잖아.
흠...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우리는 몇가지 의논을 더 했고.
자신의 인식방해 마법이 흔들리는걸 느낀 은월이가 밖으로 나온 바람에 상황은 종료됐다.
...아무리 그래도 정원에서 전기는 뿜지 말래.
***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다.
아침 맛있게 먹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왔다.
음, 다들 지치지도 않고 재밌게 놀고있다.
"하암..."
나는 다시 썬베드에 누워있다.
오른손에는 블루 하와이 한잔. 이것도 맛있더라.
여전히 어제와 같이 따스한 해변, 뛰어노는 사람들...
"...졸리네."
따스한 햇빛을 맞으며 누워있다 보니 꾸벅꾸벅 졸음이 올 지경.
내가 한숨 잘까 생각하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이설아. 무슨일이지?
"여보세요?"
[아 다인씨. 딸꾹. 지금 해변에서 놀고 계세요?]
"응? 어, 잘 놀고있지. 썬베드에 누워서 일광욕하고있다 지금."
[그래요? 다른게 아니라, 마침 제가 그쪽에 갈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들려봐도 될까요? 썬베드에 누워계시면 같이 거기서 간단하게 뭐 같이 술 한잔만 하고싶어서요.]
"...썬베드에서?"
[네 뭐. 어디든요. 가도되죠?]
"어... 그래 뭐 잠깐이면 안될것도 없지. 갈색 펜션 앞쪽에 있다."
[진짜죠? 그럼 곧 갈테니까 기다려주세요.]
"그래, 그래."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뭐, 오고 싶다는데 올 수도 있지.
술이나 한잔 하자는데, 얘 목소리가 이미 취한거 같던데.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음, 다들 잘 놀고있군.
...피곤해 죽겠는데, 설아 올때까지 한숨 자기나 할까.
그래. 그게 좋겠네.
그렇게 나는 눈을 감았고.
곧 수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인 씨.
"다인씨!"
"어, 응?"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부비고 일어나보니, 저쪽에서 보이는 멀리서 걸어오고있는 이설아.
살짝 해변가에 맞게 가벼운 옷이 눈에 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나도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휘저어줬다.
하암, 벌써 왔나? 일찍왔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이설아를 맞이해주려던 나는,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잠깐, 뭐야.
이설아 뒤에 그녀를 따라오고 있는 한 여성.
뭔가, 세상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에 있는 여성의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었기 때문.
아니지?
설아야. 시발 아니지?
"안녕하세요 다인씨! 여기는 제 친구 신하루라고 해요. 하루야, 여기는 다인씨라고, 내 사업 파트너."
"...안녕하세요."
"하, 하하. 하하. 안녕하세요."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한번 바라보게 될 외모, 긴 금발 머리에, 편한 옷차림에 하얀 가디건을 걸치고 있는.
내 아치 에너미.
스타더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썬베드에 썬글라스 하나 달랑 쓰고 앉아있는 A급 빌런 에고스틱 민간인 폼을 바라보고 있고.
'좆...됐다...'
옆에있는 이설아를 살짝 보니, 표정을 알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
...넌 나중에 보자. 아무래도 깊은 대화가 필요하겠네. 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왜 갑자기 자다가 이런 날벼락을 맞았는지나 생각해 볼 때.
아니, 다떠나서.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내 얼굴을 딱 보더니 표정이 굳은 신하루를 보며.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니, 시발 설아야. 설아야.
신하루 쟤 초감각 있다고 초감각!
무슨 깡으로 데리고 온거냐고...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현실이라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해변가. 그 모래사장 위에있는 썬베드에 앉은 채로, 나를 지켜줄건 가디건이랑 썬글라스 하나만 있는 내 앞에 신하루가 있는게 맞아?
이게... 현실?
괜사리 모래사장에 얹어있는 발이 살짝 떨리는걸 느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나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복 스타더스도 예쁘네. 아니, 이게 아니라.
그렇게 내가 멍하니 정신줄을 부여잡고 있을 때.
"어머! 갑자기 급한 연락이.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다인씨, 하루야. 둘이 대화 좀 하고 있을레?"
이설아가 갑자기 세상 어색한 연기로 급한 연락이 왔다는양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설아야. 제발. 어디가니. 넌 진짜로 있다가 보자.
그렇게 나는 멍하니 앉아있고.
신하루는 해변가에서 서있는 채 나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인씨, 라고 했나요?"
내 위에서 들려오는 신하루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제발 은월이의 인식방해 마법이, 제대로 발휘되기를.
"...하하하, 네. 맞습니다. 다인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지금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눈치 못챘겠지? 그랬겠지?
그래. 난 우리 은월이 믿어.
***
신하루는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설아가 갑자기 뜬금없이 자기 사업파트너를 인사시켜준다고 해서, 내키지 않지만 그냥 따라갔었는데.
막상 해변가 한복판에서 썬베드에 앉아있는 그 남자를 보게 된 순간, 그녀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됐다.
'이 남자, 어디서 본 적 있는거 같은데..."
어디지?
어디서 본거지?
갑작스러운 기분에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처음 보게 된 남자.
사람 좋다는 듯 그녀를 처음 보고도 허허 웃고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뭔가 갑자기 떠올랐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말도 안되는 얘기이지만.
그녀의 직감이. 속삭이기를.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느낌이, 어째 익숙한 기분.
언젠가에도 자주 누군가의 앞에서 느꼈던 기분이다.
정확히는, 그래.
이 남자, 왜인지.
'...에고스틱 같은 느낌인데.'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근거는 하나도 없는,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신하루는, 자신도 모르게 어떠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잠깐.'
'이 남자. 그냥 에고스틱, 아니야?'
그렇게 지금, 이 해변가 한가운데서.
스타더스 그녀의 직감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