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화
화정색
저번.
스타더스와 섀도우워커, 협회장과 함께한 회의를 마친 이후.
아이시클, 이설아는. 자신의 집무실에 다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휴."
익숙한듯 책상에 있는 술병을 기울여, 와인 한잔을 따른 그녀.
그렇게 보랓빛 액체를 한모금 마신 뒤, 그녀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섀도우워커가 에고스틱을, 스타더스가 보는 앞에서 두둔했어.'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한 말.
그러나,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대체 왜?'
섀도우워커가 한 말은 명료하다.
스타더스가 그 괴물을 자신이 쓰러트린게 아닌 다른 누군가, 정확히는 에고스틱이 쓰러트린거란걸 거의 유추한 상황에서.
섀도우워커는 이를 반박했다. 자신이 봤지만, 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거짓말."
그러나 그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은, 에고스틱이 그날 근처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을 했다는걸 그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즉. 만약 섀도우워커가 정말 그날 주위를 둘러봤다면 에고스틱을 봤을테니 거짓이고.
만약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면 모르는데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거니, 그냥 거짓.
결론적으로, 섀도우워커의 말은 어떻게봐도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럼,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이설아는 와인잔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섀도우워커.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한걸까. 무슨 생각으로...
"....."
이설아.
어린 나이에 이미 유성기업 전반을 장악하고, 이제는 대한민국을 차근차근 먹어치우고있는, 능력과 처세술만은 타고났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녀.
물론 대한민국 정복계획은 요즘 삐걱거리고 있긴 하지만, 하여튼...
눈치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빠르게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에고스틱이, 섀도우워커랑 접촉했다."
그래.
이게 진실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순간 그런 생각에 울컥한 그녀였으나, 이내 와인을 한모금 더 마시는걸로 속을 진정시켰다.
...그래. 애초에 자신에게도 처음 접촉한 그였던만큼, 다른 A급 히어로와 접촉해도 이상할 게 없지. 스타더스만 건드리지 않을 뿐, 다른 사람들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한적이 없으니까.
"....하아."
이설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 감정은 뭘까.
그래, 이건 초조함, 불안감이다.
에고스틱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
사실 따지고보면.
에고스틱 그는,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그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유성 그룹 본사 최상층 사장실.
따뜻한 햇볕이 등 뒤로 들어오는 그곳에서.
정장을 입은 이설아는, 자신의 하늘색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설아. 자신이 에고스틱과 정기적으로 만난지도 꽤나 시간이 오래되었다.
사실 막상 그와 만날때는 일 얘기를 한다기 보다는, 서로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더 길었다. 요즘 뭐가 어떻고, 기분 좋네 피곤하네... 이런 친구와 나눌법한 시시콜콜한 일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이설아는, 점차 다인.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자기도 모르게 기다려진다는 걸 깨달았다.
늘 회사일과 중상모략에 치이고 치이는 삶이지만, 그와 만날때만은 그런걸 다 잊고 자신도 순수하게 웃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특별하게, 높디 높은 사람으로 대하기 보다는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에.
또, 신기하게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설아 자신을 제일 '이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또, 그의 능력은 어떠한가.
'....솔직히, 다인씨 없었으면 이미 한국은 몇번이고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었죠.'
사실 이설아 그녀가 보기에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굉장히 기형적이다.
갑작스럽게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규모의 테러가 최근 몇년사이 빵빵 터지는 느낌. 그것도 하나하나가 한국을 거의 준 멸망시킬 수 있는 종류의 테러들이다.
에고스틱 그가 어지간한건 다 막는바람에, 막상 따지고보면 다 잘 풀렸긴 했지만.
그 말은 반대로, 에고스틱 그만 없다면 언제든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도 있단 소리.
"....그건 안돼."
즉.
에고스틱 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이설아 개인에게도, 대한민국 전체로 봐도.
다만 문제라면.
'...왜 그렇게 나를 믿지 않는걸까?'
바로 그것.
그는 자신에게 접근할때, 굉장히 보수적으로 왔다.
본명 하나 아는데 몇개월이 걸리고, 얼굴 아는데도 몇개월이 걸리고.
심지어 아직도 그가 어디사는지는 모른다. 그는 자신이 어디사는지는 알면서.
'...내가 그를 배신할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거 같기도 하고...'
자신을 명백히 경계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
그점이 이설아는 못내 억울했다.
아니, 자신이 대체 왜 그를 배신하겠는가. 지금까지 그에게 받은것과 앞으로를 생각하면, 그녀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 그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애초에 이설아 자신도 딱히 도덕적인 인물이 아닌만큼, 더욱 그랬다.
그런만큼 이설아 그녀는 그와 평생 갈 생각이었는데.
어째서, 그는 그녀를 이다지도 경계하는 걸까.
심지어 그가 무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몸져 누웠다는데, 집주소를 몰라서 병문안 하나 못가는게 그녀의 현실.
'...어디서 모함이라도 들은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우울해진 그녀는, 이내 다시 술병을 병에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혼자서 거의 한병을 비우니, 이제야 알딸딸해지는 기분.
"....."
그렇게 볼도 붉어진 이설아는, 잠시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뒤쳐지는거다.
급발진을 한번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부딪혀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자신은 취했으니까, 일이 잘 안풀리면 취해서 헛소리했다고 넘어갈 수도 있고.
그런 판단을 한 그는, 다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다인과 한 전화는, 생각외로 잘 풀렸다.
그녀답지않게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감성적으로 나선 보람이 있는걸까.
이설아는 끝내 그의 집에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졌지만.
결과가 좋으니 된게 아닐까.
그렇게 어디 산골짜기에 발을 들인 그녀의 첫 감상은.
".....와."
그의 집이, 굉장히. 굉장히 크다는거다.
사람 수십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어 보이는 대저택.
이설아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작은 편이 아닌데, 그가 살고 있는 저택은 목재로 만들어져 고풍스러운게 뭔가 왠지모를 위압감을 줬다. 마치 성처럼.
그렇게 문이 열리고.
어떤 여성이 이설아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설아씨죠?"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전 이수빈이라고 해요."
인자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아준, 이수빈이란 여자.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똑같이 웃으며 인사한 이설아는, 속으로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뭐지? 이 여자가 왜 그의 집에 있는거지.
아, 병간호 때문에 있는거겠지? 그런걸꺼야.
그러나 그런 그녀의 예상은, 집에 들어간 이후로 완전히 박살났다.
"....안녕하세요."
"....."
"하하, 안녕하세요?"
그가 누워있다는 방을 향해 걸어가면서 맞이한 수많은 여자들.
자신을 탐탁치 않다는 듯 바라보는 기세보이는 주황 머리 여자와, 경계하는 듯한 시선을 한 은발의 여자애, 속을 잘 모르겠는 미소를 짓고 있는 무녀복..? 같은걸 입고있는 여자까지.
다 에고스트림 소속의 빌런들인 그녀들.
그리고 거실에서 마주해 짧게 인사를 나누고 스쳐지나간 것만으로도,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옷, 저 편해보이는 분위기, 저 생활감.
저들은 여기 놀러온게 아니다.
여기에 그냥 살고있다.
그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왜? 대체 한집에서 남자랑 여자 여럿이 동거를 하고 있는거지? 그럴 이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방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있는 다인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다인씨."
"어... 설아야, 안녕. 굉장히 금방왔다....?"
전화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온 자신을 보여 살짝 놀란듯 보이는 그.
침대 위에 놓고 보고 있던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내는 그를 보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네. 처음으로 다인씨 집을 찾아 뵐 수 있는데, 당연히 빨리 와야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웃었다.
...
아.
이말은 지금 꺼내면 안돼.
이설아, 너 이런말 하러 온거 아니잖아. 다인씨 병문안 온거잖아.
...그래도.
이거 하나는, 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웃는 모습 그대로.
이설아는 입을 열어, 누워있는 다인에게 물었다.
"....근데, 방까지 오면서 봤는데. 집에, 굉장히 다른 여성분들이 많네요? 동거 하시나봐요?"
"...하하. 어쩌다보니."
그런 자신의 물음에, 멋쩍은 듯 시선을 돌리는 그.
자기도 멋쩍긴 한가보다...내심, 그가 부정하기를 기다렸는데.
"...."
"...어, 설아야, 갑자기 좀 춥다? 하하."
뭔가 좀 그렇네.
***
"사장님, 잘 갔다오셨습니까?"
"...와인, 56년산으로 하나 갖다주실레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비서로부터 병을 받은 이설아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은 뒤 잔에 따른 와인을 한잔을 따라 조용히 마셨다.
"....."
그녀는 오늘 다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들은 다 필요없고, 그녀가 얻은 정보는 단 하나.
다인과 에고스트림 멤버들의 사이가 매우 끈끈하다.
이설아 자신은 넘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래, 세상에 쉬운일이 없지."
다인은 이미 자신이 점찍은지 오래.
이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는 사실 빌런보다는 히어로에 어울린다는 것을.
그런데 저런 빌런들과 엮여서는, 안된다.
"....."
자신을 경계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여성멤버들을 떠올린 이설아는, 다시 술을 입으로 가져다댔다.
그래.
그렇단말이지.
이미 술에 뇌가 절여진 이설아는, 머리가 이성적이지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에고스틱, 그는 스타더스에 집착했었지.
그래. 그는 히어로가 어울린다.
그러나 자신 혼자서는 역부족. 상대는 빌런 멤버들 다수.
어떻게 해야하나.
'그래... 그가 다음번에 여행을 떠나간다고 했었나. '
"....."
그런 생각을 하며.
이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하루의 연락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맹, 동맹이라.
어차피 스타더스는 에고스틱의 본모습을 모르니까, 인식저해도 있으니.
"....."
그렇게 조용히 있던 이설아는, 씨익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
"쓰읍... 뭔가 불길한데. 이번 여행에서도 저번처럼 뭔 사건 터지는거 아니야?"
"오빠. 불길한 소리 하지 마요."
아니, 싸한 기분이 드는걸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