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화
화사나이
히어로 협회.
사실 각종 히어로물들에서 늘 모든 히어로들을 총괄하는 협회같은 단체는 꼭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단체들의 공통점은, 꼭 내부의 적에 의해 무너진다는 것도 똑같고.
이 세계관의 협회도 마찬가지다.
무능하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는 협회장에 의해 초중반까지는 어찌어찌 굴러가던 협회는, 결국 후반부에는 빌런 세력에 완전히 먹혀버린다. 그리고 교묘하게 히어로들을 이끌어 자멸과 내분으로 이끄는 등, 대한민국 막장화에 큰 기여를 한다.
그거말고도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는데, 한줄로 정리하면 이거다.
아이시클과 섀도우워커.
큰거 안 바라고 딱 두명. 딱 두명만 포섭하고 보자.
그렇게 나는 원작에 나온 섀도우워커를 떠올려봤다.
밤에는 무적이란 특수한 능력때문에 프라이드가 강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신의 믿음과는 다르게 어... 그래. 항상 피곤해서 뇌를 저전력으로 운영하는건지, 애가 좀 단순하다. 원작에서 봤는데, 어. 강력한 능력과는 다르게 좀 많이 단순하더라고.
그리고 어쨌든 그보다 제일 중요한건 여자친구를 굉장히 아낀다는 거다
그럼 그런 그의 친구가 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아! 걔 여친을 구해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여기 왔다.
"안녕하십니까, 섀도우워커씨. 에고스틱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산뜻하게 웃어줬다.
원래 첫만남이 모든걸 결정하는 법. 첫인상에 웃는 모습을 보여 호감도를 올리겠다는 나름의 계략으로 웃은거다. 물론 원래 웃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렇게 대략 밤의 10층 높이는 되는 아파트에서.
찬 바람을 맞아가며, 나는 창문 너머의 섀도우워커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그런 내 인사를 받은 섀도우워커는.
"....내가 지금 꿈을 꾸는거냐?"
살짝 황당해 보이는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부스스한 머리에, '나 피곤해요'를 광고하듯 눈 밑에 그려져 있는 다크서클까지. 심지어 여전히 잠옷까지 입고 있는 모습.
그런 그는, 이내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털더니, 나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지, 분명 현실인데. 그럼 넌 뭐냐? 자수하러 온거냐?"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
머리가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는 그에게, 나는 여전히 씨익 웃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이유로 찾아왔죠."
"아니... 그전에 내 집은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뭐냐 대체...."
"제가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할겁니다. 잘 들으세요."
"....그냥 내가 널 여기서 붙잡고나서 들으면 안되냐?"
"일단 이건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흥분하지말고 잘 들어보세요."
"....아니. 네 입장에서 생각해봐라. 네가 밤에 있는데 히어로가 네 집 창문에 똑똑하고 창문을 두들기면 흥분 하겠어 안하겠어?"
"제가 한건 아니고 저도 들은건데."
"...뭐. 뭔데."
"당신 여자친구가 무슨 갱단한테 납치당했답니다."
"......"
그리고 내가 그 말을 내뱉은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어리버리해 보이던 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니 시발 제가 한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거 낫 치워봐."
나는 어느새 자기 손에 그림자로 이루어진 낫을 소환한 그를 보고 심드렁이 말했다.
내 이럴줄 알았지, 빌런은 서럽다 서러워. 좋은 일을 해도 의심을 받으니, 이거 억울해서 살겠어? 어?
"....네가 한거 아니라고?"
"아니 좀 생각해보세요. 제가 한거였으면 왜 여기와서 굳이 맨투맨으로 통보하겠습니까? 그냥 방송키지."
"...그래. 방송. 너 지금 이거 방송킨거 아니야?"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마시고, 이건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 당신과 저만의 대화죠."
"아니 시발... 숙희, 숙희가 납치당했다고? 넌 그걸 어떻게 알고있는데?"
"제가 모르는건 이세상에 없다, 그렇게만 알고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자, 여기입니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패닉에 빠진 그를 보며, 나는 휙 하고 지도 한장을 건네줬다. 사실 벌써 줄 생각은 없었는데, 얘가 슬슬 멘탈이 빠르게 무너지는게 보여서 일단 건네주고봤다. 조금만 지체하면 '네가 납치했지?' 하면서 저 낫을 나한테 휘두르게 생겼었다고.
".....이게 뭐냐."
"뭐긴요. 당신 여자친구분이 납치당했다는 공장지대 좌표입니다. 선물이에요."
"......"
그리고 내 말이 끝나는 즉시, 그는 그림자이동으로 그냥 텔레포트해서 사라졌다.
....? 그냥 갔어?
".....음, 어. 바로 갔네."
그렇게 나는 휑한 창 밖에서, 홀로 서있었다.
...아니,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해도 나는 뭐 딱히 공격해서 묶어둔다거나 하지도 않고 그냥 사라져버렸네.
애초에 저게 함정이었으면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거지? 물론 밤에 섀도우워커를 위협할 수 있는게 뭐 얼마나 되겠냐만은 그래도.
"베히모스야, 아쉽게 됐다."
나는 내 코트안에 챙긴 베히모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베히모스 좀 오랜만에 쓰나 했더니 어째 별 소득이 없네. 섀도우워커의 어둠을 상대할 수 있는게 베히모스라 기껏 챙겨왔는데, 섀도우워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버려서 원...
[다인! 어떻게 된건가. 싸움이 어째서 아직도 시작되지 않는거지?]
"아. 데식이 아재. 거, 음. 오늘은 싸움없습니다. 그냥 잠이나 자세요."
[뭐라고!]
그리고 반지안에 영혼상태로 갇혀있는 데스나이트. 싸움을 기대한 그에게도 아쉽게 됐다.
아니, 난 진짜 최소 한번은 싸울 줄 알았지.
원래 내 계획은 이거였다.
내가 섀도우워커한테 니 여친 납치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섀도우워커가 빡돌아서 '네가 납치했지!!' 라면서 나를 공격한다. 그러면 나는 베히모스랑 데스나이트를 이용해 그에게 맞선다. 그리고 나 아니라고 살살 설득해서 그 공장지대로 애를 보내버린다... 였는데.
엄. 그냥 내 말을 들은 순간부터 살짝 식은땀도 흘리고 초조불안해 하더니 지도 받자마자 세상 빠르게 텔레포트해서 사라졌다.
"....뭐. 좋은게 좋은거지."
저걸보니 왜 쟤가 여친 죽고나서부터 슬슬 흑화했는지 알거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어두운 골목 사이로, 미리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차.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거기에 타서 입을 열었다.
"수빈씨. 저 왔어요."
"어머, 다인씨. 일찍 오셨네요?"
"네. 싸울 줄 알았는데 안싸우더라고요. 어쨌든 빠르게 밟죠. 목적지 설정됐나요?"
"네. 그 공장쪽으로 되어있어요."
"좋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그렇게 우리는 어두운 밤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섀도우워커, 그놈이야 능력이 출중하니 거기까지 한순간에 순간이동 할 수 있지만, 나는 그짓거리했다가는 피토하고 죽는다.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수빈씨 안부르고 나 혼자 갈걸 그랬네.
나야 섀도우워커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을거라고 90프로 이상 확신했으니, 도중에 부상을 입을걸 대비해 수빈씨를 미리 대기시켜 놓은건데, 멀쩡하니까 좀 미안하다. 내가 운전해도 되는데.
살짝 미안함 마음을 가지고 나는 차에 탄 채 공장지대로 향했다.
그래도 등받이는 푹신하고, 수빈씨도 오랜만에 둘만 있으니 좋다고 했으니까 된 거 아닐까?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우리는 금새 공장지대에 도착했다.
을씨년스러운 밤의 폐공장.
아마 저 안에서 섀도우워커가 갱단을 조지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공장 쪽으로 이동했다.
섀도우워커랑 말은 하고 떠나야지.
***
"크아아악!"
"쯧."
섀도우워커, 김자현은 혀를 찼다.
방금을 마지막으로 이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갱단의 일원을 전부 처리한지 오래.
"...하아. 이게 무슨 일이냐..."
그렇게 납치당한 채 기절해있던 인질들을 전부 풀어주고.
그 틈에 섞인 여자친구만 일단 챙긴 채, 그는 밖으로 나왔다.
"....큰일날뻔했네."
그는 기절한 자신의 여자친구를 품에 안은 채, 중얼거렸다.
다행히 상처하나 없이 평온히 잠들어있는 그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는 방금전에 봤던 모습을 떠올렸다.
총을 든 채, 히히덕 거리며 누구 먼저 쏴서 죽여볼까 거리며 놀던 갱단새끼들.
그 모습에 눈이 뒤집힌 그는, 순식간에 전부 처리해 버렸으나.
아찔한 감각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채였다.
저런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놈들한테 그녀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안녕하십니까 섀도우워커씨. 역시 깔끔하게 처리하신 모습이네요. 대단하십니다."
"....에고스틱."
여자친구를 품에 안은 채 밖으로 나온 김자현은, 드넓은 공터에 선 채로 자신을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네는 에고스틱을 보며 짧게 읊조렸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망토에 검은 옷에 아주 깔맞춤한 채, 하얀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그.
...저놈 덕분에,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
그는 자신이 알고있던 에고스틱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복기해봤다.
에고스틱. 낮에 일어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그도 수없이 많이 들어본 놈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빌런이자, 인기 또한 제일 많은 빌런. 테러는 일으키되 사상자는 절대로 내지 않고, 오히려 다른 빌런이 테러를 일으키는걸 막을때도 있다고 들었었다.
그래, 그도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다. 스타더스도 그에 대해 꽤 많이 신경을 쓴다는걸 들었었고.
사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자신은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에고스틱. 너는 분명 빌런 아니냐? 어째서 나를 도와준거지?"
그래.
그게 김자현, 그의 제일 큰 궁금증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건 넘어가고, 어째서 그의 여자친구가 납치당하는걸 그에게 알려준거지?
그리고 자신의 의문섞인 질문에, 에고스틱 그는 씨익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글쎄요. 왜일까요?"
"...."
"그냥 편하게 생각하세요. 빌런이라고 꼭 나쁜일만 해야되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히어로들도 매일 착한건 아니고, 가끔은 나쁜일도 하지 않습니까. 저도 뭐 가끔씩은 착한 일도 해보고 그럴 수 있는거죠."
"...?"
뭔 개소리야.
김자현은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올뻔한걸 참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상 그녀를 구해준건 에고스틱이니까.
대신, 김자현은 머리를 굴렸다.
그의 여자친구 숙희는 늘 그보고 단순무식하다고 하지만, 김자현은 스스로는 굳게 믿고 있다. 그가 머리를 안써서 그렇지, 막상 쓰면 아주 똑똑하다는걸.
그런 그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에고스틱. 빌런이지만 평소에 일으키는 테러는 사상자도 없고 다른 빌런을 사냥하고 다닌다. 거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빌런은 빌런이지 않냐고 볼 수 있지만.
"....고맙다. 뭐 원하는거 있냐?"
"훗. 협회나 다른 이들한테 제가 도와줬다고 알리지나 마십쇼. 그것만 해주신다면 더 바라는거 없습니다."
거기에 더해 굳이 다른 히어로의 연인이 납치당했다는걸 히어로한테 알려줘 범죄도 막고 인질들도 살려나게 한다?
그렇게 그의 대뇌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녀석, 착한놈이었구만.
"알았다. 너도 뭔 사정이 있겠지."
섀도우워커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미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여자친구를 살려줬다는거에서, 에고스틱에 대한 호감도는 천장을 뚫은지 오래. 거기에 딱히 나쁜 녀석도 아닌거처럼 보여, 또 호감도는 2배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이들한테 자신의 선행을 알리지 말아달라는 말만 남긴 채, 뒷끝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이거 완전, 진정한 사나이가 아닌가.
"...에고스틱. 착한 녀석이었군. 물론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으응..."
"어 숙희야! 깼어?"
그렇게 그날 밤.
그날 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A급 히어로 3명 중 2명이 에고스틱의 편이 되는 순간이었다.
***
"....?"
혼자 방에 있던 스타더스는, 뭔가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뭐지? 이 자기만 따돌린 채 다들 무언가를 하고있는거 같은 기분은.
"...기분탓이겠지."
그렇게 그녀는 오늘도 열일하는 직감을 기분탓으로 치부하고 넘겼다.
...좀 찝찝함만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