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화
화예기치않은 만남
에고스틱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의 장을 만들기 위해 계획한, 안티-에고스틱 방송 만들기. 일명 반-에고스틱 언론사 만들기는, 따지고 보자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싫어요 테러를 당하는 등 분위기가 안좋아보이지만, 원래 선구자는 욕을 먹는법. 계속하다보면 언젠간 인정받을 날이 올거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투자를 해서 아예 스튜디오를 하나 만들어버렸다. <데일리 빌런>. 말이 데일리 빌런이지, 사실 에고스틱 전문 방송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금을 다 내가 댔으니 당연히 내 입김이 꽤나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채나영 그 여자가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하는것처럼 보여서 믿음직스러웠다.
근데 그거랑 별개로, 이 채나영이란 여자가 나한테, 엄, 너무 부담스럽게 굴어서 좀 문제다. 계속 후원자님은 제 은인이에요 이러는데, 진정해.
...생각해보니까 좀 웃기긴 하다. 나는 후원자라고 거의 숭배하듯 우러러보면서, 정작 하는일은 그 후원자를 욕하는거잖아? 물론 그녀는 내가 에고스틱이라는걸 모르니 그렇게 된거지만, 모든걸 아는 입장에서는 묘하긴 하다.
하여튼 아직은 미약하지만, 시간이 차차 지나면 꽤나 효과가 있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예측한다. 언젠가는 모든 대중이 날 잔인무도한 사악한 빌런이라고 생각할 날이 오겠지. 암, 그렇고 말고.
하여튼 이 문제는 일단 됐다.
이런게 중요한게 어디지.
"...어디보자..."
나는 봉인된 내 공책을 꺼내놓았다.
원작을 통해 아는,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정리되어있는 이 다이어리.
그것을 보며 나는 침음했다.
"...하아. 산넘어 산이구만."
앞으로 등장할 빌런들을 대략적으로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
솔직히 이제는 스타더스가 꽤나 강해져서 어지간한 적들은 전부 무력으로 때려 부수지만.
문제는 기믹형 빌런들이다. 독가스를 뿌린다던가, 대규모 학살을 한다던가 그런 놈들. 스타더스가 잡는다 하더라도 이미 수많을 피해자를 낼 놈들.
...물론 내가 이 세계를 원작과는 꽤나 다르게 바꾸긴 했지만, 그건 원래 죽었을 사람들을 살린거지 살았을 사람들을 죽인게 아니라 별 의미가 없다. 결국 원작에서 등장했던 이 빌런들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등장할거란 말.
그리고 월광교. 얘네도 문제다.
대망의 2페이즈 최종보스인 이 교주녀석.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고, 최종장이랑 연계를 생각하면 이것저것 골때리기는 한데.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3페이즈도 이제 슬슬 대비해야된다. 그때가 되면 세계가 진짜 미쳐 날뛰는데, 아마 그 상황에서는 나 혼자서 지금처럼 다 처리할 수는 없을거다. 협회랑 어느정도 협력을 해야겠지.
협회와의 협력은 뭐, 이미 이설아를 내편으로 꼬드긴 시점에서 반쯤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섀도우워커랑 협회장, 둘만 더 끌어드리면 협회도 내 손에?
아, 또 미래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네.
좋아.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당장 닥친 일만 한번 봐보자.
"좋아. 이제 다음에 일어날 메인 이벤트가... "
그렇게 노트를 넘기던 나는 멈칫했다.
그래, 이제 이거 차례구나.
나는 노트에 내가 예전에 적어놓았던 글씨를 바라보았다.
[섀도우워커 여자친구 살인 사건]
"....."
좀 쉬나 했더니.
또 바쁘겠구만.
***
이 세계관의 대한민국에는 3명의 A급 히어로가 있다.
서울의 스타더스.
부산의 아이시클.
그리고 저녁의 섀도우워커.
밤에 한정해서는 절대적인 위력을 내는 그는, 원작 만화 초반부까진 별로 등장도 안한다. 애초에 거의 저녁에만 활동하니 스타더스랑 만날 일도 없고.
그러나 내가 분명 이 세계관이 무엇이라고 했었나.
이 지구는 멸망직전까지 가는 피폐한 세계.
즉, 히어로인 섀도우워커도 피폐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그중 그의 인생이 피폐해지기 시작한다는 신호탄을 쏜게 바로 그의 여친 살인 사건.
그에게 큰 정신적 지주였던 여친이 갱단에 납치당해 인질로 묶였다가, 끝내 살해당하는 사건.
그전부터 안그래도 경미한 우울증을 갖고 있던 섀도우워커는, 순식간에 나락행 열차를 타게 된다.
그렇게 갖은 피폐의 시련이 닥치고, 결국 흑화엔딩.
...아, 그거 생각하니까 골 때리네.
하여튼 결론은, 그의 여자친구가 죽는게 결과적으로 안좋은 일이라는거다.
그러니까 살려야지.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구만.
그런 결심을 마친 나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서은이와 은월이.
거실 식탁에 추욱 늘어진 서은이는, 백은월한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행... 여행이 가고싶어."
"...생각해보니, 전 태어나서 한번도 여행을 가본적이 없네요."
"뭐 진짜?"
"네... 기억 날때부터 월광교에 갇혀 살았으니까요."
"그럼 바다는 본 적 있어?"
"....당연히 본 적은 있죠. 다만 그때는 교주를 따라 사람들한테 전도하러 갔을 때 잠깐 멀리서 본거라, 들어가서 논적은 한번도 없네요.
"와 진짜?"
...서은아, 그. 너도 저번에 나랑 수빈씨랑 놀러가기 전까지는 바다 한번도 가본적 없지 않니? 왜 그렇게 놀라는거야.
그런 생각을 품고 내가 거실로 다가가자, 나를 본 서은이는 반색하며 말했다.
"오빠! 우리 여행가요, 바다로!"
"바다?"
"네. 저랑 오빠랑 수빈언니랑, 세희언니랑, 하율언니랑, 은월이랑, 데식이 아저씨랑 차윤이 다 같이 바다 한번 가는거에요. 어때요?"
나한테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하는 서은이.
거기에 옆에있던 은월이도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는게, 여행에 관심이 있어보이는 눈치였다.
...여행, 여행이라.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서은이랑 수빈씨랑 부산 놀러갔던거 빼고는 다같이 여행을 가본적이 없네.
요즘 너무 바쁘게 살아오긴 했지.
....그래, 여행이라.
"좋아. 나중에 한번 가보자. 다같이."
"진짜요? 야호!"
"뭐야, 우리 여행가?"
그렇게 서은이와 은월이가 신나하고 있을 때, 방금 막 일어났는지 최세희가 눈을 부비며 걸어들어왔다.
"네. 언니, 지금부터 한번 우리끼리 알아봐요. 은월이가 바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니까 바다 어때요?"
"바다? 좋지. 이많은 인원이 다가면 아예 펜션이라도 빌려야 할려나? 한번 알아볼까."
"좋아요!"
물흐르듯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여행얘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여행 한번 갈껄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뭔가를 잊은듯한 찝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잠깐. 내가 왜 거실로 나왔더라. 여행말고 다른 할 얘기가 있었는데.
아 맞다.
"서은아, 서은아. 일로와봐."
"왜요 오빠?"
내가 부르자마자 쪼르르 달려오는 서은이.
나는 그런 서은이한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줬다.
"서은아."
"헤헤... 네?"
"오빠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네! 뭐든 해보세요!"
"여자 한명만 CCTV 해킹해서 감시해줄래?"
".....네?"
아까까지만 해도 방긋 웃고있던 서은이의 눈과 입꼬리가 착 가라앉았다.
아니, 이상한거 아니야.
다 세계를 위해서 이러는거라고.
그렇게 서은이한테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서야, 나는 서은이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었다.
좋아... 이 준비는 완료되었고.
이제 아이시클, 이설아만 만나러가면 되겠네.
***
하여튼 그렇게 일은 착실히 계획되고 있었다.
섀도우워커의 폭주를 막아라. 제 1단계. 여친 살려주기.
"다인씨. 제 말 듣고있어요?"
"응? 아, 당연히 듣고있지."
유성기업 사장실.
정기적으로 하는 이설아와의 대담에서,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제가 어디까지 말했죠? 네, 하여튼 일이 좀 꼬이고 있어요. 다른 기업들은 하나 하나 인수하고 있는데, 정치권이 문제네요."
"잘 안돼?"
"말도 마세요... 제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그냥 그놈들을 다 얼려버리고 싶다니까요. 이제 대선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진짜 뭐하자는건지.. 하아."
이설아는 그렇게 나를 붙잡고 자신의 대한민국 정치권 장악 프로젝트가 표류하고 있다고 한동안 징징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을 들으며.
"...하하, 힘들겠네."
나는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나 때문인가?
원작에서는 월광무녀의 서울 테러 이후 정부청사같은게 전부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부산 토박이인 이설아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엄청 강해졌었다.
그래서 정부도 굉장히 쉽게 먹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진짜 김만복 그놈은!! 아흑... 머리야."
"...하하."
맞는거같다. 원작에서는 분명 쉽게쉽게 정부도 장악했다고 나왔는데, 지금 저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는걸 보아 잘 안풀리는 모양.
그렇게 죽는소리를 하는 이설아를 보며, 나는 괜사리 좀 미안했다. 아니 그래도, 서울이 망하게 둘 수는 없었잖아....
결국 죽는소리로 시작한 이설아와의 대담은 결국 그녀가 요즘 힘드니 우리집에 한번 놀러와보고 싶다는걸로 결론이 났다.
...결론의 상태가 이상한데, 하여튼.
***
그 이후로도 일상은 나름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다음 테러 기획하고, 에고스트림 멤버들은 여행 어디갈지 알아보느라 바쁘고, 서은이는 틈틈히 섀도우워커 여친 감시하고,
그렇게 평범하게 지내던 어느날.
"오빠! 그 여자가 갑자기 이상한 남자들한테 끌려갔어요!"
거실에서 최세희랑 같이 리듬게임 2인배틀을 하고있던 나한테, 서은이가 달려와서 다급히 소리쳤다.
"뭐라고!"
나는 당장 패드를 던져버리고 외쳤다.
아니,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는데?
나는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좋아, 빌런의 시간이다.
***
섀도우워커, 김자현.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저번 월광무녀 사건 이후, 살짝 우울증에 걸린 그.
늘 해가 진 밤이 도래한 시간에는 무적이라는 자신감이 있던 그는.
월광무녀한테 처참히 지고 나서, 그야말로 멘탈이 박살났다.
밤.
밤은... 내가 최강이 아니었어?
처음으로 자존심에 큰 스크레치를 입은 그는.
그렇게 우울감에 빠져 방안에 틀어박혀 하루하루를 자괴감에 빠진 채 살았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힘이 되었던건, 그의 여자친구.
자신을 늘 응원해주던 그녀덕분에, 섀도우워커는 점점 힘을 낼 수 있었다.
"...근데, 왜 연락이 안되지?"
그런데 그날은 뭐가 이상했다.
늘 연락이 잘되던 그녀가 갑자기 연락이 끊긴것.
그래서 김자현 그가 걱정에 빠져있을 때.
갑작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다가간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걸 깨달았다.
...노크소리가, 문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현관문이 아닌, 옆에 창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는 것.
"아니 시발. 뭐야."
황당함을 느낀 그가 창문을 벌컥 열었고.
그렇게 10층 상공에서.
"안녕하십니까, 섀도우워커씨. 에고스틱이라고 합니다!"
가면을 쓴 A급 빌런이 제발로 찾아와 인사를 건냈다.
"...."
김자현은 자신이 꿈을 꾸고있는건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