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0화
화절벽에 핀 꽃
보라색의 전기같은게 번떡거리는, 분홍색 폭풍의 중심.
그곳에는,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건, 벌써 3번의 마력폭풍으로 서울을 박살낸 빌런 달의 무녀.
어떤 히어로도 막을 수 없어 보였던 난공불락의 폭풍과는 다르게, 막상 그 중심에 있는 그녀는 연약하고 어려보였다.
"....대체, 무슨 말씀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 그녀.
주위에 떠있는 마법진들이 허공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걸 봐선, 굉장히 당황한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지금이, 딱 밀어붙이기 좋은 타이밍이다.
나는 여전히 씨익 웃으며, 그녀를 향해 한걸음씩 가까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달의 무녀, 아니. 백은월씨. 저는 월광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주에 대해서도 잘 알고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향해 걸으니, 흠칫 놀라며 살짝 뒷걸음치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말해줬다.
"은월씨. 솔직히 말해주세요. 월광교 때문에 괴로우시죠? 사실, 테러하는 것도 싫으시죠? 그런데 교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거 아닙니까."
계속해서 성큼성큼 걷다보니, 어느새 그녀의 코앞까지 도착한 나.
작게 뒷걸음치던 그녀는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이, 내 앞에서 파르르 떨 뿐이었다.
이미 허공에 떠있던 마법진들은 다 흔들려 사라진지 오래.
".....더이상,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살고 싶으시지 않으세요?"
나는 그녀의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저 작게 떨 뿐인 그녀.
역시, 원작에서 나왔듯 강하게 나가면 꼼짝 못하는 그녀였다.
애초에 늘 갇힌 채 교주에게만 조종당하고 교인들에게는 억지 웃음만 지으며 사는 삶이었을테니.
이렇게 다른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도 처음일 수도 있다.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며 혼란스러워하는 백은월.
흠, 지금까지는 밀어붙였으니 이번에는 부드럽게 나가볼까.
거기까지 말한 나는,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이번엔 조용히,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을 해보았다.
"제가 당신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월광교는 버리시고, 저와 함께하시죠."
"교주는 제가 쓰러뜨리겠습니다."
"그러니. 저와 손을 잡고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손을 뻗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여전히 몸을 살짝 떨고 있었으나, 그래도 눈은 아까보단 진정된 그녀.
그리고 그렇게, 붉은 눈동자로 나를 살짝 바라보더니.
그녀는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일단, 저에 대해 그렇게 어떻게 잘 알고계시는건지는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그래도."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이었다.
"....정말 저를,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왜... 왜요? 저는 그냥, 괴물일 뿐인데..."
갑자기 자책하는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말하는 그녀.
그래. 지금이 기회다.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땅을 파고 드려는 그녀의 손을, 내가 갑자기 붙잡았다.
갑자기 나한테 손이 붙잡히자, 흠칫 놀라는 그녀.
그러나 나는 그런 기색을 읽지 못한 듯, 뻔뻔하게 소리쳤다.
"아니요.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압니다. 저는 봤습니다. 당신이 이 모든 테러를 일으키는 동안에도, 사람들을 최대한 다치지 않게 조절을 하는걸 압니다."
"교주에게 조종당하면서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버틴 당신을 아는 사람 누가, 당신을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은월씨.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나는 서있던 그녀를 붙잡고, 내 품으로 안았다.
"울지마세요."
그리고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작게, 울고 있었다.
***
모든걸 포기했었다.
이 자리에서 죽는거까지, 각오했었다.
모든 슬픔을 속으로 삼키고, 마음 먹었었다.
그래요.
저 하나 없어진다고 모든게 끝나는거까진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퇴장하는게 맞는거겠죠.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녀에게 나타난건.
가면을 쓴, 이상한 남자였다.
갑자기 자신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신상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자신의 속마음까지 알고 있는 이상한 남자.
그러더니, 자신이 교주를 쓰러트릴테니 함께 손을 잡자고 하는 남자.
이상한 남자다.
대체 어떻게 자신에 대해, 그리고 월광교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와 손을 잡고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이미 모든걸 포기했었다.
이미 목숨까지 포기할 정도로, 모든걸 내려놓은 상태였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갑자기 나타난 동아줄.
사실 동아줄인지, 썩은줄인지. 그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내려온, 유일한 줄이다.
모든걸 포기한 그녀에게 온, 새로운 기회다.
이걸 걷어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교주에게 이용당하고 서울을 파괴하다가, 히어로에게 죽을 운명이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남자를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애초에.
그녀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주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늘 차가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명령만 내리는 교주.
눈에 초점도 없는 채 자신에 대한 의미없는 찬양만을 읊조리는 신도들.
거기에 늘 어두컴컴한 방까지.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온 그녀에게.
경멸어린 표정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던 그녀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좋은 말을 해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겠다고.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넘어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물이라 자신을 평가하던 그녀한테 들려온.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라는 소리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고 만 것이다.
'그래요... 어차피, 더이상 잃을 것도 없는데.'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남자를 믿어볼까요.'
***
좋아.
일단 계획한대로 흔들다리 효과로 어떻게 어떻게 넘기는데에 성공한거 같다.
....사실 이것보다 더 계획한 말들이 많았었는데. 달의 무녀가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다. 아무래도 평소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모양. 하긴, 원작에서도 스타더스보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던 불쌍한 애인데, 당연한가.
나는 여전히 내 품에 꼭 안겨있는 그녀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살짝 손 많이 가는 여동생이 생긴 느낌인데.
하여튼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내 품에서 훌쩍거리는 그녀를 떼어내고는, 그녀를 향해 말해주었다.
"그럼, 정말 저희와 함께 하기로 마음 먹은거죠?"
"네에... 근데, 제 저주때문에 교주님... 아니, 교주가 계속 절 감시할 수 있는데... 저, 사실 지금도..."
그녀는 불안한 듯 나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 지금도 교주놈의 목소리가 들리는 모양.
"네. 그거 당연히 풀어드려야죠. 그전에 잠시만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순간이동해 사라졌다.
어디로? 바로 우리 에고-배틀쉽이 있는 곳으로.
"윽."
"다인오빠!"
배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보고는 달려드는 하율이.
"오빠, 어떻게 됐어요? 지금 막 헬기들 날아다니고 난리났는데..."
"아. 어차피 내가 조금 있다가 방송 틀꺼라 어그로는 다 이쪽에 쏠릴꺼니까. 걱정말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의상을 점검했다.
하얀 로브를 정갈하게 갖춰입어,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녀. 좋다. 첫 데뷔인데, 이쁘게 나와야지.
"자 일단, 바로 가자. 지금 치유능력 쓸 수 있지?"
"네."
"좋아. 가자."
나는 하율이의 손을 붙잡고, 다시 태풍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소름끼치는 목소리.
아해야.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것이냐! 빨리 대답하거라!
"히익..."
태풍속에서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와, 그걸 들으며 벌뻘 떨고 있는 달의 무녀.
이런, 벌써 교주놈이 눈치깐건가.
시간이 없다.
"하율아, 어서!"
"네!"
하율이는 쏜살같이 달려가, 주저 앉은채 떨고 있는 달의 무녀, 백은월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둘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하얀 빛.
아해야. 대답하거라. 아해야! 대. 하거. 라. 아. ___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폭풍속에서 들려오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끝내 없어졌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고요.
"하아... 하아..."
숨을 헐떡이던 달의 무녀, 백은월만이. 이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걸 보고 자신의 손을 살펴보더니. 멍하니 중얼거릴 뿐이었다.
"...들리지, 않아요?"
"네. 은월씨. 축하합니다. 교주가 건 저주는 해제되었습니다. 당신은 자유입니다."
저주를 해제하기 위한 제일 쉬운 방법.
그냥 치유술사 불러서 통채로 치유하면 된다. 끝!
그런 내말에.
여전히 멍하니 있던 백은월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살짝 울먹거리며 말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해요...."
그러더니 나와 하율이한테 번갈아가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녀.
원작에서 저주에 대해 묘사할 때, 늘 정신이 갉아먹히고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었었다. 아마 그게 사라졌으니, 바로 체감이 되는 모양.
"자, 자. 감사인사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까. 일단 진정하세요. 뚝."
"그래. 울지마렴."
나와 하율이가 달래주자, 훌쩍임을 좀 줄이는 그녀.
...이와중에 하율이는 내가 말해준대로, 마치 수녀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백은월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애가 착한건가.
하여튼. 조금 진정이 된 이후.
아까보다 훨씬 더 나를 신뢰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말해줬다.
"좋습니다. 은월씨, 이제 교주놈의 감시도 없으니, 당신도 이제 저희 에고스트림 소속인겁니다."
"네. 아, 네!"
"그럼. 그 기념으로, 저랑 방송하나 같이 하죠."
"....네?"
우리 방송켜야 돼.
***
에고스트림의 배가 월광무녀가 테러를 일으키는 곳에 나타났다!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에고스틱이 직접 왔을것이다, 테러를 막을 것이다. 아니다, 스타더스랑 섀도우워커도 못뚫은걸 에고스틱이 어떻게 하겠느냐. 절대로 중심까지도 못간다. 아니, 우리 망고라면 모른다... 등
희망회로를 극한까지 굴리며, 사람들이 불타고 있던 그때.
번쩍-
갑자기 분홍색 폭풍에서, 보라색 빛줄기가 하늘을 향해 번쩍 솟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집중된 모두의 이목.
그와 동시에, 급변하는 폭풍.
그렇게 사람들이 가장 긴장하는 순간.
[시발ㅋㅋㅋㅋ 에고스틱 방송ONㅋㅋㅋㅋㅋㅋ]
에고스틱의 방송이, 켜졌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에고스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