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화
화평화로운 일상
황폐해진 거리.
쓰러져있는 건물들.
'안돼....제발....어나....리...'
'....빠....오빠!... 일어나...니!...빨리...해봐....'
'...못...해요...아무것도...제...힘으론....'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음들.
그리고.
'쿨럭...죄...합니다....'
'...랍....세..째줄....꼭....'
중얼거림과, 다시 들려오는 흐느낌.
'지...마...죽는거....니지?...흐...흐윽....'
'.......'
'....미안...'
'....포기...못해....못보..내....'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으아악!"
하아, 하아.
나는 오밤중에 자다말고 깨어나 일어났다.
...아니, 시발. 지금 몇시야.
"...새벽 3시네."
나는 감긴 눈으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래도 악몽을 꾼거같은데.
이 나이먹고 악몽때문에 놀라서 일어나다니.
"하아...."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일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나? 왜 이런 꿈을 꾸지.
생각해보니까 요즘들어 가만히 있다가도 계속해서 흠칫거릴때가 있기는 했다. 막 섬칫하고.
아무래도 진짜 기가 허한건가? 뭐 몸에 유령이라도 달라붙었나?
계속 이러면 다시 그 마녀님한테 찾아가서 퇴마라도 받아야겠다. 이 세계는 진짜 상상하는게 거의 다 있어서, 진짜 유령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걸수도 있어.
에휴. 근데 어쨌든, 잠은 이미 다잤네.
나는 고개를 들어 방 벽면에 있는 창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산들 사이로, 밝게 빛나고 있는 달만이 방을 비추고 있는 나의 방.
...어쩐지 갑자기 새벽감성이 느껴지는 밤이다. 남자가 제일 센치해지는 새벽 3시지.
아마 이 시각엔 나빼고 모두가 다 잠들어있을거다.
....그래, 이왕 일어나서 잠도 안오고 사람도 없는데.
그거나 미리 조금씩 적어놓을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키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 중 하나를 꺼냈다.
평범해보이는 다이어리에, 형이상학적인 도형들이 연녹색으로 그려져있는 이 책.
그래. 저번에 그 녹색마녀한테서 받은, 내 허락없이는 못 여는 노트다.
내 허락없이 열려면 내가 죽어야만 열리는.
"...흐음..."
그리고 나는 거기에.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만한 주요 이벤트들과, 막지 않으면 멸망의 단초가 될 수도 있을만한 일들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설정도. 뭐 나중에 한번 일어나는 시간이 돌아가는 이벤트라던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방법이라던가...
이런건 미리미리 다 적어두는게 좋다. 혹시나 사람 일이라는게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일류악당은 모든걸 미리미리 준비하는 법!
책의 제목은 대충 에고스트림 비상메뉴얼이라고 지으면 되겠지.
그렇게 밤새서 적다가 다음날 아침에 밥먹다가 졸아서 수빈씨한테 혼났다.
....나는 일하느라 늦게 잔건데, 너무 억울했다....
***
[저번 테러로 인하여 폭격을 당한 부산시의 지역들에 대하여 정부가 재개발을 허용했습니다. 십년만에 풀린 규제에 주민들은 들뜬 분위기입니다.]
평화로운 아침.
티비 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오는 거실에서, 나는 멍하니 소파에 누워있었다.
"다인씨. 뭐하세요?"
"아. ..일광욕 하고있어요..."
따사로운 햇볕이 창에서 건너와 나를 비추는 소파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으니, 재충전을 하는 기분.
나는 어릴적부터 이렇게 햇볕을 가만히 맞는걸 좋아했다. 비타민D를 충전해야 하는 법이니.
"자, 여기 과일 좀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와중에 수빈씨가 준 과일접시.
나는 거기서 참외를 하나 집어서 먹었다.
아삭하니 맛있네.
"아. 수빈씨. 근데 서은이는 아직도 아래에 있어요?"
"네. 세희도 같이 내려가있더라고요."
"그래요? 걔들은 대체 뭘하는지...."
요즘들어 둘이 자기들끼리 수근수근 거리더니 매일같이 지하실에 박혀있다.
서은이가 뭘 만들고 그걸 최세희가 옆에서 좀 도와주는거 같던데.... 에휴. 뭐 이상한 것만 안만들면 되지.
그건 그렇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있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실 한쪽 벽에 통유리로 뻥 뚫려있는 창. 주변의 풍격이 탁 내려다보이는게 보기만해도 상쾌하다. 내가 처음에 이 집에 들어올때 제일 마음에 들었던거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며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비에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한창 나와 아이시클이 벌인 소동으로 시끌벅적했다. 한가지 특이점은 뉴스의 내용이 어째 아이시클이 얼마나 대단하고 능력있으며 스타더스에게도 결코 꿇리지 않는지를 앵커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고 있다는거다.
....벌써 이설아가 방송국도 장악했나?
내가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할때쯤, 드디어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보니 화면에 딱 떠있는 '이설아'라는 세글자.
나는 그걸 보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그래. 여보세요?"
[하아, 이제서야 시간이 났네요. 미안해요. 하도 협회랑 기자들이 괴롭혀서 계속 바빴지 뭐에요. 타이밍 맞춰서 바로 추진해야 되는 일들도 있고...]
"그래 그래. 알았어. 너 시간 없는거야 내가 당연히 알지. 그건 그렇고, 빨리 그 얘기나 해봐. 어제 마지막에 스타더스, 그러니까 신하루가 갑자기 왔잖아. 어떻게 된거야?"
[...하아, 하루. 말도 마세요. 제가 당신과 저의 관계가 들킨줄 알고 얼마나 긴장했는데요.]
"들키진 않은거지?"
[다행히 네. 저희 둘이 웃는거까지는 봤는데, 뭐 더 자세히는 모르는거 같더라고요. 제가 그것도 어떻게 잘 둘러댔죠.]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 아니 근데, 어떻게 온거래?"
[어떻게 오긴요. 섀도우 걔 시켜서 왔다네요.]
"...아니 그러니까, 왜 온거래? 올 이유가 딱히 없지 않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살짝 흐응-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쌔요? 그건 직접 생각해보세요. 저도 잘 모르겠으니까.]
"...아니, 야."
[하여튼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않나요? 미래에 대한 얘기나 해보자고요 우리. 앞으로는 뭘 하실 건가요?]
이설아는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돌려 나한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뭔가 이상하지만, 일단 한번은 그냥 넘어가줄까.
나는 그런 그녀에게 그저 순순히 답해줬다.
"뭘하긴. 이제야말로 내 빌런연합을 강화해야지. 에고스트림에 새로운 빌런들을 하나 둘씩 계속 늘리는데 집중할거야."
[...좋아요. 당신이 그러는 동안, 저는 마저 빠르게 정치권부터 장악해보도록 하죠.]
"....그건 꼭 빨리 안해도 될거 같은데."
[무슨 소리세요. 미리미리 해놔야 저번처럼 대통령이 당신한테 미사일을 쏘아버리는 그런 돌발사태가 안일어나죠. 다 당신을 위해서에요.]
나를 위해서는 무슨. 자기의 야망때문이겠지.
나는 그녀의 속보이는 멘트에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뭐, 그래도 저렇게 속보이는 말을 싫어하는건 아니다. 그게 이설아의 매력이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 떠들었다. 대충 그녀가 언젠가 내 집에 놀러오겠다는 말등 아무래도 좋을 그런 얘기를 조금 더 하고, 시간이 지나고서야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 이설아는 넌지시 나에게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그리고 당신, 앞으로 웬만하면 당분간 테러는 스타더스한테 집중하는게 좋을거 같네요.]
"응? 뭐, 어차피 당분간은 스타더스한테 집중해서 할려고 했는데... 그건 왜?"
[...그냥요. 그게 아무래도 당신한테 좋을거 같네요. 그럼 끊어요.]
이설아는 거기까지 얘기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야. 싱겁게스리.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쪽에 있는 베란다로 한번 나가보았다.
"흠..."
원작에서 스타더스는, 늘 고민거리가 생길때마다 자기 집의 창문을 열고 이렇게 기대서 생각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도 한번 따라해봤다.
맑은 산공기와 바람을 맞아가며.
나는 난간에 팔을 기대, 계획을 생각해봤다.
"앞으로...."
다양한, 강력한 빌런들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튀어나올거다.
그리고 계속해서 피폐해지겠지. 스타더스가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벅찬, 다양한 능력을 지닌 적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니.
물론 이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애초에 내가 있는만큼, 그 빌런들 중 일부는 타락하기 전에 내가 미리 에고스트림에 포섭하던가, 아니면 제거하던가 할거라 원작보다 상황이 훨씬 나을거다. 이번 테러에 주역 레피스단처럼.
그리고 특히, 스타더스도 많이 강해지기는 했고.
원작보다 훨씬 능력이 일찍 강화된만큼, 어지간한 빌런들을 상대로도 잘 버틸 수 있을거다.
뭐, 잘 풀리겠지.
근데 그건 그렇고.
나는 가만히 서서,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스타더스가 왜 부산에 갑자기 달려왔을까?
사실 이설아가 이유를 알려줄거라 생각해서 별 고민을 하진 않았는데, 이제는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금방 결론을 내놨다.
뭐. 내가 그만큼 위협적이라고 느껴서 그런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다른 이유는 딱히 있을게 없다.
"좋은 일이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를 위협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만큼 좋다. 나를 아치에너미로 생각해야 나를 상대할때 더욱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생각할테니.
나는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베란다를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로 돌아오자 보이는, 소파에 앉아있는 서은이. 지하실에서 돌아왔나보네?
서은이는 나를 보자마자,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빠. 오빠 새로운 별명 생긴거 알아요?"
"또 뭐..."
"이거 봐봐요."
자신이 보던 폰을 나한테 건내준 서은이.
거기엔 내 팬카페에 게시글 중 하나가 화면에 써있었다.
*
[에고스타? 에고트라?]
다 꺼져ㅋㅋㅋㅋㅋㅋㅋ
<<<아이스망고>>>가 나가신다!!!
(아이시클과 에고스틱이 서로 웃으면서 싸우고 있는 사진)
(아이시클을 칭찬하는 에고스틱의 움짤)
=[댓글]=
[ㄹㅇㅋㅋ둘이 잘어올림ㅋㅋㅋ]
[오늘부터 아이스망고 무지성으로 지지한다]
[아이스망고 ㄹㅇ어감도 찰지네ㅋㅋㅋㅋㅋ]
[마 에고스틱 서울에서 그만놀고 부산으로 내려와라]
[망고스틱, 너는 서울보다 부산이 어올려!]
[스타더스<<<아이시클인거 같은면 개추ㅋㅋㅋ]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에고스틱의 상대는 스타더스입니다. 그는 에고스틱 전문가인 스타더스에게 맡기는게 당연한거 아닌가요? 엉뚱한 히어로랑 엮는건 옳지 않다 봅니다.]
ㄴ[@newday313 얘 왜 이렇게 부들거림?]
ㄴ[에고스타단 눈물의 저항중ㅋㅋㅋ]
ㄴ[스타더스 자택에서 검거]
ㄴ[프로필 보니까 성실회원이던데 에고스타단 이셨네 댓글단거 처음보는듯ㅋㄱㅋㅋㅋ]
ㄴ[청발태닝양아치에 정신을 못차리는wwww]
[아이스망고 ㅅㅂㅋㅋㅋㅋㅋ 오늘 간식은 이거다]
*
"오빠 오늘 간식은 아이스망고나 먹을래요?"
피식 웃으며 말하는 서은이를 보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어째 갈수록 호칭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