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9 손을 잡다
내 앞에 있는 긴 하늘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약간 차가운 고양이 인상같은 여자. 이설아.
그녀를 가리키는 말은 다양하다.
일단 스타더스와 더붙어 대한민국의 단 3명밖에 안되는 A급 히어로 중 한명이다. 아이시클이라는 이명으로 활동하며, 부산에 거점을 두고 빌런들을 진압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히어로라는 신분만큼 유명한 다른 신분이 있다. 바로 이설아라는 그 이름 자체.
그녀는, 대한민국의 재계 2위에 빛나는 유성그룹의 상속자인 재벌 3세다.
예전부터 우월한 미모와 재벌 3세라는 타이틀로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던 그녀는, 능력 각성 이후 히어로로서도 살겠다고 밝혀 큰 화제를 모았다.
재벌 3세임에도 불구하고 시민을 위해 히어로 활동을 하는 게 좋게 보였는지, 유성그룹 본사가 있는 부산에서는 꽤나 이미지가 좋았다.
특히 특유의 미모와 생글생글 웃고 다니는 인상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착한 재벌 3세라는 이미지를 얻고 있다. 굳이 할필요도 없는 히어로를 하니, 애초에 당연한거겠지만.
그리고 이건, 모두 다 가면이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순진한 여자인 척 하는 그녀는, 사실 뒤에서 대한민국을 집어삼켜버리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있는 흑막이었다. 히어로 활동도 그런 속내를 감추고 이미지를 관리하 며 협회와 커넥션을 만들기 위함.
실질적으로 뒤에서 유성그룹을 총 지휘하던 그녀는, 경쟁사였던 한은그룹이 자멸한 이후에는 실질적인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의 수장이 된다.
이후 원작에서 그녀는 대통령이 서울 붕괴사태로 물러나 정치적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차근차근 정치계를 하나 둘 잡아먹으며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그리고 결국, 재계, 정계, 그리고 민심까지 다 쥐어잡아 원작 후반부에서는, 자기 입김대로 대통령을 갈 수 있고, 법도 마음대로 바꿀수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실질적 지배자에 등극하는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가, 현재 내앞에 있었다.
"협력관계라.."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는 이설아.
뒤에선 햇빛이 그녀의 하늘색 머리칼에 반사돼 반짝되고 있었다.
"재밌네요."
그리고 그녀는 피식 웃더니, 차가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히어로인 제게 빌런이 협력을 맺자고 제안하는 모습이라니, 제가 이걸 수락할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싸늘하게 말하는 그녀.
그와 동시에, 살짝 방의 온도도 내려간 기분이 든다.
아니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실제로 내려간걸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반응에, 나는 씨익 웃었다.
"에이, 무슨 소리십니까? 서로 알거 다 알면서."
자. 여기서가 중요하다.
원작에서 보인 이설아는, 굉장히 무서운 애다. 거의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천부적인 재능과 상황판단력을 가진 여자.
그러나. 그건 더 많은 경험과 관록을 가졌을때의 얘기고.
지금은 아직 야망만 가진, 원작 후반부와 비교하면 어설픈 그녀다. 이때는 아마 판단력도 좀 흐릴꺼고.
아직은 애송이라는 말.
그러니까, 그녀를 요리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이 유일하다. 그녀가 무르익기 전, 지금이.
그랗게 나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유성그룹의 확장주의적 행보의 배후가 누군지 제가 뻔히 알고 있는데, 뭘 그렇게까지 그러시나요. 저는 당신을 방해하려는게 아니라,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원만한 관계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동지라고 할까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곤 손을 까딱해 옆에 있던 텅 빈 찻잔과 주전자를 염동력으로 들어, 내 앞에 커피를 한잔 따랐다. 그리고 들어서 마셨다. 맛있네.
마치 내집같은 편안함을 보여주는 내 모습에 살짝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한 이설아는, 이내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는 나에게 싸늘히 말했다.
"대체 저에 대해 뭘 아시고 그러는지는 모르겠네요. 애초에, 당신이 저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건가요? 어이가 없네요."
요약: 나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건지 설명해봐라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시 한번 피식 웃어주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건 많죠. 뭐,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만."
그걸 앞에서 떠벌거리면 좀 폼이 안나잖아?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이설아에게 던졌다.
갑작스럽게 검은색 물체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자 살짝 움찔하면서도 공중에서 탁 낚아채는 그녀.
그녀가 USB를 손에 잡고 이게 뭔냐는 듯 나를 바라보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요즘 다른 회사들 하나하나 합병하랴, 정치권도 거드리랴 바쁘신 것 같던데... 뭐, 좀 도움이 될 수 있는걸 드렸습니다. 제 작은 성의라고 봐주시면 좋겠네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그냥 일어나버렸다. 내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뭐하냐는듯 바라보는 그녀.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쯤이면 제 제안을 수락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저기요? 이게 무슨."
"그럼 나중에 뵙죠."
나는 그렇게 내 할말만 하고 망토로 몸을 감쌌다.
악당 특. 할말만 하고 사라짐.
그렇게 순간이동해서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늘색 머리칼, 약간 날카로운 고양이 같은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원작 후반부보다는 훨씬 앳되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정말로, 수락해주면 좋겠네. 협력.
너를 처리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선택한건데, 최소한 이정도 도움은 되야지.
그렇게 그녀의 녹색빛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내 눈에 담으며, 나는 그곳에서 순간이동해 사라졌다.
아, 이제 다시 서울까지 올라가야 하네.
존나 귀찮어.
***
"하아... "
에고스틱이 떠나간 자리.
그 앞에서, 이설아는 숨을 토해냈다.
"하. 아니 진짜, 뭐야......"
그녀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참고있던 숨을 쉬었다.
사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등이 식은땀으로 젖을정도.
갑자기 에고스틱, 그 빌런이 자신 앞에 나올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늘 스타더스만 찾던 그이기에 더더욱.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알고있는 모습을 보여줬을때는 정말 소름이 돋는줄 알았다. 어떻게? 분명 정보는 철저히, 정말로 철저히 감췄을텐데?
뭐든지 꿰뚫어 버릴듯한 그의 눈동자를 봤을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어떻게든 여유로운 척 하는데 성공했다.
에고스틱. 그에 대하여 그녀는 어느정도의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이설아 그녀는 태어났을때부터, 다른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의 때려 맞출수 있는 재능을 가졌었다. 타고난 머리와 눈치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거의 맞출 수 있는거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추측하기에, 에고스틱은 애초에 빌런으로 활동하지만, 세상에 대한 적의가 없었다. 이는 히어로인 스타더스에게도 마찬가지. 오히려 빌런인 척 하며 마치 영웅처럼 활동하는 그.
그리고 일어난 일렬의 사건들과 그의 행보를 통해, 그녀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에고스틱, 그는 일종의 안티 히어로다. 능력이 아주 출중한.
그리고, 그런 그가 자신의 앞에 등장할 가능성? 그렇게 높게 치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그가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설마 거기까지 알겠어?
그리고 오늘, 이설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를 과소평가 했다는 걸. 그는 자신에 대해 모든걸 알고있었고, 그녀가 그를 꿰뚫고 있다는 것마저 알고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 심지어 협력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 줄수 있냐고 물어보자, USB 하나 던져주고 사라졌다. 자기 할말만 하고 그냥 가버린 것이다.
"하아... 진짜 뭐야...."
대체 그는 자신에게서 뭘 원하는거지? 왜 접근한거지?
애초에 에고스틱. 그는 자신이 적이 되면 굉장히 좋지 않은 상대였다.
에고스틱, 그녀는 처음부터 통찰로 그를 꿰뚫어봤었다. 빌런인 척 하지만, 실상은 모순적이게도 히어로에 닮았다는 걸. 거기에 그녀의 천부적인 눈치로 파악해 봤을때, 그의 그런 행동 은 스타더스와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어보였다. 더 자세한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그를 경계해야할만한 이유는 여러개였다.
대체 어디서 얻은건지 모르는 압도적인 정보력, 어디서 난지 모르겠는 압도적인 자금력, 거기에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 대체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팬덤을 형성했는 데, 그 팬덤 규모도 규모일 뿐더러 그의 말이면 무조건적으로 믿는 엄청난 충성심을 자랑한다. 아니, 애초에 에고스틱에 대한 여론이 일반 대중사이에서도 대체로 좋다.
즉, 에고스틱 그는 개인으로써는 대한민국에서 거의 제일가는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다. 평소에 가면쓰고 하하 웃고다니니까 잘 모르는거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하고도 무서운 존 재.
그러나,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어느정도 적의는 없고, 자신과 엮일 일도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기에 크게 경계하지는 않은거다. 예의주시하기는 했지만, 그뿐.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거기에 협력이라는, 상당히 생뚱맞은 이야기를 들고...
"하아...."
이설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체 그는 자신의 야망을 어떻게 알고, 협력하자는건 대체 뭐지? 함정인가?
특히 그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에 보인 눈길. 계속해서 헤프게 웃던게 거짓말이라는 듯,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 눈길을 생각하며 그녀는 살짝 몸을 떨었다.
....진짜 함정 아니야?
사실 그가 자신을 적대하는게 아니라면, 그녀로써는 딱히 그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와의 협력은 플러스라면 플러스지 마이너스는 아니니까.
....그가 자신과 진심으로 협력하자는건지 아닌지는, 이걸 열어보면 나오겠지.
그녀는 자신에 손에 들린 작은 USB를 바라보았다.
...이걸 꽂는다고 혹시나 해킹당하고 그러는건 아니겠지?
"...."
에이, 설마 그럴까
그녀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르니까 서브 컴퓨터에 꽂아봤다.
대체 뭐가 들어있는걸까.
그녀는 긴장하면서도 USB를 열어보았고. 그 속에는...
"...어?"
다른 경쟁사들의 비리와 허점등을 기록한 파일들이 수없이 들어있었다.
내부 정보부터 기밀 문서, 개인의 비리까지.
활용할려면 정말 수많은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러한 문서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녀의 눈이, 살짝 빛났다.
이것들만 있으면, 그녀가 요즘 골머리를 앓던 인수합병과 관련된 일이 굉장히, 훨씬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벌써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정보들을 이용해 다른 회사들을 어떻게 삼켜먹을지에 대한 수많은 방법들이 시시각각 떠오르고 있었으니.
"...아주 좋은 사람이었네."
에고스틱.
이제 봤더니,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줄 생각인거 같다. 위협할려는게 아니라. 이런걸 주는 사람이 그녀의 적일리가 없다. 그럼.
뜻밖에 선물에 갑자기 행복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한 그녀.
똑똑하고 스마트한 자신이 판단하기에, 에고스틱은 진짜 그녀와 협력을 맺고싶어 하는, 유용한 인물인거같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를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않나?
***
한주 뒤.
"그래서, 제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네. 뭐, 함께 못할것도 없죠."
그렇게 둘은 손을 잡았다.
나 에고스틱, 대한민국 시가총액 1위의 기업을 운영하는 미래의 흑막을 포섭하다.
'운이 좋군.'
한방에 꼬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