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버스
부산에 한 펜트하우스.
통유리로 부산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그곳에, 두 여인이 앉아있었다.
"아 하루야, 하루야아."
"왜?"
"부럽다아..."
"뭐가?"
베란다 쪽 테이블에 앉아 얼음이 띄워진 시원한 망고쥬스를 마시며 밖을 바라보고 있는 금발의 여자는, 친구를 따라 놀러온 A급 히어로의 삶을 숨기고 있는 평범한 대학생, 신하루.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칭얼거리는, 소파에 누워있는 하늘색 포니테일을 한 여자도 A급 히어로 아이시클, 이설아였다. 대신 스타더스와는 다르게 자신이 히어로라는걸 숨기지 않은.
"왜냐니. 너 곧 S급 되잖아. 그것도 대한민국 최초!"
"하하, 그거때문에 그래?"
그제서야 이설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한 신하루는, 멋쩍게 웃었다.
"S급 부러워... 나도 S급이 되고 싶었어..."
"글쎄. 막상 난 실감이 안나서 잘 모르겠는걸. 그리고 등급 알파벳하나 달라지는게 뭐 얼마나 대단해지는건가 싶어."
빨대로 쥬스에 담긴 얼음을 휘저으며 그렇게 무심히 말하는 신하루.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이설아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S급 되면 달라지는게 얼만데. 당장 위상부터가 달라질껄? 사람들 사이에서 S급과 A급의 차이는 또 하늘과 땅 차이라고."
"그런가? 글쎄... 아. 하긴, 너는 위상이 클수록 회사에 좋으니까 그럴수도 있겠네."
신하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도 이설아가 히어로 생활과 동시에 기업을 운영해나간다는걸 알고있다. 그렇기에 히어로 활동도 정의감보다는 회사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한다는것도.
"그래. 하아... 나도 등급이 높아지고 싶은데. 근데 그럴려면 좀 강한 빌런이 나와야지 나도 실적이 쌓이고 하지, 여기는 뭔가 다 약해. 특색있는 애들이 없어! 나도 너처럼 에고스틱 같은 애 한명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이설아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에고스틱이 나오자, 신하루는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을 잇는 설아.
"아! 나도 차라리 이번 기회에 서울로 올라갈까? 어차피 이쪽은 요즘 빌런들도 별로 없는데. 하루야, 이번에는 에고스틱이 테러 저지르면 내가 상대해도 돼?"
"....안돼."
"응?"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해버린 하루.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설아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닫고 황급히 이유를 덧붙였다.
"아니, 걔가 계속 테러 일으킬때면 꼭 나보고 오라고 협박해서, 다른 사람이 상대하면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어..."
"알았어 알았어. 왜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웃으며 진정하라고 말하는 설아를 보며, 신하루는 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그렇게 답했지?'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에 그녀 자신도 당황스러웠다. 뭐지. 뭔가... 에고스틱이 그녀말고 다른 히어로와 싸운다고 하니까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 자신이 에고스틱을 제일 잘 알고, 제일 오래 싸워왔으니 그런거다. 설아가 괜히 걔를 상대하다가 다칠 수 있으니까. 원채 변칙적이고 막기 힘든 테러를 하는 놈이니 설아가 상대하기에는 조금 무리니까 걱정되서 내가 대신 싸운다는거지. 응.
그렇게 그녀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옆에서 팔을 괸 채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이설아는 이내 일어섰다.
팔을 뻗어 으으으...같은 소리를 내며 잠시 기지개를 한 그녀는, 신하루에게 다시 말을 건냈다.
"으응... 하루야, 나 오늘 회사좀 잠깐 다녀올게. 처리해야하는 일이 있어가지구, 금방올게! 잠시만 기다려줘. 알겠지?"
"응? 으, 응. 갔다와."
"어. 빠이~."
그렇게 활짝 웃으며, 묶어둔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는 거실을 나섰다. 뒤에서 여전히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하루를 홀로 내버려둔 채.
그리고 그녀는 얼마후,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그리고 회사 내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차가운 표정의 그녀가 복도에 들어서자, 근처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그녀에게 인사를 건내왔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제서야 살짝 웃으며 인사를 받는 그녀.
"네, 네. 안녕하세요."
물론 인사를 건낸 뒤 그녀의 표정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확연히 달라진 건물의 분위기.
아래층들 처럼 밝고 활기차기 보다는, 진중하고 살짝 무거운 그런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승강기에서 내린 그녀는 묶어두었던 머리를 풀고,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그녀의 발소리가 주위에 울려퍼지는 소리. 곧 집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앞에 서있던 경호원에게 말을 건냈다.
"제가 업무 볼 때는, 아무도 여기 들어오게 하지 말아요. 아셨나요?"
"네 아가씨."
선글라스를 쓴 그의 로봇같은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웬만한 집들의 거실보다도 큰, 넓찍한 그녀의 집무실.
그녀를 제외하고는 텅빈 그곳에서, 그녀는 또각 또각 걸어가 창을 등지고 자리에 앉았다.
"휴우..."
쌓여있는 결제 서류들 중 하나를 꺼낸 그녀.
그렇게 근처에서 볼펜을 꺼내 서류들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서류작업을 하던 그녀.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펜을 내려놓은 뒤, 찻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는, 입에 대기 전 입을 열고 말했다.
"거기에 조용히 앉아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이나 해보시지 그래요?"
텅 빈 집무실에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이내 그녀의 앞쪽에서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까요?"
이내 그녀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자.
그녀가 들어올때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집무실 의자 앞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검은색 모자, 검은색 망토를 입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회색빛 가면을 쓰고있는 남성.
이내, 그가 그녀를 향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설아씨. 에고스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
상남자 특.
일단 무대포로 진격함.
그렇게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던 나는 현재, 하늘색의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이설아와 대면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오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무관심한 얼굴로 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는 그녀.
....그런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는건 못본 척 해주기로 했다.
사실 하품하면서 작업하다가, 내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걸 뒤늦게 확인하고는 움찔했던 것도 기억에서 지워주기로 했다. 움찔하더니 마치 아무것도 못봤다는 듯 다시 서류작업에 열중하는 척 하는건 좀 웃기긴 했는데, 어쨌든.
그렇게 내가 그녀의 앞에 몰래 순간이동해 들어와 잠시 앉아있는 동안, 꿋꿋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서류작업을 하던 그녀는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펜을 내려놓고 드디어 나에게 말을 건냈다.
마치 그녀의 개인 공간에 불법침입한 빌런한테 건내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히 말을 건낸 그녀.
"거기에 조용히 앉아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이나 해보시지 그래요?"
그래서 나는 그런 그녀에게 친히 대답해줬다.
"그럴까요?"
"안녕하십니까 이설아씨. 에고스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내가 웃으면서 건낸 인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러며 커피를 한모금 마신 뒤, 그녀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오신거죠? 드디어 자수할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생긋 웃으며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건낸 그녀에게, 나는 똑같이 웃으며 맞받아졌다.
"하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히어로인 척 하며 뒤로는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려는 유성그룹의 실질적 지배자 이설아씨에게 관심이 있어서 찾아왔죠."
"어머 그래요? 저는 또 빌런인 척 하며 뒤로는 스타더스를 챙겨주며 대한민국을 지켜주시는 우리 에고스틱씨가 스스로 수용소에 들어갈려고 마음먹어서 오신 줄 알았죠."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렇게 잠시 그녀의 집무실에는, 나의 박장대소와 그녀의 건조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뒤.
우리는 서로 약속한 것마냥 동시에 웃음을 멈췄다.
"...대단해요, 대단하군요 이설아씨. 역시 당신이라면 그정도는 예상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요, 대단하네요 에고스틱씨. 설마했는데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대체 그 정보는 어디서 나신거죠? 웬만하면 절대 유출될 리가 없을텐데?"
"하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팔짱을 꼈다.
여기서는 여유로운듯 웃음을 보이는게 중요하다. 이설아 앞에서는 방심했다가는 탈탈 털리는 수가 있다. 쟤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데.
그렇게 남의 집 안방에 들어와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웃고있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포기한다는듯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래서, 저한테는 왜 오신건가요?"
그제서야 나에게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씨익 웃고는 대답했다.
"이설아씨. 혹시 저와 '협력관계'를 맺으실 생각 없으십니까?"
이 돌아버린 히어로 만화 속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제 첫번째.
흑막이랑 손을 잡자.
흑막은 때려잡는게 아니라, 버스를 타야되는 존재인 법이에요.
***
"......."
친구 이설아의 집에 놀러와 잠시 쉬고있던 신하루는, 갑작스럽게 등골이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무언가 방금, 굉장히 안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 같다는 직감이 느껴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