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 미래를 위한 포석
일렉트라 데뷔와 빌런 연합 창설 선언 이후, 나는 다시 한동안 쉬기로 했다.
빌런이라는 직업의 장점이, 한탕 한뒤에 자체적으로 몇주 쉴 수 있다는거지.
뭐, 사실은 원작의 메인 이벤트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거지만.
하여튼 우리는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요즘 연예계 뉴스를 못봐."
한가한 낮.
내가 서은이와 같이 거실에서 TV로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최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못보는데?"
"하아. 들어갈 때마다 이런게 나오니까?"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내쪽으로 보여주는 그녀.
그녀가 보여준 화면에는 [에고스틱X일렉트라 존재감 뿜뿜 넘치는 케미 모음.zip]이라는 굉장히 어질어질한 기사가 보였다.
"오빠! 앞에!"
"어? 악!"
참고로 그거 보다가 게임에서 죽어버렸다.
"망겜이네."
눈 좀 살짝 돌렸다고 죽는게 망겜이지 뭐가 망겜이냐?
"하아... 뭘봤길레 그래요? 저도 보여주세요."
그렇게 서은이가 최세희의 폰을 보는 동안, 나는 최세희에게 말을 건내주었다.
"너무 크게 신경쓰지마. 어차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회로돌리는건데 뭐."
"아니... 그래도 메인에 저렇게 대놓고 걸려있는데, 넌 신경 안쓰여?"
최세희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생각해보니까 나도 처음에 스타더스와 열애설 떴을때는 진짜 화들짝 놀랐다. 방송국을 폭파시켜버릴까 고민했을정도로.
근데, 뭐. 지금은.
"계속 보다보면 익숙해져."
"...거 참 도움이 되는 말이네."
떫떠름하게 나를 보는 최세희의 시선을 피하고 있을 때, 옆에있던 서은이가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애초에 오빠 옆에 제일 오래 있던건 저인데, 왜 세희 언니만 사람들이 알아주는거에요?"
"왜냐니. 그야 너는 뒤에 있었고 최세희는 나랑 같이 카메라 앞에 섰으니까 그러지."
"으. 카메라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내가 그 앞에서 연기하느라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나는 일렉트라다! 이렇게 말할때 챙피해서 혀 깨물뻔했다고."
"....근데 그렇다기에는 너도 중반부터는 좀 즐기던거 같은데?"
"내가? 하! 어이없어."
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찔렸는지 입을 다물곤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그녀.
그리고 옆에서 서은이의 '나도...테러를...'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음.
여전히 평화로운 하루구만.
***
그래도 우리 에고스쿼드. 아니지. 이제는 에고스트림이라고 해야하나? 우리 에고스트림 일원들이 놀기만 하는건 아니다. 일을 할때는 또 하는 법.
서은이와 수빈씨는 에고스트림 홈페이지를 계속 만드느라 바쁘다. 무슨 메크로를 돌리겠다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율이와 차윤이 남매는 열심히 공부하는 중. 특히 차윤이는 나한테 커서 협회에 들어가 나를 도와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기특해 아주.
최세희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하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고.
나는.
현재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있었다.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거리.
나는 그것들 중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다 쓰러질거처럼 허름한 건물 안.
내부로 들어온 나는, 곧장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과 똑같이 어두컴컴하고 허름한 지하.
평범해 보이는 지하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차이점이라면.
아무리 내려가도,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점?
"....좋아."
나는 괜히 그렇게 중얼거려봤다.
여기 맞겠지?
마치 아무 문제 없다는듯 계단을 계속해서, 사뿐히 내려가던 나는. 기습적으로 옆에 벽면을 발로 쾅 쳤다.
"이리 오너라!!!"
그와 동시에, 모래로 쌓은거마냥 허물어지는 벽.
그리고 그 벽 너머로는, 기다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제대로 왔네.
녹색의 양초불이 은은하게 감싸는, 아까까지의 허름한 건물과는 대비되는 고풍스러운 석조 복도. 약간 이끼가 끼어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을 나는 당당하게 걸어갔다. 아니, 시대가 언제인데 아직도 양초를 쓰는거야? 마음같아서는 싹다 LED를 달아버리고 싶다. 산업화 좀 해야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세 어느샌가 온 복도의 끝.
그리고 그 앞에는, 검은색 문이 놓여있었다.
세밀한 장식들이 가득한, 고풍스러운 흑요석 문이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나무 문이든 흑요석 문이든 자동문이든 열리라고 만들어진건 다 똑같다. 그래서 문을 당당하게 쾅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똑같이 녹색의 양초로 은은하게 빛나는 살짝 넓직한 방.
이런저런 액자들과 무언가 들끓고 있는 솥단지를 지나, 나는 연두색의 장막이 쳐져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복장은. 검은 모자부터 검은 신발에 망토에 가면까지. 어느새 갈아입은 완벽한 에고-슈트상태다. 사실 그녀는 어지간하면 내 정체를 꿰뚫어 볼거 같기도 한데,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베일처럼 쳐진 장막을 걷자 보이는 것은, 작은 원형 탁자. 그리고 그 위에 수정구.
그리고 나를 마주보는, 여인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며 들어오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진녹색의 로브를 머리끝까지 써 얼굴을 가린 그녀는, 나중에 협회에 정체가 밝혀지자마자 즉시 S급을 부여받는 빌런, 덩굴마녀(Vine Witch)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아이구나. 그래, 어쩐 일로 찾아왔니?"
"예. 다름이 아니라, 의뢰를 하려고요."
그래. 내가 그녀를 찾은 이유는 의뢰를 하기 위해서다.
나는 미리 챙겨운 두개의 가죽 노트를 꺼냈다.
하나는 내 일기장, 그리고 하나는 아직 안쓴 노트.
"이거 2개에 봉인의 주술 좀 해주십쇼."
"기한은 언제까지?"
"둘 다 제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다른걸 꺼냈다.
작은 상자에 담긴, 수십개의 형형색색의 보석들.
내가 그 상자를 탁자위에 놓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서 노트를 가져갔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영창을 시작하는 그녀.
내 노트에 손을 올리고 말을 중얼거리자, 책 둘이 전부 연두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빛도 꺼지고.
이내 다 되었다는 듯 나에게 두 노트를 건네주는 그녀.
다시 두권 모두 받아 살펴보니, 겉에 전에 없던 연두색의 주술적인 문양이 새겨진 모습이다.
"...이제 주인외에는 그 누구도 강제적인 방법으로 열거나 내용을 엿볼 수 없을거다."
"감사합니다, 마녀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 다 봤으니까 가야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베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문쪽으로 가자,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오는 말.
"...힘든 길을 걷는구나."
스쳐지나가듯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멈칫했다.
마치 내 모든걸 꿰뚫듯이 말한 그녀의 한마디에. 자연히 느려지는 내 발걸음.
역시, 그녀정도면 한방에 알아보는건가.
어떻게 답해야할까.
...그래.
"...누군가는 걸어야하는 길이니까요."
"힘내거라."
내 답변에 짧게 응원을 해주는 그녀.
원작에서 덩굴마녀가 저런말을 한 적이 있었나? 저렇게 응원하는 말을 한거는 처음인거 같은데.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복도를 걸었다.
힘든 길이라.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힘들지 않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했다.
***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펼쳐놓은 두 노트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내 일기장. 이제 최세희도 이집에 거주하면서 들킬 확률이 커진만큼, 아예 봉인해버렸다. 여기에 내 목표랑 그런거 다 적혀있어서 들키면 큰일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새로산 노트.
이것도 차차 내용을 채워나갈 생각이다. 이건 나중에 해야지.
대충 할 일을 다 마친 나는 스타더스 팬카페나 들어갔다.
내가 직접 만든 국내 최대 규모의 히어로 팬카페. 스타더스 팬카페 별먼지단.
하루하루 쑥 쑥 커가는 카페를 보면 괜히 내 마음이 뿌듯해지고 그런다.
....아직도 내 팬카페인 망고단에 비하면 인원이 반에 반도 안되는게 흠이지만. 아니, 빌런이 히어로보다 팬카페 규모가 크다는게 말이 돼? 스타더스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나는 툴툴거리며 카페를 관리했다.
스타더스 사진... 저장. 스타더스 찬양... 좋아요. 스타더스 열애설... 삭제. 스타더스랑 에고스틱이 잘 어올린다? ...음. 이건 냅두고.
그렇게 하나하나 관리하던 나는, 한 게시글의 제목을 보고 살짝 멈칫했다.
[협회다니는 지인한테 들었는데 한은그룹 지하에 에고스틱이 들어간 날 스타더스도 들어갔었다는데?]
그건 바로 삭제하고 게시글 작성자도 차단했다.
넌 너무 많은걸 알았어.
그렇게 칼삭을 한 나는, 한은그룹에 대하여 다시 떠올려봤다. 서은이와 수빈씨의 원수. 비밀실험을 자행하던 대기업. 그리고 도망친 총책임자 김선우와 연구원들.
달력을 보니... 그래. 곧이네.
"드디어 끝장을 보겠구나."
그래.
이번에야말로 원작의 중간보스이자, 살아있는 피폐메이커 한은그룹 놈들을 완전히 박살낼 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슬슬 방송할 준비하고, 계획도 설립하고 해야지.
이번엔 그리고, 스타더스도 확실히 지목해서 부르자.
"...."
절대 내 팬카페에서 최근에 에고스틱이 스타더스 버린것 같다는 글을 봐서 이러는게 아니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