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통수
"....뭐라고?"
"그 재앙이 벌어질거 알고서, 미리 다리 부순거 맞다고요."
내 대답에 벙찐 표정을 짓는 그녀.
그래, 내가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나보다.
뭔가 내가 대충 둘러대면, 그 변명의 허점을 찾아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나를 압박하려고 한거 같은데.
어림도 없지.
"근데,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그거 알으셔서 뭐 어떻게 하게요?"
나는 오히려 그렇게 따져물었다.
에고류 비기. 어쩌라고 전략.
"....아니, 잠깐."
그녀는 내 쿨한 인정에 살짝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붙잡았다.
왜, 이런 대답을 기대한게 아니었어?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나보지?
프로 악당은 원래 막나가는 법이야.
"....그럼, 그 사건이 벌어질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아. 그걸 말씀 드려야겠군요."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저는 미래예지 능력이 있습니다. 그걸 알고 미리 다리를 부순거죠."
"...정말로?"
아니, 믿지마...
"이걸 믿으시는걸 보니, 아직까지 제대로 된 1인분을 하는 히어로가 되긴 멀으신 것 같네요."
내가 피식 비웃으며 말하자, 눈을 찡그리는 그녀.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죠.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그냥 현대 과학의 승리라 보면 됩니다."
잠시 숨을 들이키고.
"저와 제 '동료'들은 몇주 전부터 한은그룹을 해킹해, 그들의 본사 지하에서 통제 불가능한 거대 괴수를 배양하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시뮬레이션으로 분석, 놈의 탈주했을때의 시나리오를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다 준비를 해놨죠."
"다리를 부순건 제가 한 수많은 보험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거 말고도,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비해 세팅을 해놨죠. 다리는 우연히 얻어 걸린 것 뿐입니다."
다른 경우의 수는 무슨 다른 경우의 수.
당연히 원작에서 다리를 건넜으니 다리 부순거 말고는 다른건 아무것도 안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놓는 거다. 갑자기 예언자 취급 받고 싶지 않으면.
....사실 거의 미래를 보는 것과 비슷하긴 한게 맞지만.
어쨌든, 나의 그런 변명은 잘 먹혀들어간거 같다.
그녀가 살짝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거든. 그래, 받아들여!
지금까지 내가 한 해킹들을 떠올려봐라. 방송사 전파납치, 전국민 계좌 메크로로 돈 송금...
솔직히 이정도면 대기업 보안 털어서 시뮬레이션 돌리는건? 당연히 할 수 있는거 아닐까?
잠시 내 대답을 곱씹던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상하잖아."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너가 왜 다른 사람들이 죽던 말던, 그런걸 신경쓰고 막는건데? 애초에 너가 다른 민간인들을 가지고 놀며 테러하는 놈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째려보는 그녀.
이건 그냥 이렇게 답하면 되지.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어그로가 뺏기니까요."
"어그로?"
"관심 말입니다. 빌런들의 특징이 뭡니까. 이거 다 관심받을려고 하는거에요. 최대 다수의 최대 불행이라고 하나? 테러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한테 절망감을 주고자 하는건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사람들이 저한테 주목을 해주겠습니까? 이미 가족이고 친구고 잃은 사람들이 티비에서 생판 남이 죽네 사네 하는걸 관심이나 가져주겠냐 이말이에요. 그래서 막았습니다."
내 담담한 말에,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맞는 말이잖아.
실제로 한 빌런이 테러를 일으켜 화제가 되면, 그후 몇주는 그 어떤 빌런도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이 받게될 관심의 양이 줄어드니까.
실제로 내가 요즘 대규모 테러를 뻥뻥 일으키는 바람에 범죄율이 줄고 있다는 통계도 있더만.
"...그래서. 어그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막았다?"
"네. 정확합니다."
"........"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신 겁니까? 제가 갑자기 내면의 선함을 깨닫고 사람 구하러 다니는 히어로로 각성한 줄 아신겁니까? 원래 진실은 생각보다 싱거운 법입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근데 사실 진정한 진실은 사람들을 구하고, 이 세계가 피폐물이 되는걸 막기 위해서 한게 맞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면 그녀가 대체 날 뭘로 보겠는가? 그녀 특유의 초감각으로 그냥 내 정체를 파악해 버릴수도 있다.
사실 내가 하는 모든 테러도, 다른 빌런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다니는것도 모두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사실 나에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고, 오로지 그녀를 위해 이러고 있다는 걸.
이 모든게 다 오로지 이 세계의 평화와, 그녀의 불행을 막기 위해 이러는 거라는걸.
물론 그녀가 이 모든걸 추리하게 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겉보기에는 나는 법 위에서 노는 무법자, 약한 이를 괴롭히는 테러범 그 자체인데 뭐.
그래도, 미리미리 조심해서 나쁠건 없지.
그리고 때마침 내가 말을 끝냈을 무렵, 문쪽의 차폐막이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니, 어느새 3시간이 다 지나있는 상황.
문이 드디어 열렸다.
이 어색한 방도 탈출이다 탈출!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녀.
하아. 아무래도 이 한마디도 해야겠다. 답답해서 안되겠어.
"....그리고. 제가 사람을 살리던, 무슨 짓을 하던 저는 애초에 법 위에서 노는 무법자이자 테러리스트. 그러니까 빌런입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거 같아서 덧붙입니다만."
그러니까 나 좀 의심하지마.
난 확실한 빌런이라고! 뭔가 아까부터 자꾸 나를 블랙히어로로 몰아가려고 하는거 같은데, 굉장히 당황스럽다. 스타더스가 성선설을 믿는다는 얘기는 못들 은거 같은데. 왜 자꾸 나를 세탁하려고 하는거 같지.
내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더욱 의심으로 물드는것 같아, 나는 그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당해봐야 알지, 당해봐야 알아.
그래도 일단 그녀는 내 말에 반박을 딱히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났다.
뭐. 일단 내 말이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기는 하니까. 여기서 더 의심해서 뭐할꺼야?
...그런데 어쩌다가 갑자기 그녀가 취조하고 내가 변명하는 분위기가 됐던거지? 나는 그냥 파워업 이벤트를 하려고 왔을 뿐인데. 어떻게 엮여가지고는...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뭐 그 이후에는 서로 별말 안했다. 그냥 튀어나오는 괴물들 하나하나 무찔러가며 진격했을뿐.
...아니, 대체 근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모르겠네.
히어로와 빌런이 서로 붙어서 지하를 탐방하는 모습이라. 내가 제안한거기는 하지만, 참 이상한 그림이다.
그녀는 내가 즉시 도망칠 수 있다는걸 알기에,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내겠다는듯이 지켜볼 뿐.
나는 애초에 그녀를 공격할 생각이 없기에, 공격하지 않는다. 빌런이 히어로를 무지성으로 '공격'하는건 이 세계의 상식이기는 한데... 내가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그래서 이렇게 계속 어색한 동행을 하고있다.
특히 아까 방에서의 만담을 기준으로 더 어색해진것 같다.
가끔씩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데, 무서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나는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걸었다.
절대 앞장서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통수맞고 협회 밑바닥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농후하거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기도, 그렇다고 갈 길 가라고 놓아주기도 그래서, 임시동맹이라는 기묘한 타이틀 아래 동행하고 있는 모습.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괴물들은 거의 다 족치면서 가서, 이제는 사실상 다 처리한 느낌이다.
그 순간이동한다는 괴물은 못보기는 했지만. 걔는 이미 여기 빠져나간건가? 뭐, 그건 다른 히어로들이 처리하겠지.
빨리 베히모스만 챙기고 튀고싶을 따름이다.
...아니지.
지금 그녀가 특유의 직감으로 내 본질을 깨닫기 전에.
진짜 악당이란 무엇인지 교육을 좀 시켜야 할 수도...?
애초에, 어? 히어로가 이렇게 빌런을 옆에 두고 아무것도 안하고 방심하고 있는게 말이 돼?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끝까지 도착했다.
지하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커다란 공간, 그곳에 있는 깨져있는 수조.
"베헤모스...?"
그녀는 그 수조앞에 적힌 글씨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드디어 그녀도 그 괴수의 이름에 대하여 알게 되었구만.
녹색의 끈적한, 수조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깨져있는 컴퓨터와 종이들많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을뿐.
여기서 연구하던 사람들은 다들 미리 도망쳤었나 보다. 참 튀는건 잘해요.
하여튼 이 곳 옆에 있는 방으로도 우리는 가봤다.
천장도 높던, 아까의 그 수조가 있는 곳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넓은 이곳.
이 방의 중간에는, 어떤 인큐베이터 같은게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조그만한 검은 촉수.
하아. 드디어 찾았구만.
이제 이걸 들고 그냥 튀면 된다. 튀면 되는데...
나는 스타더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쓴 채, 구석에 있는 책상에서 자료를 뒤적거리는 모습.
...마음에 안든다.
왜 나한테 관심을 안갖지?
아니, 이게 이상한 뜻이 아니다.
히어로가 빌런을 옆에 두고 저렇게 무방비하게 있는게 맞는거야?
진정한 히어로는 늘 빌런을 경계해야 하는법.
대체 날 뭘믿고 이렇게 자유롭게 행동하게 두는건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겁이 없어?
"...."
안되겠다.
원래라면 그녀가 한눈 판 사이에 베히모스만 챙겨서 도망치려 했는데.
그녀에게 세상의 쓴맛을 좀, 가르쳐주고 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천천히 인큐베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쇼타임이다.
***
"...이건 또 뭐지."
넓은 방 한가운데 있는 인큐베이터를 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 비밀의 연구소 제일 끝에 있는 이 방.
그 안에는, 척 보기에도 수상해보이는 인큐베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검은 촉수.
아마 이게, 한은그룹 이들이 제일 보호하고 싶었던 무언가로 추정된다.
슬쩍 옆을 보니, 에고스틱은 굉장히 흥미로워 보이는 눈길로 그 인큐베이터를 보고 있었다.
"건드리지마라. 저건 일단 협회로 보낼거니까."
"예 예. 당연하죠."
두 손을 위로 들며 아무것도 안할 거라는 듯 방긋 웃는 그.
"...."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아까 방안에서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이 모든 힘을 잃고 무력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붕대를 건네줬으면 건네줬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그.
자신이 모든걸 알고 다리를 부순거지만, 그게 딱히 사람들을 구할려고 한건 아니였다는 그의 말.
자신은 빌런이니, 의심하지말라고 덧붙이던 그의 말.
그 모든게 합쳐져.
그녀는 에고스틱에 대해 더욱, 뭐가 뭔지 모르게되었다.
그는 분명히 빌런이다. 법 위에서 노는 무법자이며 사람들을 상대로 테러를 일으키는 빌런.
그런데 어째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무언가의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걸까.
어째서, 그의 옆에 있으면 묘하게 경계심이 흐려지는 걸까.
'...왜 자꾸 이런 생각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냈다.
일단,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자.
그녀는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여기에 아마 저것에 대한 정보가 있겠지.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저것에 대해 적혀있는 보고서를.
*
《RKCB-001》
[가칭] 베히모스
*
그렇게 그녀가 설명을 읽고 있을 때.
정확히는, 방심하고 있을 때.
에고스틱이 있는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라. 베히모스."
그와 함께 들리는,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갑작스러운 사태에 스타더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나 있었다.
어느새 깨지고 있는 인큐베이터.
그리고 에고스틱의 팔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불길한 무언가.
그 모든 혼란한 상황속에서.
에고스틱 그는, 스타더스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있었다.
그렇게, 웃는 상태 그대로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그.
"스타더스씨. 그거 아세요?"
통수는, 타이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