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1 검은재앙
"눈이 오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마지막 다리 테러를 일으킨 이후, 베헤모스의 한강 다이빙, 줄여서 한강꼴박 이전까지 시간이 꽤 남은 상황.
대략 3월쯤에 일어날 일이니, 그 전까지 나는 놀았다. 뭐. 노는건 좋은거다. 노는게 제일 좋아.
사실 한강꼴박 이전까지 다른 테러 하나 더 일으켜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곰곰히 생각할수록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 애초에 스타더스가 이미 원작시점 3년차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 겨울이라 춥다. 12월달의 마포대교도 추웠는데 지금은 얼마나 춥겠어. 원래 테러도 날이 따뜻할때 하는게 빌런에게도 히어로에게도 좋은 법이다.
그렇게 나는 집에 콕 박혀있었다.
밀린 게임이나 해야지.
집에만 있었어도 애초에 집에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심심할 틈은 없었다. 산골에 있는 대저택에 나, 서은이, 수빈씨, 그리고 하율이 남매까지. 총 다섯명이서 있으니.
남매는 기껏 학교를 보내자 마자 겨울방학이라고 다시 돌아와버렸다. 어라? 이게 대체...
학교 빨리 보내보겠다고 서은이를 달달 볶아 행정기록 조작하고 난리쳤던건 뭐였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서은아.
어쨌든 학교 물도 먹은 차윤이, 그러니까 하율이 남동생은 공부를 더욱 더 열심히 하고있다. 아니, 이제 중1 올라가는 애가 뭐이리 공부를 열심히 한데. 원래 중학생때는 다들 노는거 아니였어?
그렇게 차윤이가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하율이마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는 어차피 치유능력 있으니 공부 안해도 되는데?
뭐, 하율이는 이제 고3이니까 공부 할만도 한가? 뒤늦게 책을 펼치고 수능공부를 하고 있는 하율이를 보면 전생이든 여기든 대한민국 수험생은 어쩔 수없이 공부를 할 운명인가보다. 저런...
고등학생 이후로는 길바닥을 전전하느라 공부를 거의 다 까먹은 하율이를 위해, 수빈씨가 일대일 과외처럼 붙어서 가르쳤다. 그래, 잊고 있었는데 수빈씨는 서울대다. 수능 공부에 관련해서는 우리들중에 제일 잘 안다는 소리.
잠깐, 생각해보니 수빈씨 요즘 너무 바쁘지 않나? 집안일 같은거는 돌아가면서 하니까 그렇다 쳐도, 거기에 추가로 서은이 보조, 애 둘 학습까지 봐주는데. 아니, 사실상 하율이 남매를 홀로 키우고 계시다. 누가보면 저 남매의 엄마인줄 알겠어.
저렇게 다들 바쁘게 살때 나는... 어...
뭐, 난 지금까지 열심히 했잖아? 놀아도 된다고.
물론 계속 놀기만 한건 아니다. 틈틈히 인재(人災), 그러니까 빌런들 영입 계획도 세우고, 일기도 적고...
물론 서은이랑 둘이 누워서 같이 게임한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함께 클리어 한 게임들만 몇십개. 몇몇 어려운 게임은 둘이서 같이 안하면 깰 수가 없더라고.
"오빠! 빨리 패리! 패리해서 저 살려요!"
"오케이. 자! 살렸다."
"휴. 얘만 잡으면 이제 클리어 맞죠?"
그렇게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논것만은 아니고, 눈이 오는 날에는 밖에서 눈싸움도 하고 놀았다. 그때는 하율이 남매랑 수빈씨도 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사람이 너무 집안에만 박혀 있으면 못써, 나가 놀기도 해야지.
"악! 오빠! 이리와요!"
"싫은데? 에베베베."
"아니! 순간이동 하는건 반칙이죠!"
"후흐흐... 힉!"
"수빈씨도 거기 서있지만 말고 같이 노시죠! 에잇!"
"다인씨... 죽었어요..."
나는 그날 수빈씨가 화나면 무섭다는걸 알게 되었다.
오늘의 교훈. 가만히 서있는 수빈씨 얼굴에 눈덩이를 던지지 말자.
남매는 둘이서 돌돌돌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가 산지라 눈이 많이 오네.
눈내리는 산골짜기는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집 옮기길 잘했지. 지하기지보다는 여기가 백배는 나은 것 같다. 애초에 산 깊숙한곳에 있는데다가 주위에 장치도 깔아 놓아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도 않으니 우리들끼리 마음껏 밖에 있어도 되고.
물론 도심으로 갈려면 매번 순간이동 장치를 써야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그정도 수고는 충분히 감수할 만 하다.
그렇게 물흐르듯 크리스마스가 돼서, 기분 전환겸 집에 사람키 2배만한 크리스마스 트리도 놔두어 보고.
그렇게 1월, 2월도 지나며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아니, 노니까 시간이 너무 금방 가는데?
그렇게 물흐르듯 지난 시간.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박혀있으니 살짝 속세를 잊게 된 것 같다. 좋네.
가끔 스타더스가 잡다한 빌런들이랑 싸우는거 팝콘 먹으면서 구경하는게 몇 안되는 이벤트였다. 서은이랑은 다르게, 하율이 남매는 은근 싸우는걸 좋아해서 같이 봤다. 쟤네들은 스타더스를 보기 보다는 살짝 액션영화 보듯이 보는것 같았지만... 아니, 그냥 팝콘 먹는게 좋은건가?
내가 이렇게 잔잔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 망고단 애들은 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내 음해는 계속되지, 나는 또 활동도 안하지.
미안하다, 애들아...! 그래도 곧 광명 찾을 날이 올테니 조금만 기다려!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마침내 3월이 되었다.
차윤이는 중학교에 진학했고, 하율이는 원래 다니던 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올라갔다.
애들이 적응을 잘할까 살짝 걱정했는데, 보니까 다들 친구도 잘 사귀고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둘 다 지하기지가 있는 집 근처에 여고와 공학 중학교에 각각 배정받아,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서은이도 이제 고등학생인데 말이야.
학교 갈 생각은 없니? 라고 살짝 물었더니 자기가 거길 왜 가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컴퓨터 전산망 만지작 거릴 시간도 없다고.
...뭐, 애초에 기대도 안했다. 사실 서은이가 학교 가면 좀 곤란한것도 있고. 서은이가 없으면 내 계획이 다 하자가 생겨요.
3개월이나 같이 지내다보니, 다들 서로서로 많이 친해졌다. 살짝 어색했던 하율이와 서은이도, 이제 언니 동생 하면서 친해진 모습. 역시 시간이 약이지.
어쨌든, 그렇게 3월은 서서히 흘러갔다.
그래.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됐다.
한은그룹의 야심찬 지구정복 프로젝트의 알파이자 오메가. 63빌딩만한 크기의 거대 왕꿈틀이가 튀어나올 날이 다가온다.
원작에선 서울 위쪽 모든 도시를 파괴하고 북한도 때려부쉈던 그놈이, 내가 테러 핑계로 부순 다리 하나 때문에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을 그날이.
아마 내가 원작을 제일 크게 비틀어버릴 이벤트.
피폐물로 돌입하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뀔 날.
그렇게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보냈고.
마침내 어느날.
드디어 그것이, 나타났다.
***
서울, 낮.
한강을 바라보는 도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만의 일을 하고 있는 이곳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평범해 보였다.
그래, 이때까지는.
"...?"
조용하던 도시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진동.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마냥 점 점 땅을 강하게 울리는 진동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렇게 몇십분동안 땅을 울리던 진동.
그리고는 뚝.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갑자기.
한강을 마주보고 있던, 한은그룹 건물의 땅 아래에서.
그 건물을 박살내며,
검은색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검은 탑과도 같았다.
수없이 많은 촉수로 이루어져있는, 검은색 재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땅에서 솟아올라온 이 검은색 무언가는, 그대로 지상에 쿵- 하고 몸을 뉘였다.
마치 건물 사이즈로 확대시킨 지렁이처럼 생긴, 그 덩치만으로도 도시 하나는 박살낼 것처럼 보이는 그것.
갑작스러운 재앙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하고 있을 때.
그것은, 갑작스럽게 소름끼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끄...끼이이이이이에에엙엙엙엙엙...끼이이이익...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긋는 소리처럼.
아기 수백명이 모여서 울부짖는 목소리처럼.
근원적 악의(惡意)가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파열음.
서울 어디서나 들릴 정도로, 소음만으로 근처에 있는 모든 유리를 박살내는 소름끼지게 커다란, 생명체가 낼 수 없을 정도의 주파수를 내는 그것.
현세에 강림한 종말처럼 보이는 그것은, 마치 인간들을 심판하러 온,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재해(災害) 그 자체처럼 보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대한민국의 종말이 다가온걸까.
잠시 소강상태로 있던 그것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앞으로.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수많은 촉수들을 꿈틀거리며.
옆이나 뒤로 가는건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도로를 갈아엎으며, 그것은 그대로 앞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검은 해일처럼 보이는 그것.
몇키로미터 멀리서 봐도 육안으로 보이는 그것은, 앞으로 모든걸 박살내려는 듯 직진했다.
그렇게 앞으로만 직진하려는 놈 쪽에 있던건, 다름아닌 한강.
놈이 가는 그 길목에는 다리가 딱 있었다.
아니, 있었었다. 지금은 없다.
근데 그게 얼마전 어떤 테러범이 박살내는 바람에, 그냥 텅 빈 허공에 강만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무시무시하고, 한국을 멸망시키게 생겼고, 그 어떤 히어로가 나서도 막을수가 없을 것 같던 괴수는 한강으로 그대로 돌격했고.
그대로 물 속으로 빠지더니.
"끼에에에에에엙엙엙엙엙엙!!!!!!!"
갑자기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물이 무슨 산성액이라도 되는 마냥 녹아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끝났다.
".....?"
갑작스럽게 돌아온 평화.
조금전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는 수천만명에게 들리는 끔찍한 소음을 내고, 마치 파괴신처럼 보이는 대재앙이었던 그것은.
그렇게 황당하고 갑작스럽게,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놈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박살 난 건물과 갈아엎어진 땅, 그리고 검은색으로 물들은 한강만이 방금 전까지 여기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증명할 뿐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재앙은 5분만에 등장했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사건 끝. 문제 해결!
"야, 참 쉽다."
소파에 누워 팝콘을 와작거리며 티비로 광경을 보던 나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음, 지방 산골짜기에 있으니까 소리도 안들리고 좋네.
앞으론 지방 집값이 오르지 않을까? 서울은 저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옆에서 나랑 같이 팝콘을 먹고 있던 서은이만, 팝콘을 먹는것도 잊은 채 입을 헤 벌리고 티비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오빠, 방금 큰일날 뻔한거 아니에요?"
음, 저놈 포스가 좀 어마무시하기는 했지.
그래도 뭐, 원작에서도 서울 한강 위쪽이랑 경기도, 북한을 개박살 내는거 빼고 나머지 동네는 별 문제 없었다.
아. 그게 큰일난거구나.
"뭐, 막았으면 됐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할 뿐이었다.
뭐 건물 하나 부서지긴 했는데, 금방 진압됐으니.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았겠지?
***
[시발 방금 뭐 였냐ㆍㅡㄷㄱㅂㄷ]
아니 ㅅㅂ진짜 죽눚ㄱ둘 알았네
종로사는데 저거 ㅅㅂ 왛으며ㆍ 나 그냣 죽늑너 아니였나?
아직도 손발이 ㄱㆍ부들부들 떨리는듸ㅣ어떡하냐
소리 ㅅㅂ 지구가 멸ㄱㅈ망하는줄알았다.
=[댓글]=
[당신을 살려준 망고스틱에게 감사하십시오. 그가 다리를 부수지 않았으면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ㄴ[이왜진?]
***
솔직한 바람으로는 그냥 다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가줬으면 좋겠는데.
나 여기에 엮지 좀 말고.
"어, 오빠. 실시간 트렌드 10위에 에고스틱 진입했어요. 위에는 다 괴물 마포대교 한은그룹 이런거고요."
음, 역시 그럴리가 없겠지?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