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치유
그래.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늘 내가 내 능력이 구리다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따지고보면 꽤 좋은편이다.
염동력은 뭐... 범용성이 워낙 좋고, 순간이동도 히어로를 피하는 나에게 딱 어올리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염동력도 순간이동도 위력 자체는 형편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뭐, 막상 뒷생각 안하면 큰 힘을 낼수도 있다는 강점이 있다. 염동력은 안쓰고 스택을 쌓다가 한번에 풀면 나름 꽤 강한 편이고, 순간이동도 이론상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있다. 그 뒤가 문제기는 하지만.
하여튼, 따지고보면 그렇게까지 썩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래도 쓰레기기는 하지만. 대체 능력 한번 화끈하게 쓰면 며칠간 반동으로 기절해야 되는 초상능력자가 나말고 또 있나?
그리고 이제는 기절을 넘어 각혈까지 하고있다.
"쿨럭."
저번 다리 테러 이후.
하루종일 염동력으로 둥둥 떠있던 것과 막판에 차를 염력으로 멈춘 것, 그리고 장거리 순간이동까지.
또 몸을 혹사시킨 나는 반동으로 3일간 기절했다. 이건 뭐 개복치도 아니고...
물론 이제 기절은 일상이라 이정도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번 부산 호텔에서 쓰러졌을 때는 한 일주일 기절했던가? 그때와 비교하면 짧은 편이기는 하다.
근데 그때도 이렇게 피를 토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아니!!! 오빠!!!! 이거 병원 가서 진단 받아보자니까요?"
"서은아, 병원가서 뭐라 말하게... 염동력 사용 때문에 오장육부가 뒤틀린거 같아요? 미등록 초상능력자로 신고먹고 감방간다."
"그럼 어떡할건데요!! 계속 그렇게 피 토하고 있을거에요?"
"쿨럭, 시간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에혀, 이제 나 알아서 할테니까 들어가서 잠이나 자. 늦었다."
여전히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피는 서은이.
나는 그녀에게 손을 휙휙 흔들며 나가라고 했다.
옆에 티슈로 입가에 피를 닦으면서.
수빈씨도 나를 걱정스럽게 보며, 내일도 이런다면 꼭 대책을 마련해보겠다고 말했다.
거기에 나를 좋아하는 이하율의 남동생, 차윤이. 얘는 거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죽지 말라고 하더라. 요즘 초등학생들은 원래 그렇게 감수성이 풍부한가?
그리고 이하율.
모두가 나를 둘러싸고 있을때, 그녀 혼자 저 멀리 문쪽에서 파리한 안색으로 나를 멀찍히 보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아마 나를 도와줄 수 있음에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는 거겠지.
이하율이 어렸을 때 각성한 치유능력.
그 능력을 알아챈 고아원 원장에 의해 팔려갈 뻔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던 그녀였다.
심지어 원장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자신의 남동생도 모르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그녀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능력을 숨긴걸꺼다. 애초에 내가 그때는 굉장히 수상하기도 했었고.
그러나 시간이 이렇게 지난 지금, 그녀는 나에게 꽤 마음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만났을때는 나한테 계속 반말을 틱틱 내뱉던 그녀였으나, 이제는 존댓말을 하는 모습.
어라, 생각해보니까 이제 우리 집안은 전부 나한테 존댓말을 쓰고 있잖아?
....왠지 가부장적인 사람이 된 것같은 기분인데.
어쨌든 결론은 그녀가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걸로 보인다는거다.
나는 자기한테 집도 밥도 돈도 다 줬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으니.
심지어 이제는 보답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는데 안하고 있으니, 이런 스스로를 자책하는 걸로 보인다.
하긴, 나도 이해한다. 여기서 갑자기 '저 사실 치유 능력 있어요~ 말 안해서 죄송해요~' 이러기도 좀 그렇겠지. 아무리 우리를 좋아해도, 기본적으로 인간 불신이 있으니까.
쩝,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일단 죄책감 스택이나 더 쌓아놓자. 언제가는 스스로 능력 밝히는 날이 오겠지.
그런고로 나는 더 요란하게 각혈했다.
"쿨럭! 쿠우울럭!"
"꺅! 오빠,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병원가요!!"
"맞아요 다인씨, 일단 뭐라도 해야겠네요."
"형 죽으면 안돼 흐아아아아앙."
...근데 어째 다른 이들이 더 난리가 나서 그냥 그만두었다.
사람이 피도 좀 토할수도 있지 왜이렇게 호들갑들이래.
그래도 하율이의 얼굴이 더 거무죽죽 해진건 보니 효과가 좀 있나보다. 어라, 근데 뭔가 양심이 쿡쿡 쑤시네...
하여튼간에 그렇게 주위의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나는 밤이 깊었으니 다들 그만 자라고 방에 돌려보냈다. 이제 몸도 좀 괜찮아지고 각혈도 안하니, 난 혼자 쉬면서 몸조리하겠다고 말하고.
어째 다들 불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괜찮다니까 그래. 그냥 하율이를 좀 더 자극하려고 오바한것도 있다. 나는 힐러가 필요해요.
그렇게 다들 물러난 뒤.
나는 홀로 방안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흠, 수액이라도 좀 맞아야하나.
피로회복장치가 피로 회복에는 참 좋은데 병까지 치료가 되는건 아니라 한계가 있다.
사실 능력 과다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병이라고 치기도 좀 뭐하지만.
하아. 아니, 근데 진짜로 피는 왜 토하는거지? 평소에는 늘 일주일 기절하다가 이번에는 3일만에 일어나서 그런가? 아니면 설마 능력이 퇴화하나?
나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 아니겠지.
....그래도 떨어지는 차 하나 잠깐 멈추는게 얼마나 힘들다고. 애초에 운동량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을텐데.
... 아닌가? 큰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최근에 테러를 하면 할수록 느낀건데, 점점 몸에 무리가 가는거같다. 이제 힘들어.
하긴, 1년에 테러만 4번했는데 몸이 안축나면 더 이상한거긴 하다. 원작의 메인 빌런들중에서도 이렇게 자주 테러를 한 애는 없어!
하긴. 나 혼자서 스타더스가 겪었던 거의 모든 메인 빌런들을 대체하려고 하니까 힘들수밖에 없다. 몸이 10개라도 부족한 샘.
...아무리 생각해봐도 빨리 에고-스쿼드, 그러니까... 빌런연합을 만들어야겠다. 외주를 주고 나는 쉬어야겠어. 나는 그냥 총괄만 하는거지. 테러는 다른 애들 시키고. 몇가지 제약만 걸고 테러하게 시키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가 영입한 능력자들도 무력이 중심이라기 보다는 서포터 위주들이라... 그래, 원작에서 무력도 있고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을만한 애가 누가 있더라...
그렇게 새벽까지 나는 침대에 불끄고 누워서, 잠은 안자고 계속 계획을 구상만 했다.
아니 3일간 기절해있다가 막 깨어났는데, 다시 침대에 눕는다고 잠이 오겠냐고.
그렇게 누워서 빅픽쳐를 구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삐꺽-.
내 방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일어나볼까 했으나, 일단은 그냥 계속 자는척 누워있어 보기로 했다. 상대가 이 새벽에 내가 깨어있을걸 상정하고 들어오지는 않았을거 같거든.
살금 살금. 누군가 내 침대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대체 누구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살짝 눈을 떠봤다.
어두운 방안에 보이는 작은 인영.
실루엣만 보이지만, 우리 집에 키가 저정도인 사람은... 하율이밖에 없는거 같은데.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길래, 다시 황급히 눈을 감았다.
이내, 숨소리가 내 코앞에서 들려왔고.
잠시 그렇게 그녀는 내 침대 앞에 서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저씨, 자요?"
응 안자.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냥 입을 꾹 닫고 아무것도 못들은척, 계속 자는 척 누워있었다.
이내 잠시 나의 대답을 기다리더니, 내가 미동도 없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녀.
그러더니, 갑자기 내 몸 쪽에 두 손을 나란히 올렸다. 뭐야.
이어서,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하는 그녀.
"아저씨. 죄송해요. 능력이 있는데도 숨겨서..."
"저희 남매를 도와준 아저씨에게 정말 감사하고, 또 좋아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이렇게 이기적이고 사람을 못믿는 애라, 죄송해요. 아저씨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도움 받아놓고는, 이거 하나 못해주는 년이라 죄송해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고해성사를 시작하는 그녀.
아니, 야. 왜 그래. 새벽 감성에 젖어서 이러는거야? 정신차려 임마!
이러지 말리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지금 공식적으로는 자고 있는걸로 알려진 상태. 입을 열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까전의 각혈이 효과가 너무 좋았나보다. 내가 무슨 거의 다 죽어가는걸로 보였나?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풍에 나도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얘 대체 왜 갑자기 혼자 땅굴파면서 자책하는거야.
이제는 심지어 옆에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
야, 우냐? 울지마! 내가 미안해...
이러니까 괜히 내가 못난 어른이 된것 같다. 여고생을 울리는 쓰레기가 된듯한 기분이야..
잠시 훌쩍이던 그녀는, 코를 한번 흥 하더니, 내 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속삭였다.
"그래도, 제가 제 능력은 고백할 수는 없지만... 뒤에서라도, 도와드릴게요. 꼭."
그렇게 살짝 결연한 의지로 조용히 말한 그녀.
그러더니, 갑자기 내 몸을 붙잡은 그녀의 손쪽에서 작은 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그녀와 살이 맞닿은 곳을 기준으로 몸 안에 들어오는, 따뜻한 기운.
무언가 몽실몽실 하면서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듯한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몸 구석까지 따뜻한 기운이 맴돌던 때, 그녀는 이윽고 손을 땠다.
오랜시간 붙어있던 손이 내 몸에서 때어졌고.
살짝 헐떡이던 그녀는, 다시 일어나더니 흘러내린 땀을 닦듯 얼굴을 문지르는 듯 했다.
"하아... 이렇게 밖에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그래도... 늘 감사해요 아저씨."
그렇게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비로소 방 밖으로 나갔다.
문앞에서 살짝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비로소 문이 닫혔고.
이내 복도의 발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눈을 떴다.
"어우..."
몸을 일으켜서 팔을 휘둘러봤다.
분명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듯 골골거리던 몸이, 갑자기 활력을 되찾은듯 힘이 넘치는 모습.
속이 뒤틀리던 고통은 어디가고, 다시 쌩쌩해졌다.
"하율아..."
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율이를 영입한건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지금 몸의 컨디션은, 최악에서 갑작스럽게 올해 중 제일 상태가 되었다!
"고맙다...!!"
이제 그냥 몸을 막 굴려도 되겠어!
애가 오늘보니 살짝 감정과잉인거 빼고는 참 좋은 애인 것 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