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 탈주각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호랑이 굴에서 엎어져 울기만하면 그냥 호랑이의 런치세트가 될 뿐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탈출루트를 짜면 성공적으로 도주할 수 있는 확률도 있다는 소리.
지금도 그렇다.
A급 히어로 3명한테 둘러싸였다고 엉엉 울면 어떻게 되겠나. 그냥 두들겨맞고 끌려가겠지.
하지만, 여기서 정신을 차리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리다.
서로가 가진 정보의 차이에서 오는 상하관계.
나는 그걸 이용하기로 한거다.
나는 저들을 안다, 그런데 저들은 나를 모른다.
이거, 아주 중요한거다.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거라고.
현재 상황을 보자.
테러집단은 전부 사망했고, 그 수장도 섀도우워커가 손쉽게 제압했다. 손도 발도 입도 묶에 미라처럼 땅바닥에 박혀있다고.
이렇게만 보면 아무 문제도 없지만, 문제는 나다.
혼자 몽키스패너를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죽여버린걸로 보이는 미친놈.
여기서 한가지 재밌는점은.
저들은 나를 함부로 건들 수 없다는 점이다.
저들은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른다.
저들은 아직 내 힘을 모른다.
대충 쓰러진 테러리스트들을 보고, 대략적으로 매우 강하다고 추측할 뿐.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는 소리다.
그리고 미지는, 공포를 일으킬 수 있다. 내가 생각보다 훨씬 쎄다면? 손가락 튕기는걸로 이자리 모두를 없앨수 있다면?
또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인질들이 있다.
내가 수틀려서 인질들을 갑자기 죽이려고 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내가 히어로인지 빌런인지 그냥 미친놈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결론은.
저들은 나를 아직 건들 수 없다. 내 힘을 정확히 모르고, 인질들도 있기에.
그러니까 내가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있다 이말이지.
"요즘 것들은 정말로 싸가지가 없구나. 나때는 말이다, 자신보다 높은 랭크의 히어로가 지나가면 90도로 허리부터 숙였다. 그런게 사회생활이고 예의라는거다. 그런데 쌩판 어린놈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니... 참, 말세다 말세. 비록 내가 지금은 어, 해외에서 활동하기는 하지만 S급 히어로라고 밝혔으면 바로바로 알아서 존대를 해야지 어디서 반말을 찍찍하고..."
"저기요."
내가 아무말 대잔치를 늘어놓고 있을 때, 듣고있던 스타더스가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방금 협회한테 연락이 왔는데, 해외에도 애플망고라는 이름을 가진 S급 히어로는 없다는데요? 당신 정체가 뭡니까?"
음, 언제 또 협회랑 연결했데.
아 쟤네 전부 귀에 협회장이랑 다이렉트로 연결된 이어폰 꽂고있지.
일류악당은 이런 일에 당황하지 않는다.
손 움직이냐? 됐다, 이제는 손도 움직인다. 조금만 더 버티면 순간이동도 되겠어.
나는 주먹을 말아서 팔걸이에다가 쾅-하고 치며 입을 열었다. 일류악당은 듣는이의 정신도 흔들어버려야하는 법. 다시 한번 뇌절을 감행했다.
"이런 싸가지없는 놈들을 봤나. 당연히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니까 모르겠지. 개인정보가 함부로 유출될 것 같으냐? 의심만 많아가지고는... 그리고 너네 협회장, 어! 내가 너네 협회장이랑 어 밥도먹고 술도 마시고 사우나도 가고 다했어 임마!"
그 말을 들은 셋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음, 이건 너무 무리수였나. 생각해보니 젊어보이는 내가 아재인 협회장이랑 사우나를 갈리가 없잖아? 애초에 협회장이 부정할테고.
아무말 대잔치여도 너무 아무말이었다. 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덧붙였다.
"...아, 그리고 너네 이거 알고있냐. 협회장 이름이 박준호지? 그거 개명한거다. 원래 이름은 박막춘이다. 우리 막춘이, 자기 이름 싫다고 맨날 징징거리더니 은근슬쩍 바꿨더라? 귀여워 귀여워."
내 말을 듣던 스타더스가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듣더니 움찔했다. 그래, 이걸 알줄은 몰랐겠지? 원작에서도 정말 세상 쓸때없는 TMI로 나오는 내용인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잠시 주제를 벗어난 때 아닌 협회장 개명 전 이름 폭로로 시간을 조금 더 벌었다. 좋아.
그러기도 잠시, 북해빙녀가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애초에 증거도 뭐도 안주고 갑자기 S급 히어로라고 말하는게 말이돼?....요? 제가 보기에는 당신도 빌런처럼 보이거든요..."
말을 흐리는 그녀.
아니, 이 말을 다 들어줬다고? 참 착한애네. 이미 스타더스랑 섀도우워커는 그냥 듣지도 않고 내가 과연 어디까지 가나 보자 이런 태도인데. 살짝 손주재롱잔치 보는 할아버지 같이 나를 보고 있다. 나도 내가 뇌절하는거 아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줘.
그리고 너 말 잘했다. 시발, 뇌절의 끝은 선정. 선정필승. 정색 먼저하면 이긴다는 소리다.
"빌런? 내가?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적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는 나.
방금전까지 진지하게 아무말 대잔치 하자가 이러니, 무언가 더 소름끼치는 느낌....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하고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뚝.
갑작스럽게 웃음을 멈춘다.
허공을 보며 웃던 내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고개를 위로 올려, 목소리를 깔고.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듯 고요히 말했다.
"내가 빌런이었으면."
"너희는 전부, 이 자리에서 이미 죽었다."
꼭대기 위에서 손을 얼굴에 괸 채, 선포하듯 내리어지는 나의 말. 시발. 좀 오글거리지만 참았다.
갑작스럽게 하는 위협에 인질들은 긴장하고, 스타더스와 북해빙녀도 몸을 전투태세로 변경했다. 인질들을 지키며 싸울수 있게.
그리고 섀도우워커 저놈은... 그냥 멍때리고 있다. 아무생각 없어보이네. 하긴, 저놈은 밤이라 죽지도 않으니 별로 긴장도 안되겠지.
방금전까지의 분위기가 거짓말같다는듯,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된 이곳.
모두가 침을 삼킨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전투를 대비하며 몸을 긴장시킬 때.
나는 갑작스럽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휘 털었다.
"하하. 농담이다 농담. 내가 설마 후배들을 겁박하겠나. 긴장 풀게."
갑작스럽게 휙휙 바뀌는 나의 분위기에, 아직까지 정신을 못차리는 둘. 원래 뇌절은 올렸다 내렸다해서 정신을 못차리게 해야돼.
그때 멍하니 나를 구경만 하고 있던 섀도우워커가, 자기 이어폰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공격이나 하지? 어차피 우리 셋이 달려들면 질거 같지가 않은데. 일단 쓰러트리고 생각해보자고. 만약 진짜 히어로라면 그때가서 사과하면 되지."
야 이 새끼야 다들린다 다들려.
이어폰으로 섀도우워커가 전달한 말을 들은 북해빙녀는 신나가지고 고개를 끄덕였고, 스타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인질들이 말려들까봐 그런거겠지. 크흑, 역시 스타더스 너밖에 없구나.
나는 필사적으로 못들은 척 했다. 아니, 여기서 들은거처럼 굴면 큰일난다. 저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내 '정체를 숨긴 오만한 S급 히어로' 컨셉이 와르르 붕괴될거라고. 근데 그렇다고 발끈해서 싸우면? 아니, 사실 싸우는 것도 아니지. 발끈해서 전투가 벌어졌다가는 5초안에 폭행당하고 질질 끌려가고 말거다. 그것만은 안돼....!!
근데 사실 지금 이미 슬슬 힘이 돌아오고 있다. 꽤 오래 시간을 끌었거든. 좋아, 이제 대충 탈주각이 나왔다. 튀자.
근데 가기전에.
음...
모처럼 선배 히어로 컨셉을 잡은 김에, 하고싶은 말은 하고 갈까?
크흠-하고 헛기침을 한 나는, 이목이 집중된 틈을 타 빠르게 할말을 했다.
"어쨌든, 후배 히어로들을 보니까 반가웠다. 좀 싸가지가 없기는 하지만... 내가 선배로써 충고를 해주자면, 위협을 만났을때 도망가지 말고 맞써 싸워라. 아무리 큰, 너네가 이길 수 없어보이는 고난과 역경을 만나도 물러서지 마라. 너네는 히어로다. 히어로는 도망치지 않으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 재앙? 재해? 다 의미없다. 의지만 있다면, 너네에게 의지만 있다면. 그걸 극복하는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고개를 돌려가며 말하다가, 마지막 말은 스타더스를 보며 말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라는? 떠는?그녀. 흠. 갑작스러운 나의 설교에 내가 혹시 진짜 히어로인지 의심할려는 걸려나? 좋은 일이다. 아니면 그냥 병신이라고 생각하던가. 쯥.
그리고 더 좋은 일은 나한테 지금 힘이 돌아왔다는거고.
자, 작별의 시간이다.
다른말로는 탈주각이다 탈주각.
"뭐, 나는 할일을 다했으니. 이만 가겠다. 잘있어라. 아디오스."
그렇게 말하며 손을 살짝 깔딱여주고, 갑자기 순간이동했다.
내가 사라지자 굉장히 당황하는..? 사실 별로 당황하는거 같지도 않은거 같은데, 기분탓이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서은이랑 수빈씨 뒤에 서있었다.
"흡."
그리고 둘을 잡고 다시 차로 순간이동했나. 정말 빠르게 움직였기에 아무도 못봤을거다. 아마도.
"꺄아아악!"
우당탕.
차로 겨우 순간이동한 나.
근데 막판에 힘이 쭈욱 빠지는 바람에, 우리 셋은 차에 굴러지듯 오게 되었다. 미안, 지금 거의 젖먹던 힘으로 온거다...
"아으으... 오빠, 괜찮아요?"
"아니.... 나 죽겠다...."
실제로 죽겠다.
지금 의식이 나갈려고 하고 있어. 이거 지금 최소한 일주일은 기절 각이다. 좇됐구나.
쓰러지기 전에, 나는 마지막 유언...이 아니라 메세지를 남겼다.
"으윽... 서은아, 지금 당장 호텔 기록같은거나 다 지워라. 시시티비랑 출입명부 이런거. 우리 들키면 좇된다..."
"네!"
뒷자석에 쓰러지듯 누운 나는 아까전에 옮겨놨던 노트북을 서은이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그리고 수빈씨... 운전해서 빨리 서울로 올라가주세요. 지금 테러때문에 주위가 개판이라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겁니다. 재빨리..."
협회 병신들이 주변방위를 철저히 했을리가 없다.
오히려 난장판이겠지. 이 새끼들 만화볼때는 그러는거 보고 쌍욕을 했는데 이럴때는 은근 큰 도움이 되는구나. 고맙다!
"네, 넷!"
수빈씨는 허둥거리며 핸들을 잡았다.
그래, 내가 할 일은 다했다.
이제 의식이 점점 나간다....
지금은 피로회복캡슐도 뭐도 없다. 한마디로 좇됐다는 소리.
"전, 좀, 자겠습니다. 그럼..."
거기까지 말하고 한계에 몰린 내 의식은 결국 끊어졌다.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그래도 어째 S급 히어로 애플망고라는 해괴한 컨셉으로 정체를 들키지 않고 넘긴것 같다는 생각.
단순히 시간벌라고 한 개지랄이 이런 의외의 효과가 있었을 줄이야.
그래, 이제는 안심하고 잘 수 있겠어...
***
[[단독]자칭 S급 히어로 애플망고, 그의 정체는 빌런 에고스틱이라는 의혹 확산... 협회, '그럴 가능성 유력하나 일단은 사실관계 확인중' 이라는 조심스러운 입장밝혀....네티즌들은 이미 '반쯤 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