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여행을 떠나요
"자, 가자!"
예전에 산 SUV를 타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부산.
서은이가 바다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이번 기회에 보러 가기로 했다.
"오빠, 지금이라도 KTX타고 가면 안돼요?"
뒷자석에 앉은 서은이가 투덜댔다.
"서은아, 너 뒤에 트렁크에 있는 자루 보이지? 저게 다 총이랑 그런건데, 저걸 들고 어떻게 기차를 타겠니?"
"나 참... 거기 얼마나 있는다고. 2박 3일인데 뭘 이렇게 챙겼어요?"
서은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뒤에서 자루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애가 운전하는데 위험하게 뭘하는거람.
"오빠, 이 마스크는 뭐에요? 처음보는건데?
서은이는 자루 안에서 가면을 꺼냈다.
내가 원래 쓰던 얼굴의 반만 가리는 가면이 아닌,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
"거기가서 뭔 일이 터질 줄 모르잖니. 혹시 모르니까 얼굴 가릴거 챙겨가야지."
내 말에 옆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수빈씨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인식저해 하고 오신거 아니에요?"
"아, 전 안했어요. 저랑 서은이는 대중한테 얼굴이 노출된적이 아직 없어서."
"아..."
수빈씨는 말끝을 흐렸다.
잠깐, 생각해보니까 여기서 유일하게 인식저해를 하고 여행온게 수빈씨구나.
그리고 수빈씨 얼굴을 대중에 생중계 때린게 나였고.
음.
이 얘기는 그만하자. 미안하니까...
뒤에서 서은이만 아무생각 없이 폰을 보며 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어서 좋겠구나.
그렇게 우리는 부산으로 달려갔다.
운전 5시간하니까 몹시 힘들구만...
***
"바다다!"
해운대에 왔다.
서은이가 좋아하니까 좋구만.
애는 뛰어 놀라고 하고, 나는 돗자리 깔고 파라솔 아래 앉았다.
서있는 것도 힘들어. 좀 앉아있어야돼.
옆자리에 와서 앉은 수빈씨는 음료수같은걸 두개 사서 나에게 하나 건내주었다.
해는 쨍쨍하고, 바닷가에 사람도 많지 않으니 좋구만.
이래서 여행은 평일에 다녀야 해.
옆에 앉은 수빈씨는 빨대로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더니,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보내며 내게 말했다.
"저도 바다는... 아주 어렸을적에 마지막으로 보고는 오랜만에 보네요."
"저도 오랜만에 봐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처음 보는것 같다.
물론 바다야 그냥 바다기는 한데... 그래도 보면 뭔가 속이 뻥 뚫리는게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처리한 빌런만 4명.
저지른 테러만 3개.
너무 바쁘게 살았구만.
난장판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푹 쉬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다인씨에게는, 늘 감사하고 있어요."
내가 그렇게 바다를 보며... 뭐라고 해야되지? 바다멍? 물멍?을 하고 있을 때.
수빈씨가 옆에서 조용히 말을 건냈다.
"감사요? 뭘요?"
"그냥... 모든게요. 처음에 안죽이고 살려주신것도 고맙고... 잘 대해주시는 것도 고맙고..."
"하하, 무슨 소리세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운게 많죠. 늘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시고, 서은이 보좌까지 해주시는데."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수빈씨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이 분위기 뭐야?
이거 혹시 무슨 플래그야?
만화보면 이런 말 한 사람은 꼭 다음권에서 죽거나 배신때리던데?
나 무서워!
내가 갑자기 왜그러냐 묻기도 전에, 바다를 구경하러 홀로 뛰어갔던 서은이가 되돌아왔다.
"벌써 돌아왔네? 다봤어?"
"네. 아니 뭐 자꾸 봐보니까 게임에서 많이 본 바다랑 큰 차이도 없고. 뭔가 익숙한 느낌이네요 그냥."
세상에.
게임에서 바다를 많이 봤다고 해서 처음 본 바다가 익숙하다니.
이건... 게임의 순기능인가 악영향인가?
잘 모르겠지만 넌 돌아가면 게임 좀 통제해야 될 것같다.
"그래도 맨발로 모래사장 밟는건 신선했어요. 별점 5점만점에 3점정도?"
...해수욕장 와서 별점 매기는 애는 처음보네.
근데 심지어 짜! 한 4점은 주지!
"그럼 우리 밥이나 먹을까요?"
그럽시다.
***
우리는 국밥집에 왔다.
부산하면 또 국밥이지.
"오빠, 여기 깍두기 국물을 국밥에 부어먹으라고 적혀있는데, 진짜에요?"
"음... 너 그렇게 먹고싶으면 그렇게 먹어라."
난 싫어.
서은이는 기어코 깍두기 국물을 국밥에 부어먹었다. 대체 왜 그런짓을?
"먹을만 하네요."
의외로 서은이는 먹을만 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런가? 취향차이인가.
뭐, 잘먹는걸 보니까 좋네.
사람이 맨날 집에서 집밥만 먹는거 보다는, 이렇게 뚝배기 후후 불어가며 먹는 것도 가끔씩 해줘야된다.
여기 국밥은 고기도 많이 들어가있네, 좋아.
국밥집 벽에 걸려있는 티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협회는 A급 빌런 에고스틱에 대한 규탄성명을 발표하면서, '그를 잡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범인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정보통신망 조작에 능하다는 점 때문에 수사에 차질이 빚고 있다고 합니다. 네티즌들은 '에고스틱 무섭다', '스타더스VS에고스틱 싸움 봤냐? 진짜 전설이다...'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딱 하필 내 얘기 하고 있었네. 근데 여기 뉴스는 어째 좀 이상한 것 같다...?
내가 깍두기를 우물거리며 화면에 나오는 내 얼굴을 보고 있을 때, 앞에서 밥을 먹던 서은이가 내게 물었다.
"오빠, 근데 왜 오빠는 자기 이름을 에고스틱으로 지었어요?"
나는 순간 깍두기가 코로 나올 뻔했다.
얘가 지금 사람 많은데서 큰소리로 무슨 얘기를 하는거야!
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니, 다행히 다들 이쪽에 큰 관심은 없어보였다.
내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서은이를 바라보자, 서은이는 뭘보냐는듯 보다가 '아!'하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걱정하지 마요. 저번에 오빠가 뭐라뭐라 해서 소음차단기 만들어서 갖고왔어요."
그러더니 책상위에 놓은건 마치 조그마한 무전기처럼 생긴 무언가.
"이게 뭔데?"
내가 조심스래 묻자 서은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안들리게 해주는거에요."
"오? 이런건 또 언제 만들었어?"
"저번에 오빠가 사람많은데서 신분관련된 말 하지 말라길래, 집에서 설계도 뒤져보니까 나오더라고요. 한은그룹 얘들이 없는게 없더라고요."
"신기하네."
"그래서 오빠, 왜 이름을 에고스틱으로 지은거에요?"
서은이가 짖궃게 웃으며 나한테 물었다. 아니, 이거 저번에도 묻지 않았나?
"이기적인을 뜻하는 에고이스틱(Egoistic)에서 따온거라니까. 아니, 들으면 딱 떠오르지 않나?"
"아니요, 그냥 스틱(Stick)붙인거 같은데... 근데 거기서 중간에 이는 왜 뺀거에요?"
"왜 뺐냐고? 그냥... 뺐는데?"
스타더스트도 스타더스로 줄였는데.
에고이스틱을 에고스틱으로 못줄일건 뭔가.
"또 스타더스... 솔직히 스타더스도 왜 뒤에 트를 뺀건지 모르겠는데... 차라리 오빠도 뒤에 틱만빼서 에고이스라고 하지 그랬어요? 이게 훨씬 나은데."
"제가 이름 정할때 같이 있었으면 더 좋게 해줄수 있었을거 같은데, 안타깝네요."
옆에서 조용히 밥을 먹던 수빈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꾸 이러면 아예 이름 망고스틱으로 바꾼다. 다음 테러때 카메라 앞에서 망고스틱의 망고쇼에 온걸 환영합니다 이럴거야."
"그건 귀여운것 같은데요? 전 찬성!"
서은이가 밝게 웃으며 말하자 내 가슴이 찢어졌다.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티비속 뉴스는 내 얘기를 끝내고 다음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A급 히어로 섀도우워커가 현재 쓰러졌다고 합니다. 협회는 '특수활동을 위해 낮에 너무 과도한 능력을 사용한 것이 원인'이라고 밝히며, 조속히 치료를 완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네티즌들은 '협회의 무능이 두렵다' '꾀병 아니냐' '협회장은 안보공백을 책임지고 사퇴하라'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니, 쟤는 왜 갑자기 쓰러진거야?"
나는 황망히 티비를 바라보았다. 설마 스타더스 제주도까지 왔다갔다 해준거 그거 때문에 저렇게 된건 아니겠지? 그거 때문이라면 좀 미안해지는데...
[스타더스의 팬카페, '별먼지단'의 회원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저번의 비행기 사건 이후로 창설된 이 카페는, 며칠만에 단숨히 10만 회원자를 돌파했습니다. 대한민국에 히어로의 팬카페가 생긴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오!"
나는 밥을 먹다가 말고 티비에 집중했다.
그래, 믿고 있었다고! 역시 내가 개처럼 구른게 효과가 있구만!
"...오빠 팬카페 생겼을때보다 더 좋아하네요. 참나. 누가보면 오빠가 스타더스 아빠인줄 알겠어."
앞에서 밥을 먹던 서은이가 나한테 툴툴댔다. 음, 너무 대놓고 좋아했나?
[다른 속보입니다. 전문가들이 에고스틱의 저번 비행기사태에 '폭탄이 터지지 않은것 같다'라는 감식결과를 발표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기체는 바다에 침몰해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자료를 토대로 판단했을때 폭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했습니다. 현재 가라앉은 비행기를 인양하고 있으며 자세한 결과가 나오는대로...]
"아니 시발 저거는 어떻게 안거야."
세상이 날 억까해.
"오빠, 그냥 이제 포기해요. 지금 실시간 트렌드 1위가 '#망고스틱_믿고_있었다구' 던데요?"
서은이가 끔찍한 진실을 폰으로 띄워 나에게 보여줬다.
아니야, 이런게 현실일리가 없어..
"아니 잠깐. 폭탄을 터트리던 안터트리던 일단 추락시킨거는 맞는데, 나를 커버쳐주는 사람들이 남아있다고?"
"이 사람들 말로는 오빠가 다 큰그림을 그렸을거라는데요? 결국 이번에도 민간인 피해가 없었지 않냐고 주장하네요. 망고단들 지지가 엄청난데요?"
"아니, 그게 말이 돼?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저도 신기해요. 다들 단체로 약먹었나? 비정상적인 지지세인데요? 이거 봐봐요."
"뭔데?"
나는 서은이한테 폰을 받았다.
===
[망고스틱 <--- 믿고 있었으면 개추ㅋㅋㅋㅋㅋ]
일단 나부터ㅋㅋㅋㅋㅋ
[추천]1355 [비추천]32
[ㄹㅇㅋㅋ 아직도 안믿던 새끼 없지?]
[왜 폭탄 안썼겠어 다 살리려고 그런거지ㅋㅋㅋㅋ]
[큰그림 ㅇㅈ합니다]
===
"서은아... 대체 이런 글은 어디서..."
"다인씨, 이거 봐봐요. 제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에요."
"그건 또 뭐죠...?'
===
[글쓴이]익명
[제목]비행기 승객들 인터뷰 떴다!!
(기자)어떠셨나요?
(승객1)어우 무서웠죠. 무서웠는데, 내리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의미있던 경험인 것 같았어요. 삶의 소중함을 상기하게 됐달까? 조금 무서운 롤러코스터 탄 느낌?
(승객2)나름 재밌었던거 같아요. 마지막에 추락할때는 아찔하더라고요. 근데 뭐, 결국 제주도에 도착은 정상적으로 했어서 잘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롤러ㅋㅋㅋ코스터ㅋㅋㅋㅋ
[익명1]승객들 다 깡 좋네ㄷㄷ
[익명2]상남자의 나라 대한민국
[익명3]ㄹㅇㅋㅋ 롤러코스터 타고 쫄아서 떨면 안돼지ㅋㅋㅋ
ㄴ[익명4]롤러코스터ㅇㅈㄹㅋㅋㅋ
===
내 감상은 담백했다.
"진짜 세상이 미쳐돌아가네."
말세다 말세.
*
그렇게 밥을 다 먹은 우리는, 후에 이곳저곳 구경다녔다.
국제시장도 가보고, 다른 맛집도 들려보고.
재밌게 놀다보니 어느새 밤.
"서은아, 우리 호텔은 예약 해둔거야?"
"당연하죠! 5성급 호텔 예약해놨어요."
"오, 이름이 뭔데?"
"시그니쳐 호텔이라는데요?"
"그래?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부산에서 제일 크고 유명하고 비싼 호텔이에요! 예약하기도 힘들었어요."
"그래, 잘했다. 빨리 가서 쉬자."
난 너무 지쳤어요 땡벌.
하, 가서 푹 쉬고 자야지.
그래도 맨날 테러만 하고 다니다가 오랜만에 푹 쉬니까 좋네.
당분간은 아무일 없겠지?
***
어두운 공간.
총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일제히 늘어서 있었다.
그 앞에 선, 대장격으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밤. 우리는 부산을 공습한다. 알겠나?"
""예!!!""
"우리 부대가 공습하는 곳이 어디라고 했나아!!"
""부산 시그니쳐 호텔이라고 했습니다아앜!!!!""
장병들의 고함소리가 그곳을 가득 매웠다.
***
음.
아무일 없는거 맞겠지?
"뭔가 불안한데..."
"오빠,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빨리 와요."
"알았다..."
그래. 뭔일 일어난다 해도 적어도 그게 오늘은 아니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