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K-빌런
"그아아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악어놈.
독가스를 마시고, 취한 듯 비틀거리더니.
결국 쿵-.
쓰러지고 말았다.
"...."
그러고 나서 안 움직이는걸 보니.
음, 죽었나?
등장과는 다른 허무한 퇴장이었다.
너무 상성이 좋은 공격이기는 했지.
"...네! 여러분, 이렇게 또 한명이 지옥으로 갔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망고스틱!]
[요즘 빌런 특) 다른 빌런들이 와서 테러하면 대신 해치워줌]
[히어로협회는 망고스틱을 당장 히어로로 지정해라. 3216번 말했다.]
[아ㅋㅋ 벌써 오늘 9시 뉴스 헤드라인이 보이네ㅋㅋㅋ]
[이제 유튜브에 국뽕티비들 영상 ㅈㄴ올라올듯ㅋㅋㅋ]
또 나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채팅창.
나야 스타더스가 이 사건으로 얼굴 팔리고 피폐물을 찍기 시작할까 봐 대신 나선 거지만, 그걸 모르는 시청자들은 나를 찬양하기 바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스타더스를 위해 나선겁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말했다가는 바로 오늘 밤에 연예가중계에 열애설 시즌2로 얼굴을 비추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정해진 건 바로 하나, 우기기다.
아무튼, 저놈이 먼저 나한테 시비 건 바람에 꼴 받아서 죽인 거라고.
"어허... 여러분. 제가 뭐 이놈을 딱히 공익을 위해 해치운 거는 아닙니다. 다만 이놈이 저를 공개적으로 모욕했기에 처리했을 뿐이죠. 제가 여러분을 위해 나선거겠습니까? 저번의 제 추종자들이 모였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둘 다 제가 정한 선을 넘겼기에 족친거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나는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예예 그러시겠죠ㅋㅋㅋ]
[지금까지 빌런 에고스틱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히어로 망고스틱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츤데레인wwwww]
물론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시청자들이 아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그런 채팅창을 보며 그저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너희, 과연 다음 달에도 그럴 수 있을까?
"흠... 일단, 빨리 누구든지 와서 저 독가스 좀 치우는 게 좋겠네요. 어떻게 치울진 저도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뭉개뭉개 피어오른 독가스들 사이에서 크로커다일맨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죽었을려나? 뭐, 웬만하면 죽었겠지 뭐.
나는 보따리를 뒤적여 방독면을 찾은 뒤 썼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준비성이 좋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약해서 저 독가스 마시면 죽는다고.
대충 매고온 보따리에 가져온 총기를 바리바리 다시 집어넣었다. 사실 염동력으로 넣는 게 보기에 멋지기는 한데, 이제 몸이 한계다. 더 이상 염동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오늘 내가 고생을 얼마나 했는가? 서은이랑 수빈씨 내려놓고 집에서 여기까지 왕복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이게 진짜 쉬운 게 아니다. 체력이 방전되기 직전이라고. 거기에 저 악어놈과 싸운다고 또 순간이동 계속했다.
그 결과 내 몸이 입장보고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한 번만 더 능력을 사용할 경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꺼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염동력 좀만 쓰다 보면 그대로 픽 쓰러진 후 눈떠보니 동부 초상 능력자 구치소, 일명 이스트 카르케리스(East Carcer)에서 눈을 뜰수도 있다. 사실 거기 들어가도 서은이가 우당탕탕 구출시켜 주면 되기는 한데... 아직은 들어갈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삭줍는 여인들처럼 내 손으로 총을 하나하나 들어 보따리에 넣는 중이라는 거다. 아, 힘들어.
[ㅋㅋㅋㅋㅋ아니 아까는 거의 날아다니더니 저거는 왜 손으로 하나하나 집고있는 거냐]
[ㄹㅇㅋㅋ 뭐 하는건지 잘 모르겠네]
조용히 해라 이것들아.
너희들은 모르는 깊은 속사정이 있으니까...
그렇게 거의 모든 총을 집어넣을 때쯤.
저 멀리 하늘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금발 머리를 흩날리며 날아온 그녀는 스타더스.
굉장히 급하게 날아왔는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헉... 헉..."
날아오자마자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옥상에서 쓰러져 있는 크로코다일맨을 먼저 보고, 그 다음으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날아오고 나서야 상황이 끝났다는 걸 안 걸까. 다시금 악어놈이 쓰러져 있는 곳을 바라본 그녀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너가 쓰러트린 거냐?"
"네, 맞습니다. 제가 쓰러트렸죠."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딱히 부정할 이유가 없거든.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치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그런 모습.
"....왜지?"
"뭐, 저는 그저 편하게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에서 어떤 괴한이 깽판 치는걸 보여주더라고요? 막 스타더스도 부르고 하길래 요즘 우리 스타씨 인기 많아졌구나~ 이러면서 팝콘을 뜯고 있었는데, 글쎄 저를 언급하지 뭡니까? 제가 뭐 당신이랑 물고 빤다나 뭐라나. 기분이 좀 나빠지더라고요? 제가 뭘 했다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사전에 따르면, 저를 언급하며 장난질 한 놈은 좀 교육을 해 줘야 합니다. 본보기도 보일겸, 좀 갖고 놀아줬죠."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런 이유였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나같은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한 모양.
그래. 이거면 됐다. 여기까지 했으면 이제 그만 난 집으로 가도 된다. 가도 되는데.
쓰읍.
이걸 말할까 말까.
나는 살짝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은 빨랐다.
그래, 말하자.
언젠가는 내가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나는 잠시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음소거했다.
이제 내가 하는 말을, 그녀를 뺀 누구도 들을 수 없겠지.
카메라를 등지고 선 나는, 그녀에게만 들리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음소거 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앞으로 다시는 오늘처럼 그냥 얼굴 까고 나설까- 라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하는 순간 인생이 굉장히 고달파 질겁니다."
내가 던진 말에 그녀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그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카메라의 음소거를 해제할 뿐이었다.
"자! 그럼 제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갑작스럽게 계획도 없이 나서느라, 굉장히 피곤하네요. 다음달에 큰거 오니까, 그거나 기대해 주시고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안녕~."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인사도 하고 손도 흔들어 주었다. 이 정도면 거의 프로 방송인 아닐까?
"잠깐!....."
등 뒤로 들리는 그녀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나는 집까지 순간이동했다. 물론 그전에 방송은 종료하고.
[에바(에고스틱 바이라는 뜻~)]
[에바? 에반데...]
[오방알]
[오늘 방송 알찼다]
[아니 방금 음소거 된 거 같은데 뭐지??]
[헉...둘의 비밀의 커뮤니케이션...]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탁.
저 서울 어딘가 지하 깊은 곳에 온 나.
순간이동으로 집에 오자마자 내가 한 것은.
"쿨럭."
피를 토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진 나. 아, 시발. 죽겠네.
"쿨럭, 쿨럭."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붙잡고, 나는 계속 피를 토했다.
아, 이대로 설마 죽는 건가?
너무 무리했나...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쓰러지기 전, 저 멀리서 '오빠!...' 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공식]한국 초상 능력자 협회, 아이스크림 축제 테러 범인 이름 '크로커다일맨'으로 확정. 현재 범인의 생명에는 지장없어... 구금 중]
[이번 테러로 부상자 수백명... 기물 파손 피해액도 천문학적.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히어로 협회 부실대응 논란 일파만파... 숨 막히는 현장, 그들을 도우러 온 히어로는 한 명도 없었다]
[[이재범의 사설]빌런이 히어로보다 나은 사회, 과연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을까]
[도심 한복판에 퍼트려진 독가스... 협회 '처리완료', 그렇게 강한 독은 아니야]
[[김경진의 이슈 플러스]에고스틱 그는 누구인가? 유추해 보는 그의 정체]
[빌런 에고스틱 '다음달에 큰거온다' 예고... 또다른 테러 암시?]
[에고스틱 팬카페 회원수 가파른 상승... '역대 최고']
[에고스틱에 대하여 당신이 모르는 15가지 TMI]
[K-빌런 에고스틱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A급 빌런을 단신으로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일본 협회장이 입을 다물지 못한 이유는? 현재 일본 실시간 트렌드 1위! '에고스틱 같은 빌런이 있는 한국은 그 자체로 세계 최강대국이다.' 일본 현지 네티즌들 반응 집중분석!]
[안녕하십니까. 9시 뉴스입니다. 오늘, 서울시의 축제현장에서 A급 빌런이 나타나 테러를 일으켰는데요, 이를 다른 빌런이 등장해 막았다고 합니다. 최다혜 기자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또다시 대한민국을 뒤흔든 에고스틱 열풍.
히어로들도 즉시 막는데 실패한 테러를, 빌런이 갑자기 나서서 막았다는 얘기는 반도의 화제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사람이 에고스틱에 대해 떠드는 지금.
신하루 또한, 에고스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소거 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앞으로 다시는 오늘처럼 그냥 얼굴 까고 나설까- 라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하는 순간 인생이 굉장히 고달파 질겁니다'
계속,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걸 어떻게 안거지?
내가 얼굴을 까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조언해준 거지?
신하루의 생각은 깊어져만 갔다.
그래, 그날. 그날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