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가 집착하는 악당이 되었다-21화 (21/328)

EP.21 축제에서

"날씨 좋구나."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이곳.

마지막으로 테러하러 나온 게 벌써 저번주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안 나오고 집에만 콕 박혀 있었으니, 실로 오랜만에 나왔네.

축제로 향하는 길.

나와 서은이, 수빈씨는 오랜만에 길을 걷고 있었다.

아, 수빈씨는 오랜만이 아니겠구나. 늘 장을 보러 왔다 갔다 하셨으니.

하여튼, 오랜만에 태양볕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사람은 가끔 이렇게 일광욕도 하고 살아야돼. 햇볕에 그 뭐냐... 비타민 D가 들어 있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너무 안에만 있으면 안 돼.

"오빠, 또 검은색 옷 입었어요?"

나한테 핀잔을 주는 서은이.

꽤 오래 같이 살면서 알게 된건데, 서은이가 형 - 오빠를 나누는 기준이 있다.

평상시에는 형인데, 뭔가를 부탁해야 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면 나한테 오빠라 부른다.

...그냥 오빠라고 통일하면 안 되겠니?

솔직히 날 잡고 따끔하게 혼내면 쭉 오빠라 부를 거 같기는 한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괜히 사이 어색해지고 거리감 생기고 그러자너. 언젠가 마음의 문이 열리길 기다려야지. 언젠가는 쭉 오빠라고 부를 날이 오겠지? 분명 올 거야...

어쨌든 지금은 기분이 좋은지 오빠라고 불러 주고 있으니 좋다. 근데 왜 또 검은색 옷을 입었냐고?

나는 내가 입은 옷을 점검해봤다. 검은 코트를 입은 모습. 안에는 평범히 입었다. 어차피 코트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기는 한데.

결과적으로 에고스틱때처럼 검은색으로 통일된 모습이다. 아니, 코트는 검은색이 제일 어올린다니까?

나는 서은이에게 그녀는 모를 진실을 얘기해 주기로 했다.

"서은아, 남자는 블랙이란다."

"뭐래요."

픽 웃으며 말한 서은이. 어라, 원래 이렇게 밝게 답해주는 애가 아닌데? 경멸 어린 얼굴로 던질 매도를 기다리던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게,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

서은아, 너 굉장히 아이스크림에 진심이었구나?

아니면 오랜만에 나들이라 기분이 좋은 건가?

수빈씨도 그런 서은이의 모습이 귀여줬는지 입을 가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서은이도 흔치 않은 은발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수빈씨도 원체 미인이라 그런지 그저 길을 걸을 뿐인데 사람들이 단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 이래?

참고로 수빈씨는 처음에 방송타는 바람에 인식저하 필터가 적용되어 있다. 물론 인식저하 필터 자체가 그 얼굴 한정으로 보는 사람을 안면인식장애로 만드는 기능이라 이미 수빈씨가 수빈씨라는걸 아는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참 신기하네. 온갖 방송에 나온 나는 가면쓰고 필터끼고 다녀서 이렇게 당당히 맨얼굴로 다닐 수 있는데, 수빈씨는 인식저하 필터가 외출할 때마다 필수니.

참고로 이 인식저하필터라는 것도 최신기술의 결정체다. 미국의 한 천재 연구자가 '언제까지 히어로들이 괴상한 쫄쫄이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냐'면서 발명해낸 것으로, 장치에 들어갔다 나오면 일정 시간 동안 인식저하가 안면에 작용되는 건데...

히어로 협회 사무실마다 하나씩 있는걸 서은이가 어떻게 설계도 보고 만들어서 우리 지하 기지에도 하나 있다. 고마워요 서은에몽!

인식저하 없으면 망해... 수빈씨가 장을 못봐오자너.

수빈씨가 밖에 못 나가면 삼시세끼 배달 음식을 시킬 수 밖에 없다. 그게 '집순이'라는 것이니...

"아, 저기 보인다!"

서은이가 잔뜩 흥분해서는 외쳤다.

그래, 나도 보이네.

[제 13회 국제 아이스크림 축제]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는 이곳.

살다 살다 올 줄은 모른, 아이스크림 축제의 현장이다.

거리마다 냉장고가 있는 부스가 가득. 대체 이 축제로 쓰는 전기세가 다 합쳐서 얼마일지에 대한 궁금증만 생길 뿐이었다.

서은이는 벌써 신나서 고개를 사방팔방 돌려가며 보고 있고, 수빈씨도 신기한지 두리번 두리번 하고 있다.

"오, 쌀 아이스크림이다!"

어딘가로 오도도도 달려가는 서은이. 야, 같이 가야지!

나랑 수빈씨도 천천히 뒤따라 가 보니, 서은이는 이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들고 있었다.

콘에 담겨 있는 하얀 아이스크림.

"맛있다! 오빠랑 언니도 먹을래요?"

서은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쌀 아이스크림이라. 들어만 봤지 한 번도 먹은 적은 없는데 말이지.

"그래, 줘 봐."

나는 서은이가 건넨 콘을 받아 한입 물어 봤다.

음. 맛있네.

햇반 맛이 날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바닐라에 가까운 맛이었다.

"오, 먹을 만한데? 자 수빈씨도 한입 드셔보세요."

"네? 저, 저는."

갑자기 당황하더니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는 수빈씨. 왜 이러시는 거지?

"이거 맛있는데 안 드셔보실꺼예요?"

"그래 언니, 먹어봐요!"

나와 서은이의 거듭되는 공세에 수빈씨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네. 주, 주세요."

말을 더듬으며 손을 뻗는 그녀.

아니, 왜 다시 초창기의 왕소심 수빈씨가 된 거지?

내가 너무 강압적으로 먹으라고 해서 그런가?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건가?

"...으으...이거...간접...나만...이상한 건가?"

그녀가 뭐라 뭐라 중얼거렸으나 너무 작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딱히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더니 아이스크림을 눈감고 한입 꼬옥 먹는 그녀. 아니, 무슨 아이스크림을 저렇게 비장하게 먹는데.

"으음...맛있네요!"

한입 먹더니 그제야 눈을 빛내며 맛있다고 하는 그녀. 그치? 생각보다 약간 고소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이라 먹을 만 하다.

한입 먹은 뒤 남은 콘은 다시 서은이의 손으로 돌아갔고, 남은 건 서은이가 깔끔하게 마저 먹었다. 잘 먹네.

***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축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시식했다. 하도 많이 이것저것 먹어서 그런지 돈을 물 쓰듯 쓰는 느낌이었지만, 남는 게 돈이라 별문제는 없었다.

무슨 전 세계 단위로 나라마다 돌아다니며 열리는 세계적 축제라 그런지, 정말 별별 아이스크림을 볼 수 있었다. 초코, 바닐라, 딸기, 민트 초코등 익숙한 기본 아이스크림과 아빠는 외계인, 슈팅스타같은 브랜드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널렸다. 그리고 저것들 외에도 평생 여기서만 볼 수 있을 거 같은 아이스크림이 널렸다.

와사비맛, 냉면맛, 스테이크맛, 라면맛등 무언가의 끔찍한 혼종 아이스크림들. 근데 스테이크맛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약간 직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이런 느낌일려나? 나도 내가 뭔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책상맛, 코딱지맛, 귀지맛등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 또한 있었다. 저걸 왜 돈 받고 파는 거야...

...물론 가위바위보 해서 진사람이 먹는 걸로 내기해서 코딱지맛은 사봤다. 혼자 가위를 내서 진 수빈씨가 눈을 글썽이며 먹었는데, 한입 먹더니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길레 나머지는 그냥 버렸다. 먹지 마세요, 쓰레기통에 양보하세요.

지금은 망고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왜 망고맛을 먹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치 않니 서은아?

내가 책망하듯 묻자 그녀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속삭였다. 나한테 까치발을 들고 귀에 입을 붙인뒤 한 말은.

"....오빠가 망고단의 수장이니 망고맛 아이스크림을 먹어야죠!"

"서은아... 솔직히 망고 어쩌구는 이제 좀 뇌절이라 생각하지 않니? 너무 우려 먹으면 재미없어."

"아니요? 할 때마다 재밌는데요? 그리고 오빠가 아무리 부정해도 이미 오빠 팬클럽 이름은 망고단이예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서은이. 이제는 아주 나 놀리는 재미로 사는구나...

그래, 너라도 행복하면 됐다.

이것저것 보다 보니 어느덧 이벤트코너로 왔다.

프랑켄슈타인맛 아이스크림, 미키마X스맛 아이스크림등 콜라보 아이스크림을 파는 이곳.

저쪽에는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도 있고...

응?

잠깐, 무슨맛 아이스크림?

"자,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

부스안에 여자가 큰 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이거 초상권 침해야!

"오빠, 풉, 아이스크림도 있네요. 푸하하하!"

아주 그냥 웃음꽃이 핀 서은이. 웃기냐?

잠깐, 지금 수빈씨도 고개 돌리고 웃고 있는데?

더 웃긴 건 저 코스만 유일하게 줄을 서고 있다는 거다. 앞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인스타용인가? 정말 어질어질하다...

서은이와 수빈씨의 강력한 요청으로 나도 결국 줄 서서 내맛 아이스크림을 샀다. 과연 에고스틱맛은 무슨 맛일까...?

아이스크림 자체는 흔한 바닐라에 초코로 만든 내 트레이마크인 반쪽가면이 올려진 모습이다. 초코로 눈이랑 입도 구현해 놨는데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안에는 망고가 들어가 있다는 점?

다행히 먹을 만은 했다. 저기 팔고 있는 사람은 알까? 에고스틱맛 아이스크림을 에고스틱이 와서 먹었다는 걸...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무슨 게임하는데가 있었다. 다트를 던져서 풍선맞추기. 많이 맞추면 상품을 준덴다. 근데 아이스크림 축제라 그런지 상품도 아이스크림이다. 10단 아이스크림? 이건 또 뭐래.

"서은아, 오빠가 보여 줄게. 내가 왕년에 다트던지기 장인이었거든? 10단 아이스크림인가 뭔가 먹여 준다!"

"오빠, 염동력으로 사기칠려는 거 아니야?"

서은이의 말에 뜨끔한 나는 그냥 얼른 게임이나 하기로 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총 두 명이 할 수 있는 부스인데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바로 할 수 있었다.

"휴우..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다트를 쥐고 서은이에게 헛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옆에도 누군가도 게임을 하러 왔다.

아무 생각 없이 누가왔나 옆을 쓱 본 나는,

뇌 정지가 오고 말았다.

찬란한 금발.

세상 누구보다도 예뻐 보이는 외모.

게임을 하러 온 사람은 스타더스, 신하루였다.

어.... 너가 왜 거기서 나와?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