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세상 말세
기차에 사람을 묶어놓고 이대로 가면 5명이 치이게 생겼는데 레버를 돌리면 다른 선로에 묶인 한 명만 죽는다. 레버를 돌리겠는가?
에고스틱이 던진 난제.
사실 이미 철학적으로 꽤 알려진, 유명한 난제다.
일명 트롤리 딜레마.
기차가 이대로 가면 5명을 친다. 근데 레버를 돌리면 한 명만 친다. 공리주의적으로는 레버를 돌리는 게 맞다. 4명을 살릴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과연 당신은 돌릴 수 있겠는가.
기차가 5명을 친거는 참 안타까운 사고다. 여기서는 안타까운 테러겠지만. 그러나 레버를 돌리면 거기서부터는 사고가 아니다. 5명은 사고로 죽은 거지만, 당신이 레버를 돌리면 그 1명은 '당신이' 죽인 거다. 안죽을 수 있던 사람이 당신이 레버를 돌렸기에 죽는 거다.
...뭐, 이런 딜레마다.
그리고 나는 이 딜레마를 실제세계에 구현했고.
스타더스는, 말뿐인 딜레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행동으로 옮겨서 멋지게 돌파했다.
레버를 돌려서 기차를 어디로 향하게 할까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가 나서서, 기차를 멈춰 세웠다.
스타더스는 초상 능력자다.
나와 같은 이중능력자. 힘이 아주 강함과 동시에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정확한 명칭으로는 괴력과 비행 능력.
그리고 그녀도 이중능력자이기에, 나처럼 능력이 좀 하자가 있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은.
괴력도 보면 괴력 단일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혼자 건물도 무너트릴수 있다. 비행 능력도, 단일로 그 능력을 갖춘 사람 중에서는 하늘을 마하의 속도로 비행한다. 물론 둘 다 미국에 있는 히어로들이기는 하지만.
스타더스는, 결코 그 정도는 아니다. 괴력도 강하기는 하지만 건물을 한 방에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고, 비행 능력도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막 초음속으로 날고 그런 건 아니다.
...물론 분명 똑같은 이중능력자임에도 둘 다 심각한 하자가 있는 나보다는 훨씬 낫기는 한데... 그래도. 좀 부족하다는 건 여지없는 사실이다.
물론 이중능력자 자체가 매우 희귀하고, 괴력과 비행 능력이 서로 상호작용도 좋아서 A급이지만, 약간 2프로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만화의 주인공.
다른 능력자들과 다른 그녀만의 특징은, 그녀의 능력은 진화한다는 거다.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더더욱 강해지는 능력.
그래서 이번에 내가 근력 강화 이벤트를 준비해본 거지.
Make Stardus Great Again.
실제로 그녀가 원래 그녀의 힘은 달려오는 기차를 못막으나, 막상 실제상황이 닥치자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에 폭발적으로 강해진 거다.
그리고 그녀의 호감도도 좋아졌다.
어째 나랑 대립각을 세우면서 낮아진 그녀의 인기는, 이번 기회에 다시 상승했다. 자신의 몸을 초개 같이 던져 기차를 막는 그녀의 모습은, 전국의 티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스타더스가 다시 호감이 된 거는 좋았다.
근데 왜 열애설이 터지냐고.
***
나는 허망한 마음으로 티비를 시청하고 있다.
겨우겨우 거사 후에 순간이동으로 집에 돌아와 피로회복장치에서 푹 잔뒤에 일어나보니.
서은이가 티비보라며 내 손을 잡고 질질 끌고 가 나를 소파에 앉혔다.
티비에서 보이는 커다란 오늘의 방송 제목.
[에고스틱-스타더스 열애설]
"이게 뭐야 시발."
티비를 보자마자 외친 나.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하던 말던, 티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 연예가 중계입니다! 요즘 이 둘이 아주 핫하죠.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빌런 에고스틱과! 떠오르는 초신성 히어로 스타더스! 이 둘의 열애설이 요즘 대한민국 연예계를 휩쓸고 있는데요. 박기자님, 둘의 열애설이 터진 이유가 뭔가요?"
지상파의 연예계 중계 프로그램.
여자 앵커가, 뭔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남자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일단 이는 에고스틱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아래에서 판넬을 들고 온 남자는, 이를 자기 앞에 놨다.
하얀 배경의 스티커가 붙어있는 판넬.
맨 위에 핑크색으로 적힌 에고스틱♡스타더스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에고스틱의 공개적인 구애들입니다."
판넬에는 하얀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그걸 쓱 떼니 안에 접힌 글자와 사진이 보였다.
[1. 에고스틱의 러브레터.]
남자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양복을 갖춰 입고 올백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체 그런 표정으로 말을 하니, 누가 보몃 마치 CEO가 주주총회에서 실적보고를 하고 있다고 느낄만한 그림이었다.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그런 게 아닌 황당한 찌라시였지만.
"에고스틱의 첫 행보는 S급 빌런 엔조디악과 A급 빌런 라이노 살해였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그는 자신이 든 판넬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르켰다.
사진에 보이는 건 마치 누군가가 피로 적은 듯한 글자들. 그 글자들은 이리 적혀 있었다.
나보다 악한 이에게 죽음을.
나보다 약한 이에게 죽음을.
To you, Stardus.
이 오늘거리는 문구는, 사실 말하는 리포터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컨셉을 잡고 범행을 저지른 내가 내 컨셉을 어디까지 해야 할 지 모른 체 폭주해 버린 결과다.
처음이라 그런지 의욕도 넘쳤고, 첫 살해라고 전에 약좀 빨고 가서 그런지 너무 내 감성에 취해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구, 내가 보기에 멋진 문구를 피로 휘적휘적 적고 왔다.
근데 그게 맨정신으로 봤을 때 저렇게 오글거릴 줄은 몰랐지.
지금은 그래도 적당히 오글거리게 컨셉을 좀 조절하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대충 멋져 보이는 말 적는다고 폭주하다가 저렇게 된 거다. 아...
사실 처음에는 저거 적고 운율이 완벽하다며 나 혼자 뿌듯해했다. 물론 나중에 저걸 본 서은이가 폭소하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고... 지금은 언급만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흑역사가 됐다. 서은이가 그때 하도 앞에서 '나보돠 왁한 이들에게 쥬금을~' 이러면서 놀리다 보니 약간 트라우마가 된 거 같기도...
하여튼, 내가 지워 버리고 싶어 하는 흑역사를 저 기자가 또 공개했다. 옆을 보니 서은이가 또 폭소를 터트리고 있다. 그나마 수빈씨라도 옆에 없어서 다행이디...
근데 정작 저 흑역사를 분석하는 기자 본인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지만.
"자, 여기 문구 보이시나요? 에고스틱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뒤 현장에 남긴 메시지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역시 마지막 줄의 '스타더스에게' 인데요. 사실 처음부터 에고스틱은 일관적이게 스타더스에게 구애를 했습니다. 빌런들을 제거한 뒤 스타더스에게 선물로 줬다는 거죠. 사실상 공개적인 구혼입니다."
어... 선물로 준 게 아니라 그냥 어그로 끌려고 한 건데...
내가 막 악행 저질렀는데 내 담당으로 스타더스가 아닌 이상한 히어로가 붙으면 어떡해? 그래서 딱 스타더스를 지칭해서 어그로를 끈거다. 스타더스가 사적제제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이 무슨...
그러나 내 말이 저곳까지 들릴리는 없었고, 기자는 여전히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테러입니다. 사실 에고스틱의 테러는 테러라고 부르기도 어려웠죠. 결과적으로 사상자가 0명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벌인 테러 두 개에서 모두 스타더스를 불렀고, 이 두 개를 모두 스타더스가 멋지게 해결했었죠."
그러면서 나오는 나의 테러현장. 스타더스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모습과, 기차를 혼자 힘으로 막아 세우는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틀어졌다. 음, 멋지긴 하네.
"그리고 에고스틱이 이후에 한 말들 또한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한번 들어 보시죠."
그리고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
배에서의 테러가 무산되고 나서, 내가 의아해 하다가 그녀한테 한 말이다.
[당신 때문이었군요]
[당신의 연설을 듣고 나서, 모두가 갑자기 연합되었었죠]
[그래요. 그래. 제가 아무래도 당신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 당신이라면, 말 한마디로 대중을 계몽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죠.]
아. 내가 저런 말을 했다고?
내 혼란스러움이 채 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바로 저번의 기차 테러에서 한 말.
[그래요 스타더스씨. 잘하셨습니다. 제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요. 그런 방식으로 모두를 살릴 줄이야, 진짜 예상도 못했네요. 당신의 승리입니다.]
잠잠히 자신이 틀어놓은 음성을 듣고 있던 기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앵커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걸 보십쇼!!!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냔 말입니다!!! 망고스틱이 저 마지막 말하고 스타더스의 눈을 감겨 주자, 스타더스도 그제야 조용히 잠든 거 보세요!!! 이게 둘이 사귀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가 사귀는 거란 말입니까!!!"
그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 대체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녕 공중파 방송이 맞다는 말인가!!!
"이게 대체 뭐야!!!!"
나는 소리를 지르며 리모컨을 티비쪽으로 던졌다.
이미 옆자리에서 같이 보던 서은이는 숨 뒤집어질 정도로 웃고 있는지 오래.
방송은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보는 앵커를 화면에 잡는걸 끝으로 갑자기 화면이 광고로 바뀌었다.
자막으로 [방송점검중]이라고 뜨는걸 보니 방송사고였나보다.
그래 시발 대체 누가 방송에서 나보고 망고스틱이라고 해.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좌절할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한민국은 미쳤어.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기자는 내 열렬한 팬클럽 회원으로써, 통칭 망고단이라고 한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일으켜 강등 위기를 맞았으나, 그날 방송이 역대급 시청률은 찍은 덕분에 징계는커녕 오히려 성과급을 받았데나.
세상 말세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