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선택의 시간
테러.
말만 들으면 그냥 폭탄 하나 던지면 끝날, 아주 쉬운 일인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설계와 계획을 거쳐야 한다. 대규모 테러만 2번 일으킨 내가 하는 말이니 맞는 말일 거다. 아마.
기차가 지나갈 선로에 사람을 묶어 놓는다.
말만 들으면 참 쉬어 보인다. 아닌가?
그냥 사람 한 명 쓱 납치해서 묶어 놓으면 될 것 같으니.
근데 이게 실제로 하면, 진짜로 좀 쉽지가 않다.
일단 난 묶어 놓을 놈들 찾는 거부터 힘들었다. 진짜 평범한 민간인을 묶어 놓았다가 실수로 죽어 버리면 얼마나 찝찝하겠는가?
비록 내가 벌써 손에 피를 묻힌 적이 많은 진짜배기 빌런이지만 그런 짓 했다가는 밤에 잠이 안오고 말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한민국의 준법시민이었다고.
그래서 좀 하자 있는 애들을 선별해서 구해 왔다. 중죄를 지었음에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난 애들로. 아직도 개차반처럼 살고 있어서 납치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납치는 어찌저찌 했다 쳐도, 얘들을 선로에 묶어놓는 것도 큰 문제다. 사실 납치랑도 비슷한 부분인데. 대한민국은 CCTV가 너무 많다. 뭐 사생활 침해 그런 거 때문에 도처에 깔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절묘하게 있을 때는 다 있다.
물론 CCTV도 내 순간이동 능력과 서은이의 해킹실력으로 어찌어찌 뚫을 수는 있는데, 선로에 사람 묶는 건...
대한민국은 밤에 한정해서는 무적인 섀도우워커라는 히어로 때문에 밤에 뭔 짓하다 걸리면 큰일 난다. 차라리 밤에 아싸리 너도나도 테러하면 섀도우워커 혼자 다 해결을 못 하니 좀 낫겠지만, 빌런들이 다 쫄보라 밤에 사려서 혼자 나대다가는 큰일 난다. 쩝.
그러니까 나는 대낮에 순간이동 해가며 사람을 묶고 다녔단 말이다. 이게 참 쪽팔리고 기분이 묘하고 좀 그렇다. CCTV가 없다고 해도 날이 밝은데 이러니 기분이 뭔가 뭔가야...
그리고 기차. 사실 이거는 내 죄가 큰데, 저번에 유람선 폭탄테러와 추종자들의 건물 폭탄테러 이후로 어느 곳이든 폭발물 검사가 강화돼서 기차에 폭탄 설치하는 짓거리를 못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빈씨가 수고해줬다. 기차 운전하는 사람을 마취시켜 쓰러트리고 자기가 대신 앉았다.
수빈씨. 분명 자기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도 없고 집에만 있었다고 했던 거 같은데, 헬리콥터에 기차에 포크레인에 비행기에 운전 못하는 게 없다고 한다. 대체 그걸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컴퓨터 시뮬레이터로 배웠다는 대답에 기절할 뻔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 같았는데, 수능 공부를 수능 1주 전에 시작하고 서울대 들어갔다는 말에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 천재는 나랑 다른 뭔가가 있겠지.
워낙 소심하길래 나랑 비슷한 타입인 줄 알았지만, 사실 서은이와 기술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천재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여기서 나만 또 일반인이야? 서러워서 정말...
어쨌든 기차는 수빈씨가 몰기로 했다. 기관사가 갑자기 사람 안 치겠다고 정지하거나 드리프트 하면 좀 곤란하거든. 그리고 여차하면 기차를 탈선시켜 너죽고 나죽자는 위협도 되고.
테러를 일으킨 데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보험이 필요하다. 늘 말하지만 나는 스타더스의 주먹 한 방에 즉사할 수 있는 연약한 몸이다. 레버를 당기라고 했더니 내 척추를 당겨서 이승과 하직시키려 할 수도 있다고. 보험을 깔아놔야 한다. 기차를 탈선시킬 수 있는 수빈씨가 첫 번째 보험. 그리고 혹시라도 스타더스가 기차를 습격하는 걸 대비해 사람들 철도에 묶인 곳에도 폭탄을 논게 두 번째 보험. 쉬운 게 없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서.
시민들에게 내가 얼마나 위험한 악당인지 알릴 수만 있다면!
스타더스의 호감도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나 다인, 내 최애캐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저기서 날라오고 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르겠는 빨간 라텍스 옷에 금발을 휘날리며 날라오고 있는 스타더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예쁘다.
내가 평생 스타더스만한 미모를 가진 여자랑 사귈 수 있을까? 안될 거야, 아마.
물론 수빈씨도 단순히 미모만 놓고 보면 스타더스랑 맞먹을 수도 있기는 한데... 그래도.
어쨌든, 이제는 다시 컨셉을 잡을 시간이다.
비록 하면 할수록 적응되기는커녕 손발이 떨리는 거 같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컨셉! 악으로 깡으로 지킨다.
"아, 여기 오늘의 주인공. 스타더스씨가 오셨군요!"
나는 혼자 박수를 치며 스타더스를 맞이했다.
나랑 조금 떨어진 곳으로 착지한 그녀.
"네 이놈! 또 뭔 짓을 하는 거냐!"
음.
사실 내 컨셉만 이상한 건 또 아니다.
만화로 읽을 때는 몰랐는데, 스타더스도 직접 실제로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어...
너도, 나도. 컨셉을 좀 잘못 잡은 거 같다. 그치?
현대에서 신하루같은 평범한 여대생이 사극조로 말하는 걸 들으니 굉장히 어색하고 그렇다.
물론 나도 만만찮지만.
"하하하하하! 뭔짓을 하다니요. 저는 그저 당신의 어떤 '도덕적' 선택을 내리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네 이놈. 너가 그렇게 민간인을 학살하려고 해도 괜찮을 거 같냐?"
[민간인(아니다)]
[학살(한적없다)]
[스타더스 저거저거 왜 우리 망고스틱 음해함?]
[ㄹㅇ 망고가 ㅈ으로 보이나?]
[호감가네....]
[누가 호감간다는겨?]
[스타더스가 호감간다고. 반어법임. 비호감이라는겨]
[??? 언제는 또 에고스틱이 호감이라며?]
[그건 진짜 호감간다는 소리임]
[아니 ㅅㅂ왜 호감에 2가지 뜻이 있어]
[문맥보고 판단해라]
[이 녀석 커뮤용어 처음 맛보더니 정신을 못 차리는wwww]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김선우님을 석방해라]
[도배 멈춰!]
[스타더스 꼴 보기 싫음]
...말하면서 채팅창을 한 번 더 확인했는데,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스타더스를 더 욕하는 분위기이다. 안 돼, 빨리 반전을 시키지 않으면!
나는 과장되게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열차가 오고 있고, 이대로라면 5명의 사람들을 그대로 치게 생겼다는 게 문제죠! 빨리 저기 가서 레버나 당길지 말지 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빈정대며 말을 하자 스타더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게 느꼈다.
"....내가 그냥 이 자리에서 너를 족치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네? 당연히 이유가 있죠! 자, 이게 뭔 줄 아시죠?"
나는 재빨리 로브에서 기폭장치를 꺼내 들었다. 아니, 내가 이건 설명을 안 했나? 생각해 보니 안 했네.
"자, 이거 보이십니까? 누르면 저기 6명 전부 몰살이에요 몰살. 그리고 제가 죽으면 지금 기차를 운전하고 있는 제 부하도 가만히 있지 않겠죠?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타더스는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납득한 거로 보였다. 휴, 큰일 날뻔.
근데, 지금 시간이 없다. 기차가 거의 다 온 거 같거든?
"자! 기차가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속보입니다!"
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절벽 아래 레버가 있는 쪽으로 순간 이동했다. 아래에서 절벽을 올려다 보니, 내가 어디 갔나 두리번거리던 스타더스도 뒤늦게 레버 쪽으로 날아왔다.
"자, 자! 이제 선택의 순간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버를 안 돌리면 저기 묶여 있는 다섯 명이 그대로 죽습니다. 어어, 거기로 가지 마세요! 기차 그냥 탈선시켜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네, 레버. 레버를 돌리면 한 명만 죽습니다.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할지, 빨리 결정이나 해주시죠."
거기까지 빠르게 말한 나는 절벽 위로 다시 올라갔다.
절벽 위에서 카메라로 레버 앞에서 고민하는 스타더스를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자, 자! 펜타킬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스타더스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무조건 레버 돌려야지]
[레버 돌리면 스타더스가 그 한 명 죽인 거 되는 거 아니냐? 가만히 있으면 무죄인데 레버 돌리면 한 명 자기 손으로 죽이는 거지]
[돌리면 공리주의적으로 4명 살리는 거니 돌리는 게 맞다ㅇㅇ...]
채팅창에서도 엇갈리는 의견.
그래도 다들 아마 스타더스가 레버를 돌릴 거라고 예상하는 모습이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았지.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아는 스타더스는,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걸!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열차.
레버의 앞에서 고민하던 스타더스는, 결국 레버를 당기지 않았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더니,
기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악! 다인씨! 쟤 제 쪽으로 달려오는데 어떡하나요오오!!!]
귓에 꽂은 인이어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수빈씨의 비명소리. 기관실에서 정면으로 스타더스가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나 보다.
나는 급히 촬영 중인 카메라를 음소거 시키고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빈씨를 해치려고 오는 게 아닐 겁니다."
아마 몸으로 기차를 막으려고 하는 거겠지.
그래.
내가 아는 스타더스, 누구보다 정의로운 신하루라면.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길을 선택할 줄 알았다.
이제 나는, 그런 그녀를 돋보이도록 해야겠지.
카메라에 음소거를 해체한 뒤, 나는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질렀다.
"이럴 수가!!!! 대체 스타더스는 뭘하는 거죠!!!! 끼에에에에엑!"
익룡 같은 소리를 냈더니 목이 급격히 아프다.
스타더스, 보고 있니?
내가 너를 위해 이 정도로 망가지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