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가 집착하는 악당이 되었다-12화 (12/328)

EP.12 순간이동

그림과도 같은 넓은 저택.

하얀 겉면에, 현대식 세련미가 넘치는 위풍당당한 이 저택.

서민층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부자들만 모여 있는 이곳.

...그런 이 근처 어딘가에서, 나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금 내가 노리는 놈은, A급 빌런 텔레포터다.

주요 특기는 순간 이동인 놈.

하자가 있는 내 순간 이동과는 다르게, 저놈의 순간 이동은 훨씬 능력이 좋다.

그러니까 이동하고 나서의 부작용도 없는 진정한 '순간 이동' 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거리 제한은 좀 있는 거 같긴 한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사기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그냥 사기 능력이 맞다. 다만 이 텔레포터라는 놈이 담이 작은 건지 멍청한 건지 이 정도 능력을 그냥 은행에서 돈 훔치는 용도로 쓰고 있다.

그래, 적어도 지금은.

현재 내가 활동하는 시기를 원작 만화로 친다면 이슈 5쯤? 진짜 극 초반이다. 200 이슈로 이루어진 만화에서 단 5라니.

사실 그게 다행인 거다. 만약 이슈 100너머의 후반대에 빙의했으면 이미 총체적 난국이니. 작가가 파워밸런스를 못 잡아서 처음에 허접스럽던 빌런은 어디 가고 하나하나가 세계 멸망을 불러 올 수 있는 놈들이 튀어나온다.

애초에 이슈 150쯤에 끝난 대공황 에피소드의 마지막 빌런으로 등장한 우리 서은이도 사실 한국만 정복시키려고 해서 그 정도로 끝났지,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정보통신망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이 텔레포터. 이놈도 정말 끈질긴 놈이다. 얘는 초반에 스타더스랑 싸우게 됐다. 방심하고 있던 놈을 스타더스가 어찌어찌 기절시킨뒤, 마취약에 절인체로 감옥에 보내버린다. 정신 차리면 바로 순간 이동으로 도망갈 테니.

그렇게 초반의 잡범으로 잡혀간 이놈이, 지금까지의 모든 빌런들이 탈옥하는 '대탈옥'에피소드에서 화려하게 부활. 스타더스를 가장 괴롭히는 적으로 등극한다.

원래는 돈이나 삥땅치며 살던 빌런중에서도 좀 소확행?을 추구하던 놈이지만, 스터더스에 의해 몇 년이고 마취약에 절여져 갇혀 살다 탈옥한 뒤에는...

그저 자신을 처박은 스타더스, 그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간다. 애가 흑화해 버린다고.

애초에 순간 이동. 이 얼마나 얍삽하게 딜넣기에 좋은 능력인가. 이후 에피소드에서 뭐만 했다 하면 갑자기 튀어나와 한 대 때리고 도망치고, 때리고 도망치고...

아마 [스타더스트!]가 웹툰이었으면 고구마라고 쟤좀 빨리 죽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을 거다. 책으로 간행되는 코믹스여서 실시간 반응은 확인 못 하지만 열불내며 읽는 독자들이 많았을 거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나도 그렇다.

그러니까 이놈은, 미리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한다.

다시 저택 앞.

근처에 자동차를 주차해 두고 대기하고 있던 나는, 인이어에 꽂힌 이어폰으로 서은이에게 연락했다.

원래라면 굳이 서은이 귀찮게 할 필요 없이 내가 혼자 알아서도 잘하는데, 이번에 이놈은 워낙 까다로운 게 아니라.

"서은아, 이제 슬슬 들어갈까?"

[아니, 형 아직도 안 들어갔어요? 빨리 들어가세요.]

"아니, 이거 바로 거실로 순간이동하면 되는 게 맞는 거야? 저놈이 거실에 있으면 어쩌게!"

[하아.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그냥 위치추적기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총을 쏘세요. 총은 아마 걔가 어지간하면 순간 이동해서 피할 거 같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위치추적기는 원리 자체가 거미줄을 이용해서 총알보다 빠르니, 그거는 높은 무조건 붙을 거예요.]

"대체 거미줄을 이용한 위치추적기가 뭐길래 총알보다 빠른 데... 난 이해가 안 된다."

[총알은 공장에서 만든 거고, 위치추적기는 제가 직접 만든 건데 당연히 제 게 더 빠르죠. 위치추적기 옆에 붙여진 실 쏘는 구멍에서 나가는 거라 물리 저항이 더 적은데... 근데 어차피 이렇게 설명해봤자 형 문과라 못 알아듣지 않아요? 그냥 의문 가지시지 않는 게...]

"야... 문과라도 대충 다 알아들어. 아마. 어쨌든 근데 난 이해가 안 돼. 그냥 막 스파이 영화같은데 보면 위치추적기는 길거리에서 실수로 툭 부딪치면서 딱 자연스럽게 어?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애초에 저놈은 텔레포트를 써서 길거리를 안 지나다닐뿐더러, 그런 짓 하다 CCTV에 찍히면 더 골치 아프니까 이렇게 하세요. 이게 제일 정확해요. 제가 얘 생활루틴이랑 이동 경로 조사하고 짠 거니까요. 이놈은 집 밖으로 나갈 때도 거의 다 순간 이동으로 나가고 어디로 이동할지도 예측 불가라, 그냥 지금, 이런 식으로 제거하는 게 맞아요.]

"아니 그래도... 이동추적기 붙이는 건 이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제가 말씀드린 거 외에도 형이 모르는 더 많은 이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해주세요. 하아.]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는 서은이에 말에 나는 풀이 죽고 말았다. 이런 싸가지 없는... 내가 너보다 거의 10살은 많다 이놈아...

".......그래. 알았다...."

내가 묘하게 풀죽은 듯이 말하자 서은이가 살짝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아 오빠. 왜 그래요. 갑자기 시무룩해지지 말고요. 저희 이미 비슷한 얘기한번 했는데 또 그러시니까...]

서은이가 말하던 도중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은이의 말이 끊겼다. 옆에 있는 수빈씨가 뭐라고 말을 건넨거 같다.

네..네..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서은이가 나한테 말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요 오빠!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 알았다."

아까부터 계속 바꿔 부르는 형 오빠 호칭에 대해 헷갈리니까 제발 하나로 결정해서 부르라고 하고 싶었는데, 할 타이밍이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참았다.

...그리고 하나로 결정하라고 하면 형이라고 계속 부를 거 같아서. 대충 처음 만난 날 나한테 보여 준 정황으로 추측하면 살짝 남자공포증이 있어서 일부러 자신을 남자라고 하고 나보고도 형이라 하는 거 같은데. 실험실에서 연구가들이 다 남자였던 것과 상관있을까?

그래도 몇 달 지내다 보니 좀 나아져서 다행이다. 아마 내가 무해하다는 걸 깨달아서 좀 마음을 여는 거겠지. 아니 애초에 원작을 모르더라도 딱 봐도 여자인데... 숏컷만 하면 남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건 좀 귀엽네.

사실 제일 좋은 건 밤에 몰래 침입해서 사살하는 건데, 그건 그놈 때문에 안 된다.

대한민국에 스타더스와 더불어 몇 안 되는 A급 히어로인 '섀도우 워커' 때문에.

이놈 능력 때문에 밤에 뭔짓을 저지르면, 바로 잡힌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테러가 낮에 벌어지는 건 다 이놈 때문이다.

나쁜 놈. 얘만 없었으면 진짜 편하게 빌런들 쓱삭쓱삭 쉽게 쉽게 처리할 수 있는데. 히어로라서 막 보내버리는 것도 양심에 찔리고. 또 막상 제거해 버리면 문제가 더 커지기에 그냥 낮에만 활동하고 있다.

음, 실전을 해보려고 하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드네. 약간 학창 시절에 책상 앞에만 앉으면 딴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한 기분?

나는 얼굴에 반쯤 걸쳐진 마스크를 매만졌다.

그래, 이제는 행동할 시간이다.

[계획 잊지 않았죠?]

"그래."

이 근처에서, 저놈의 거실로 텔레포트.

거실에 없으면 조용히 수색 후 몰래 사살.

만약 걸리면? 그래도 위치추적기는 뿌렸을 테니 Plan B로 가면 된다.

"시작한다."

나는 심호흡하고, 순간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시작.

***

나는 텔레포터놈 집의 거실로 순간이동했다.

순간이동하자마자 보이는 건.

어떤 놈의 면상?

"아이 씨!"

"헉!"

[형, 쏴요!]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람과 동시에, 나는 바로 오른손으로 총을 쏘며 왼손으로는 이동추적기를 던졌다.

-탕!

총을 쏘고 나서 보니, 이놈은 이미 시야에 없었다.

총은 맞았는지 모르겠네.

아이 씨, 얘 왜 거실에 있고 난리야. 바로 도망갔잖아.

이렇게 된 이상, 플랜B로 간다.

"서은아! 위치추적기는 붙여졌냐?"

[네! 수빈언니, 위치 불러 주세요!]

[응! 지금... 동쪽으로 500m거리에 있어!]

[들었죠? 형, 빨리 가요!]

"아니 야, 나 이렇게 계속 순간 이동하면 휴유증이..."

[빨리!]

"아 알았어."

나는 재빨리 이동했다.

***

어림잡아 500m 앞으로 이동해 보니.

잠깐, 여기 시내인데?

"꺄악!"

"뭐, 뭐야?"

갑자기 사람 많은 곳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여기 번화가잖아!

갑작스럽게 전신에 검은 로브를 두르고 마스크를 쓴 사람이 허공에 뿅 등장하니 사람들이 당황한 게 보였다.

"어, 저 사람 뭐야..?"

"오빠 저거 에고스틱아니야?"

"어? 진짜네!"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식은땀이 흘러나올 찰나세, 귀에서 서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오른쪽에!]

오른쪽?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저 멀리.

몸에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라, 너 거기 있었구나?

심지어 총에 이미 맞았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씨익 지어지는 걸 느꼈다.

그래. 가끔은 쉽게 가는 것도 있어야지.

내가 총을 들고 그쪽으로 순간 이동 하려는 찰나. 그놈이 나를 보더니 비틀거리며 다시 사라졌다.

"그래, 해 보자 이거지?"

그렇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때아닌 순간 이동 추격전이 벌어졌다.

***

"...네. 한국 히어로 협회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네? 에고스틱이 시내 한복판에 나타났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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