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가 집착하는 악당이 되었다-11화 (11/328)

EP.11 악당의 일상

[일본이 놀라고 미국이 경악하고 유럽이 뒤집어졌다! 세계를 뒤흔든 K-빌런. "우리는 어째서 에고스틱같은 빌런이 없는 것입니까?" 일본 히어로협회 대변인, 눈물!]

"쓰읍."

나는 그만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았다.

아니 유튜브 잘 보고 있는데 왜 이런 게 뜨고 난리야.

"당, 당이 필요해."

어질어질한 국뽕티비에 등장한 내 얼굴을 보자, 급격히 당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어떻게 전의 세계와 이런 거는 하나도 안 달라졌지?

현실이 된 만화 속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원래의 현실과 매우 유사했다.

'그냥 평범한 지구에 그저 초능력자들이 있을 뿐인 세계' 라는 만화의 세계관과 걸맞게, 히어로 빌런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똑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도 국뽕티비는 돈이 된다는 말이지. 대체 왜 하다 하다 빌런까지 국뽕요소로 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방에서 나온 나는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저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무슨 복도를 걸어야 한다.

이거 실화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방에 개인용 냉장고를 하나 장만해놔야 할 것 같다.

이제 돈도 많은데, 아낌없이 써야지.

무슨 강당만 한 거실에 도착한 이후,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미닛메이드가 한 병 남았다. 분명 두병 마신 거 같은데, 왜 한 병밖에 안 남았지? 서은이가 마셨나?

뭐, 서은이도 나처럼 단 걸 좋아하니까.

그래, 생각난 김에 서은이는 뭐 하는지 봐볼까?

나는 발걸음을 돌려 서은이가 있는, 이 지하 기지의 메인섹터로 향했다.

물론 가는 길에 오렌지주스도 마셔주는 건 잊지 않았다. 캬아. 역시 시원한 게 참 좋다. 목 넘김이 좋아.

좀 더 어렸을 때는 초코우유가 좋았는데, 요즘은 오렌지쥬스가 더 좋다는 말이지.

....뭐, 둘 다 여전히 초딩입맛인 거는 매한가지지만은.

또 복도를 열심히 걸어가며, 나는 잠시 서은이에 대해 생각했다.

한서은. 나이로는 중학교 3학년인 여자애.

원작에서는 만화 후반부에 빌런으로 출연.

홀로 대한민국에 전산망을 망가트리고, 최악의 빌런들을 모아 놓은 송도수용소의 보안시스템을 무력화해 대탈옥을 일으킴.

이게 바로 [스타더스트!] 이슈 120~150까지의 메인 이벤트인 '한국대재앙'시기를 연 사건이다.

'한국대재앙'이벤트에서 최종빌런으로 등장한다.

이후 이슈에서는 사망하여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남자처럼 숏컷을 하고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성인으로 등장한 그때는 백발을 늘어트린 체, 자신이 발명한 온갖 무기로 스타더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결국, 스타더스에 의해 저지되고 사망.

그때의 별명은 하얀 마녀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모습을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냥 단 걸 좋아하고 입이 좀 거친 여중딩일뿐.

한서은. 원작에서의 활약을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천재이다.

주로 특기는 컴퓨터 해킹과 발명. 사실 뭐 머리가 워낙 뛰어나 못 하는 게 없다. 사실상 작가가 만든 파워밸런스 붕괴 캐릭터. 그렇기에 원작 후반부에 등장하는 거겠지마는.

얘도 인생 스토리가 참 기구하다.

어렸을 적부터 한은그룹의 실험쥐로 길러진 일생.

초능력자를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명목하에 온갖 불법실험을 실행했고, 결국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다.

수백 명의 죄 없는 아이들을 갈아 넣어서 결국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갖춘 4명의 아이들을 만들어냈다.

그중 한 명이 우리 서은이. 연구자들이 통칭 '초상지능'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직접적인 초능력을 개화했다. 전기공격이라던지, 얼음을 내뿜는 능력이라든지...

그렇게 각성 이후로도 한은그룹 수뇌부의 지시로 계속 끔찍한 실험을 계속해나가던 그놈들.

아이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4명이서 같이 서로 다독이며 버텨나갔다.

그러나 그러던 중,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정신적 지지대였던 그들인 만큼, 서은이를 포함한 남은 세 명이 느꼈을 충격은 너무나도 컸고.

결국 너무 큰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 한 명의 능력이 폭주하여, 그 실험실에 있던 모두가 휘말려 사망하게 된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여기 서은이가 살아남았으니까.

그렇게 홀로 살아남은 서은이는 한은그룹의 눈을 피해 이 지하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내가 찾아오기 전까지, 홀로.

내가 없던 원작에서, 그녀는 계속 혼자서 한은그룹을 추적했다. 그 끔찍했던 참사 이후로 몸을 숨긴 한은그룹 수뇌부들을 징벌하기 위해.

결국, 그녀는 홀로 그들을 다 찾아내어, 복수에 성공하게 되지만.

결국 복수후에 남는 건 허무함뿐.

지독한 공허감에 몸을 떨던 그녀는 결국 살짝 어... 맛이 가 버린다. 갑자기 자기와 형제자매들이 이렇게 된 거는 무능한 국가와 히어로 때문이라며 테러를 저지르며 빌런이 되니.

물론, 이제는 내가 나서서 서은이가 그런 빌런이 되게 납두지 않을 거다.

잠깐, 생각해 보니 이미 나랑 공범이어서 빌런인 거 아닌가? 어....

정정한다. 내가 나서서 서은이가 그런 '미친' 빌런이 되게 놔두지 않을 거다. 적당히 빌런인건 몸에도 좋다고.

내가 살던 원래 세상을 따라 한 세계인 만큼, 대한민국에서는 히어로보다는 빌런이 되는 게 나은 법이다.

원래는 뭐 한서은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고 그저 기술쪽으로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지만 말이야, 지내다 보니 이 꼬맹이한테 정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개죽음을 맞게 둘 수는 없지.

그런 생각 하며, 나는 어느새 도착한 메인 섹터로 들어섰다.

***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는 수많은 모니터들의 향연.

어느 모니터는 CCTV를, 어느 모니터는 무슨 자료를.

눈알이 핑핑 돌아갈 것만 같은 이 공간.

이 지하 기지의 메인 섹터다.

흠, 이 공간도 이름 붙여주면 더 멋지지 않을까.

감시센터?

자리에 앉아서 무언가를 바쁘게 하는 서은이.

그 옆에서 같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수빈씨.

"서은아, 뭐하고 있냐?"

내가 가까이 다가가며 묻자, 서은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날 봤다.

"아 오빠, 일로 와서 이거 좀 봐봐."

"오, 뭔데?"

내가 가까이 가서 보자 그녀가 보여 준 건...

"제 13회 국제 아이스크림 페스티벌?"

"그래! 이거 한국에 처음으로 오는 거야. 내가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다음에 여기 가자. 수빈언니도 함께."

"엄... 그래..."

옆에서 수빈씨도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수빈씨...

"음, 그래. 그래서 서은아, 아이스크림 축제가 가고 싶었구나."

참. 이렇게 보니 서은이도 많이 밝아진게 느껴진다.

처음에 만났을 때 상처 입은 새끼 고슴도치처럼 날 경계하던 게 엊그제같은데...

이제는 같이 아이스크림 축제도 가자고 하고. 대체 세상에 아이스크림 축제같은 게 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래. 순수하고 밝으니 좋네. 좋긴 한데...

그 뭐 일하고 있던 걸 아니었니?

난 막 모니터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길래 또 뭔가를 계획하고 있구나! 이러면서 기특하게 생각했는데.

...아이스크림 축제에 갈 계획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 나이 먹고 아이스크림 축제에 갈지는 몰랐는데 말이지...

"어쨌든 그거는 뭐 가면 되는 거고. 그래서 우리의 다음 목적은 뭐 계획해 둔 거 없어?"

"다음 목적?"

내 말을 들은 서은이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흠....'하면서 무언갈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일단 오빠가 말한 게 뭐였지? 선한 사마리안?"

"어. 근데 그건 또 대규모 테러라, 한 주 간격으로 바로 실행하기는 뭐 해.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준다고. 좀 이제 그 다크나이...가 아니라 그 배 테러 사건이 잊혀질 때쯤 팡! 하고 터트려 줘야지."

"그래, 그럼 뭐 한다고 했지? 빌런 제거?"

"그래. 남는 시간에는 그거나 해야지. 뭐 추천할 만한 빌런 있어?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

"흠... 오빠가 원하는 게 뭐였지? 오빠가 말한 그 테러를 일으킬 예상도인가 그걸로 정한다고 하지 않았어?"

서은이가 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테러 예상도. 라고 말하고 원작에서 나중에 테러를 일으킬 애들이라고 풀어 읽으면 된다.

대충 내가 아는 무엇무엇 방법을 통해 아는 거라고 설명했던 건데...

"저번에 제일 중요한 애들 두 명은 이미 제거해 둬서 괜찮아. 이제는 그냥 내가 준 리스트에 있는 애들 중 아무나 하면 될걸?"

"아 그래? 어디 보다... 수빈언니, 그 빌런 리스트좀 띄워주세요."

"응!"

힘차게 대답하며 컴퓨터를 조작하는 그녀.

그래도 같이 산지 한 주 정도 됐더니, 이제는 좀 적응한 거 같은 모습이다.

나를 좀 무서워하길레 한 주 동안 그거 달랜다고 힘들었지. 이제는 괜찮아진 거 같기도 한데 나를 아직도 좀 무서워하는 거 같다. 아니, 그래도 이제 같은편인데 해치지 않아요. 저번에 너무 겁을 줬나.

"어디 보자... A급 빌런들 중에, 얘 어때? 순간 이동하는 놈. 텔레포터."

"걔? 아 걔 죽이기 힘들꺼 같은데."

내가 몰래 슥삭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염력으로 몸고정, 그다음에 머리쾅이나 총쓰기 둘 모두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으면, 염력으로 몸 고정이고 뭐고 그냥 슥- 빠져나가서 곤란하다. 곤란해!

"오빠, 원래 곤란한 적일수록 먼저 해치워야 하는 거야."

"하아. 그런가."

그래, 매도 먼저 맞으라고.

저놈부터 일단 족쳐보자.

그러니 제발 나를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인거처럼 한심하게 보지 말아 줄래?

"알았어, 슬슬 준비해야겠네. 그리고 서은아."

"응?"

"너 아까부터 오빠라고 하더라. 컨셉 이젠 벗어던지기로 했냐?"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눈치챘는지 빨개지기 시작한 서은이의 얼굴.

'아, 수빈언니한테 언니라 하다 보니...'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하길래 재빨리 빠져나왔다.

얘 막 부끄러우면 나한테 소리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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