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지하기지
"끄... 끄아아아악."
"형, 이상한 소리 좀 내지 마요."
"나쁜, 놈아. 오빠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면.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오빠라고 하지 마요. 어쨌든, 거기 누워 있으면 좀 나을 텐데 뭘 그리 엄살이에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서은이의 시선에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아니야, 나 진짜 아프다니까?
이곳은 서울 어딘가의 깊숙한 지하.
바로 천재 헤커이자 못 만드는 게 없는 천재 과학자, 한서은의 지하 기지였다. 물론 아직 중3밖에 안 되는 꼬맹이긴 하지만.
나를 사칭하는 추종자들이 일으킨 테러를 무산시키자마자 텔레포트로 이곳까지 온 나는, 다시 쓰러졌다. 연속으로 순간이동 하니까 죽겠어. 심지어 여기가 너무 깊은 지하이기도 하니...
그래도 이번에는 서은이가 만들어둔 피로회복캡슐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덜 아프기는 했다. 아니, 이런 게 있었으면 어제 좀 알려주지. 어제는 아예 하루종일 기절해 있었건만.
심지어 이번에는 나만 이동한 게 아닌, 다른 사람 한 명을 같이 끌고 이동했으니 두 배로 힘든 거다.
대신 서은이가 만들어 놓은 이 피로회복캡슐인가 뭔가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짜 쓰러졌을 거다.
"끅, 그래서. 이분은 왜 데리고 오라고 한 거야?"
나는 그러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자신이 주목을 받자 '히끅'거리며 놀라는 그녀.
긴 검은색 생머리를 늘어트린 체 쥐 죽은 듯 눈치를 보며 앉아있는게 좀 짠하기는 했다.
심지어 미모까지 받쳐주니 왠지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
8명의 추종자들 중 내가 유일하게 살려 둔 그녀.
사실 히어로 협회와 스타더스에게 선물로 주려고 살려놓은 건데, 서은이 말만 듣고 그냥 데려왔다.
"아."
컴퓨터 화면으로 뭔가 바쁘게 하던 서은이가 의자를 돌려 우리 쪽을 보았다.
서은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묻기를.
"언니....가 아니라 누나. 누나, 이수빈 맞으시죠?"
"어, 어. 그, 근데 어떻게 알았어?"
"전 다 알아요."
시크하게 말하는 서은이. 근데 잘 보면 뭔가 콧대가 좀 높아진 거 같다?
쪼그만게 저렇게 말하니 그냥 귀엽다. 괜스레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기분.
근데 저분 이름이 이수빈이었구나. 생각해 보니 아직 이름도 몰랐었네. 이수빈이라. 뭔가 굉장히 흔한 이름이구만.
"자, 그래서 서은아? 우리 자칭 나를 추종하신다는 이수빈씨를 왜 데리고 와야 했는지 설명해 줄레?"
내가 입을 열자 또 몸을 흠칫 떠는 그녀.
아니, 이렇게 심약한데 대체 테러는 어떻게 하셨대.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굉장히 당황스럽다.
"아, 저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려고요."
서은이는 무심하게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잠깐, 도와준다고? 너를?
서은이의 말에 나뿐만이 아닌 이수빈 그녀도 상당히 당황해 보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 서은아. 내가 잘 이해를 못하겠거든? 그러니까 오늘 처음 본 테러리스트를 갑자기 납치해서 대뜸 널 도우게 하겠다고? 어...음... 그전에 너가 자다가 저분에게 칼빵 맞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뒤에서 그녀가 '칼..빵 안놔요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곳은 냉혹하고 비정한 에고-베이스. 목소리가 작은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하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서은아, 너가 아직 중학교 3학년이라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 같구나. 이 세상은 막 사람 납치해서 일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조용히 일하는 세상이 아니야. 앙심을 안품겠니? 너가 가진 정보를 다 탈취해서 런하던가 너한테 복수하던가 둘 중 하나란다. 애초에 너를 어떻게 도와 준다는지도 모르겠지만."
뒤쪽에서 누가 고개를 붕붕 휘둘며 '배신 안 할게요오...'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말한 거긴 하지만.
내 일장 연설에 서은이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니, 이놈이? 안 되겠다, 아빠의 마음으로 따끔한 훈육을 해 줘야지.
내가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서은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 이수빈 언니."
"으, 응?"
"언니 부모님, 한은그룹 연구원들이셨죠?"
그 순간, 이수빈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
'아, 아, 아니야...'라며 부정하기 시작한 그녀였으나, 그런 모습을 보며 서은이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언니, 언니도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한은그룹, 그놈들한테."
"어...?"
"언니 부모님도, 그때 그 '참사'에 돌아가신거 아니에요?"
서은이의 말에, 이수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서은이한테 너 컨셉 풀려서 언니라고 하고 있다며 핀잔을 주려고 했던 나도, 한은그룹과 '참사'가 언급되자, 진지하게 경청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딥웹에서 쓴 글들 봤어요. 언니도 한은그룹 싫어하잖아요. 다 죽여 버리고 싶다면서요."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요? 언니 차단 프로그램이 허점이 좀 많더라고요. 새로 만들어야겠어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서은이는 이수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수빈이 서 있는 서은이보다 더 크다는 게 좀 웃기기는 했지만, 지금은 굉장히 진지한 순간인 거로 보이니 별말 않기로 했다.
"저는 한은그룹 수뇌부를 찾고 있어요. 전 그 새끼들 때문에 인생이 망했었어요. 그놈들 찾아서, 찾아서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에요. 그래야 제 한이 풀릴 거 같아요."
언니,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서은이에 말이 그렇게 끝나자, 이수빈은 눈물을 왈칵이며 서은이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내가, 내가 도와줄게!"
"고마워요, 언니."
그러면서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어....
그, 하얀 머리칼을 가진 서은이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이수빈이 서로 껴안으니 흑백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같기는 한데 말이야.
나만... 나만 지금 감정선을 못 따라가겠나?
대체 둘이 갑자기 뭐하는 거니...? 뭐 말 몇 마디 나누더니 서로 울컥하며 껴안어...?
그렇게 여자 둘이 껴안는 모습을 보며, 홀로 남자인 나는 굉장히 뻘쭘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냐 대체....
***
이수빈.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졸업.
25살로 나이는 나랑 동갑.
어렸을 적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셔서 홀로 보조금으로 생활함.
중학생 때부터 히키코모리처럼 집에 박혀서 컴퓨터만 연구해 컴퓨터 기술은 수준급.
얼마나 수준급이냐면, 서은이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해 하나도 못 하겠던데.
주로 활동은 딥웹에서 사이버테러 대행해주며 경제생활.
이번에 내 추종자라며 테러에 나온 이유는....
"뭐라고요? 얼떨결에?"
"네... 채팅방에서 막 에고스틱을 추종한다며 뭐라 뭐라 하길레... 저도 거기 끼고 싶어서...'
"....."
뭐야.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 추종자도 아니라는 거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수빈. 뭔가 착해 보이는 이름과는 다르게, 그녀는 실제로 보면 약간 무섭게 생겼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장신이라, 무표정으로 있으면 학창 시절 기센 일진이 생각나는 느낌.
...근데 어째 생긴 거와는 다르게, 어찌...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요?"
"네... 제가 집에만 있고 학교수업도 딱 졸업할 정도로만 나갔어서..."
"...."
어째서 듣는 내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지.
뭐, 그녀는 전체적으로 무해해 보였다.
물론, 여전히 수상한 점은 남아 있긴 한데.
일단 그녀는 내가 빙의한 이 세계, [스타더스트!]만화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나온 적이 없다는 건, 사실 뭐 큰 임팩트를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그런 엑스트라였다는 거지. 마치 나처럼.
"알겠습니다. 이수빈씨, 저희 크루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네...넷!"
나는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그녀가 말을 하다 혀를 씹어서 얼굴이 붉어진 거는, 모른척 해주기로 하자.
"...우리가 언제부터 크루가 있었데."
서은이가 저 뒤에서 중얼거린 말도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 사람이 3명인데, 이 정도면 크루지 뭐!
***
이수빈씨는 지하 기지로 짐을 옮겨 여기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서은이 옆에서 같이 살면서 배우고 협력하고 한데나 뭐라나.
자주 여기로 왔다 갔다 하면 주목받을 수도 있기에, 이렇게 하는 게 좋다는 게 서은이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불안하다.
차라리 내가 그녀가 원작에 나오는, 내가 아는 캐릭터라면 모를까.
진정한 성격도, 속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 서은이 옆에 붙여둔다? 뭔 일 날 줄 알고?
그렇기에, 나도 이 지하 기지로 아싸리 집을 옮겼다.
서은이에게는 다른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녀도 대충 내 걱정을 아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지.
원래 수빈씨를 알고있는 건가?
그렇게 깊은 지하 이곳에서, 나와 한서은, 이수빈 총 세 명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 사는 거라, 좀 그림이 이상하긴 한데.
서은이는 중학생이고 수빈씨는... 뭐, 확실히 미녀이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다.
애초에 내 마음은 늘 스타더스, 신하루 그녀에게 가 있다. 이 세계에 왔을 때 다짐한 게 이번 생은 하루 그녀를 위해 살겠다 였으니.
물론 그녀와 내가 이어질 날은 평생 없겠지만. 하하.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여럿이서 사니 뭐 혼자 살 때보다는 시끌벅적 재미있네.
"형, 냉장고 문 열어두고 나온 거 알아요? 이러면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고요!"
"나? 야, 나 냉장고 문 열은적 없어!"
"서, 서은아. 그거 내가 열어둔 거 같애. 미, 미안...."
"앗! 아...괜찮아요 언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헤헤."
"...와, 내가 한 줄 알았을 때는 뭐라 뭐라 하더니."
"....."
서럽구만 서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