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741화 (741/741)

Epilogue (2)

쇼핑을 마친 도진과 소담은 우선 도진의 집으로 돌아왔다.

약속은 초저녁이었으니 아직 오전인 지금 시간은 넉넉했고 오늘은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날이었다면 밖으로 나간 김에 외식을 했겠지만 오늘 점심은 우연히 시간이 맞아 동생들과 함께 먹기로 했던 게 집으로 돌아온 이유다.

"안녕! 유진아. 호진아."

"어서 와요, 누나!"

"왔어요, 언니."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소담을 유진이와 호진이가 반겨준다.

유진이와 호진이도 성인이 되었다.

유진이의 그룹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이미 오래 전 이야기고 요새는 현역이면서도 아이돌계에서는 원로 취급을 받고 있으니 참,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하는 도진이었다.

호진이는 차원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

바할라가 출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차원문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전도유망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는 게 보여 도진은 전생까지 포함하여 미소지을 수 있었다.

과거의 동생들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 과거를 되돌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빛나고 있는 동생들을 볼 수 있어 또 감사하고 기쁜 것이다.

그리고 또.

전생과는 달라진 소녀가 한 명.

"상미야."

"오셨어요."

도진네 집에서 앞치마를 하고 부엌에 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윤상미다.

음식 솜씨가 대가의 영역에 이른 도진의 어머니, 서정원의 노하우를 모조리 흡수한 상미는 도진네 집 주방의 주인과 같았으니 유진이와 호진이가 상미를 특히나 지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뭐 해 줄까?"

그런 상미의 곁에 도진이 앞치마를 하고 서면서 물었다.

주방에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묻는 그 모습은 또한 신혼부부와 같았고 자연스러우며, 두 동생이 보기에 더없이 좋았다.

"밥이 거의 다 되었으니 그것만 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이는 두 사람의 동선은 겹치지 않지만 조화롭다.

이 또한 세월 속에서 쌓이고 또 쌓인 인연의 연속이니 조화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두 동생은 또 같은 생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유진이랑 호진이랑 식탁 세팅할게."

"응, 부탁해. 소담아."

이 자리에서 결코 소리 내어 말해서는 안 되니 머릿속으로만.

하지만 혼자 생각하기엔 답답하니 피가 이어진 남매답게 두 눈으로 대화한다.

'도대체 왜 안 사귀는 거야?'

'내 말이.'

* * * *

점심을 넷이서 함께 먹고 잠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다 도진은 소담, 상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슬슬 약속 장소로 가야 할 시간이었고 도진이 직접 슈킨팍시를 몰았다.

처음 오성아를 통하여 탔던 첫 차부터 세어 어느새 3대째의 슈킨팍시다.

이 슈킨팍시 또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한 요소였다.

-너도 어느새 서른이 가깝구나.

-그렇네요.

스승 위지혁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었던 게 언제인가 아득하기만 한데, 또 모순되게도 '어느새' 다시 서른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서른을 앞둔 지금. 머릿속에 스쳐가는 기억들로 참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걸 되짚으며 실감한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슈킨팍시가 쭉 뻗은 도로를 막힘없이 달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햇빛에 밝게 빛나는, 그러나 눈부시지 않은 아름답고 거대한 건물이었는데 하오문의 소유로 소위 '6성급'으로 취급되는 고급 호텔이다.

이 호텔에 파티에 사용되는 홀이 여럿 있었으니 그중 한곳이 바로 오늘의 약속 장소, 오성아와 주정아의 딸인 오소율의 생일 파티장이었다.

돌잔치도 아니고 다섯 살 생일 파티를 번잡하고 소란스럽게 벌일 생각은 없었기에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파티가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이렇게 좋은 파티장을 대절한 건 그 '아는 사람들'의 면면이 면면인지라 모이는 게 쉽지 않다 보니 이렇게 조카의 생일 파티가 명분이 된 것이다.

"삼초오오오오온!!"

파티장 안에 들어선 도진은 입장과 동시에 빠르게 쇄도하는 귀염둥이를 받아내야 했다.

도도도도 달려와 폴짝 뛰는 자그마한 귀염둥이를 안아드니 대번에 생글생글 웃는 천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삼촌!!"

"그래, 우리 소율이."

이제 다섯 살이 된 조카를 도진은 눈조차 뜨지 못하던 꼬물이 시절부터 보아 왔다.

병원에 간 그날.

오성아가 아이를 보자마자 꺄하하 웃으며 사진을 보여주었고 모였던 이들이 다 같이 웃었으니.

-야, 이거 그냥 주정아 아니냐?

아이의 얼굴이 주정아의 어릴 적 사진이랑 완전 붕어빵이었던 것이다.

-와, 신기하다. 대용이도 보이네.

그리고 오대용의 얼굴도 보여 다들 또 웃었다.

오소율.

이제 다섯 살이 된 이 아이는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구김살 없이 밝게 자랐고 특히나.

"삼촌! 왜 이제 와!"

"그래, 그래. 미안."

도진을 잘 따랐고 도진도 소율이를 귀여워했다.

"어서 와."

"그래."

소율이를 안고 가니 무언가 시무룩한 얼굴의 오대용과 주정아가 반겨준다.

그 이유를 옆에서 푸후후 웃는 유지은이 말한다.

"기껏 뇌물 공세하면서 딸 환심을 사고 있었는데. 도진이가 오니까 소용이 없네."

후배란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는 유지은. 그리고 그 옆에서 오성아가 말을 보탰다.

"소율이의 애정 순위를 아느냐. 주정아가 1등, 김도진이 2등, 오대용은 3등에 불과하다."

"아, 거 너무하네!"

"아빠! 좋은 자리에서 화내면 안 돼!"

"뭐?"

"꺄하하하하하!!"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아이는 신기하다.

상상도 못했던 말을 하는가 하면, 못할 거라 생각했던 걸 해내는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런 걸 모르는구나, 하는. 정말로 아이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알려주는 귀여운 조카를 엄마인 주정아에게 넘겨주고 도진은 자리에 앉았다.

소율이는 엄마 껌딱지라 무조건 엄마가 곁에 있어야 하는 아이였다.

특히나 더 어릴 적엔 정말로 낯을 많이 가려 몇 번 본 사이인 이모나 삼촌에게도 안기려 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도진만은 예외였다.

그러니까 엄마인 정아가 1등, 2등이 도진이라는 거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 2등은 아빠인 오대용이다.

"그래도 귀엽죠?"

"그렇지."

토끼와 같은 하얀 얼굴로, 그리고 여기에 세월의 힘으로 여우의 매력을 더한 약리지의 말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예뻐진 약리지는 그 이상으로 실력과 명성이 높아졌고 이제는 의선약가의 부원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서른도 되지 않아 부원장, 그러니까 가주 다음의 자리에 오른 건 의선약가의 역사에서도 약리지가 최초였다.

허나 그럼에도 의가 특성상 상당히 보수적인 가문 내에서조차 별말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만큼 약리지의 실력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도 약리지는 자만하지 않고 의선 약지후의 후계로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의술을 베풀었으니 자연스레, 제3 세계의 의료 봉사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흘렀다.

"…잘 지내고 있더라구요."

"그래."

그리고 나오는 이름이 그녀의 소꿉친구, 남사현이었다.

남사현.

명문 호협남가 출신으로 숭무고에 입학할 만큼 뛰어난 무공보다 그 이상으로 훌륭했던 인품이 더 유명했던 후배였다.

당시 약리지가 평하길 '너무 맑은 물'.

그러니까 평범하게 착했던 약리지로서는 버티기 힘들 만큼 남사현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협객이요 착한 사람이었단 말이다.

그러면서도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또 그러면서도, 그 협객으로서의 마음을 잃지 않고 실천하던 후배라 도진은 특히나 남사현을 높이 평가했다.

본래 세상엔 천마가 아닌 그런 협객들이 가득해야만 했으니까.

허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마두(魔頭)가 들끓었고 천마를 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꼭 그런 착한 사람에게는 시련이 찾아오곤 했으니 남사현도 빗겨가지 못했다.

호협남가가, 일부가 무형독과 얽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숭무고의 학생이던 시절 일어났던 독살 사건에서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생각 이상으로, '일부'가 생각보다 더 커서 호협남가는 가세가 크게 기울고 말았다.

얼마나 큰일이었냐면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남사현이 다음대 가주 자리를 물려받았을 만큼,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명문 하나가 그렇게 남사현을 끝으로 저물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남사현은 그 평가를 틀린 것으로 만들었으니 도진이 인정한 그 인품으로, 호협남가의 현판에 묻은 더러운 오물을 닦아낸 것이다.

호협(豪俠).

그 이름에 걸맞는 일들을 가주로서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현판을 닦았다.

이번에 약리지가 갔던 제3 세계의, 치안이 불안정했던 나라에서의 봉사 활동도 그랬다.

의선약가가 열악한 환경에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받던 이들을 치료하였고 호협남가가 그 원인 중 하나였던 흑도 문파를 토벌했다.

말로는 평범한 봉사 활동. 그러나 실제로는 보수조차 받지 않고,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도진도 남사현과 같은 '정파의 협객'이 늘기를 바라며 몰래 후원하고 있는 것이었고.

-축하한다.

-그래, 고맙다.

도진이 약리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축하를 위해 많은 이들이 방문하였다.

따로 손님을 받지 않고 선물도 거절하지만, 그래도 찾아와 얼굴 도장을 찍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개중에는 한때 S4라 불리며 묶였던 무진혁도 있었다.

진나라의 국토 개발과 관련하여 수많은 단체들이 연합하였는데 개중 오늘 이곳 다른 홀에 모이는 한 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무진혁이 들른 것이었다.

되돌릴 수는 없는 관계지만, 그래도 오랜 노력으로 외면하지는 않게 된 무진혁의 축하를 오대용이 담담하게 받는 소리를 들었다.

"삼촌!!"

그리고 다시 한 번 발생한 조카의 습격에 도진의 감각은 그쪽으로 집중된다.

활짝 웃으며 달려와 안기는 소율이를 안아들었다.

"소율아!"

쫓아온 엄마가 부르지만 소율이는 도진을 꼭 붙잡고 어리광을 부렸다.

"삼촌이랑 놀 거야."

"어휴. 얘가 누구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셀까?"

"너 아니야?"

"끄응."

도진의 말에 주정아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네가 그렇게 어리광을 다 받아주니까 소율이가 그렇게 된 거잖아."

"어허. 이걸 내 탓을 한다고? 귀여운 소율이 탓을 안 하고?"

"선배. 소율이 진짜 귀여워 하시네요."

"귀엽잖아. 그지?"

소율이는 대답 대신 귀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약리지는 생각한다.

'애기가 저렇게 귀여우면 선배도 결혼하면 될 텐데.'

좋은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사랑의 결실에 행복해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 옆에는…… 내가 있으면 더 좋고.

몰래 그런 생각까지 하는 약리지였다.

다만 그 생각을 결코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엔 소담과 상미는 물론이요 천마신교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사귄다거나 결혼한다거나 애를 가진다거나.

그런 말을 이 자리에서 하는 건…… 암묵적으로 체결되어 있던 핵 억제 조약을 깨는, 핵 발사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귀여우면 자네도 슬슬 가정을 꾸려보는 건 어떤가?"

'…….'

"…………어?"

…그 발사 버튼이 눌렸다.

아무렇지 않게. 마치 밥이나 한 끼 먹으러 가자는 뉘앙스로.

끼긱끼긱.

약리지의 고개가 힘겹게 돌아갔고 거기에는.

"할배!"

"아니 욘석. 그런 단어는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도진에게서 소율이를 안아들려다 손녀의 거부로 실패한 오군성이 있었다.

경계를 넘어선 고수.

그러니까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의 발언으로 부자연스럽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자군 오군성은 도진을 마주하여 씨익 웃는다.

그것은 연륜이 가능케 한 발언이었고 도진은.

생각했다.

과거를 생각한다.

그럴 수 없는 환경이었다.

엄두도 낼 수 없는 환경이었고.

그래서 아예 자신에게서 도려냈고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함께한다거나 이내 가정을 이룬다거나.

그리하여 얻게 된 결실에 애써 눈물을 참으며 웃음 짓고, 그 결실을 함께 소중히 키운다거나.

바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안다. 아주 잘.

실패하고 후회하고 울며 가슴을 쳤던 것들을 되돌리고 바라던 형태로 이루었다.

그러니까.

도진은 생각했다.

이제는, 그것을 바라도 되는 때가 된 것 같다고.

용기내어 결심했다.

그래서 마주 웃으며 오군성의 말에 답했다.

"그렇네요."

"응?"

"이제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해도 될 것 같네요."

"…허어."

오군성이 입을 벌렸다.

던지긴 던졌는데,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요 근래 제법 평화로웠는데.

스으으으으으-

주변을 잠식하는 어떤 분위기에 오군성의 팔뚝에 오소소, 닭살이 돋아올랐다.

'이거, 아무래도.'

"도진아."

다시 한 번.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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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진나라가 세계의 강대국이 되고 천마(天魔)의 이름이 확고부동한 천하제일인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전설로 무림에 군림하던 어느 날.

늦은 밤 도진은 침대에 누웠고 그 곁에 소담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소담은 여전히 또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순수하게 미소지었다.

눈맞춤을 하고 거리를 좁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애정을 가득 담아. 그러나 길지 않게. 어디까지나 사랑을 확인하는 입술만을 맞추는 키스.

"잘 자."

"응."

품에 안으니 아기새처럼 파고들어 눈을 감는다.

그 사랑스러운 등을 쓸어주며 도진 또한 눈을 감았고.

"……."

심상세계에 선 순간 세상이 얼어붙은 듯 싸늘한 기세를 품었다.

이제 도진의 심상세계에는 두 스승이 없다.

천마(天魔) 위지혁, 사신(死神) 장호.

한때 도진의 심상세계에 깃들었던 무림의 두 전설은 세상의 눈부신 발전과 끊임없는 궁구(窮究)로 이내, 자존(自存)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되살아나진 못하였으나 실존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날 품에 안겨 펑펑 울던 장소유를 도진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도진은 따로 이유가 없는 한 잠들고서 심상세계에서 눈뜨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구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심상세계에서 도진이 눈을 뜬 것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대해 우선 사과하지."

시커먼 양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였다.

2미터에 가까운 남자는 비현실적일 만큼 비율이 좋아 사람 같지가 않았다.

피부가 새하얀 그는 그러나 사람이 본능적으로 꺼리게 만드는 차가운, 죽음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으니.

"저승사자. '길'이라고 한다."

도진은 스스로를 저승사자라 말한 그의 이름에서 고차원적인 힘, '권능'을 느꼈다.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래. 너무나 거대한 행성이 인간의 모습으로 압축되어 형상화한 듯한 느낌의.

오래 전 도진은 이미 이런 존재감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저승사자. 내가 아는 게 맞다면 스승님들을 찾아온 건가?"

저승사자라 하면 저승에서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죽은 사람의 혼을 데리러 오는 자들이다.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저 길이란 자의 격이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지만…….

도진의 물음에 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승사자의 본래의 임무는 혼을 데려가는 것이 맞지만 이번은 예외다. 그것은 사고였으니까."

사고.

저승사자의 입에서 나온 순간 그것은 특히나 특별한 의미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그 둘이 아닌 너. 태동한 새로운 별을 만나러 온 것이다."

* * * *

길이 말했다.

"평범한 존재는 죽어 혼이 된 시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애초에 자아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지. 그러니까 자동화된 시스템에 따라 판결이 내려지고 그대로 윤회의 법칙에 따라 환생한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존재들이 있다. 죽어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영혼의 격을 높인 자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격을 올린, 이 무한한 우주에서도 유의미한 시간을 살고 존재감을 가지게 된 자들. 우주에 별로서 자리매김한 자들이니 성좌(星座)라 부른다."

"그 정도의 존재가 죽으면 저승에 오게 된다. 삼도천을 따라 낮은 차원의 저승에서부터 내가 있는 고차원의 저승까지 격에 맞춰 나뉘어 가게 되지."

그것은 거대한 우주의 법칙이었다. 그래, 우주.

그러니까 설령 별의 자리에 오른 자들이라 하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 우주 단위의 재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진우주의."

…흔히 인류가 말하는 우주는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다.

그리고 그 소우주가 열셋이 모여 하나의 우주이면서 차원을 구성한다.

동시에 이 차원은 파문과 같아서 수없이 분열하니 수많은 '닮은 차원'이 확장하는 우주처럼 퍼져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우주조차 아주 거대한 나무의 수많은 나뭇잎 중 하나에 불과하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나뭇잎.

그 나뭇잎이 매달린 거대한 나무.

또 그 거대한 나무가 떠돌아 다니는 '우주'. 그것이 진우주(眞宇宙), 라고.

길은 말했다.

"이곳은 변방 중의 변방이다. 우주의 흐름에서조차 빗겨 나갔으니 본래 무공도 마법도, 그 외의 어떤 신비나 신화조차도 구현될 수 없는 우주였지."

"간단한 이야기다. 당장 너의 세계와 닮은 차원이었던 무림을 보아라. 제아무리 무공이 있다지만, 아니 오히려 무공이 있기에 너의 세계보다 오히려 더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순리이지 않았겠나?"

그랬다.

무공은 영성을 트이게 하고 사람이 한계를 초월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비단 육체만이 아닌 '지능'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과학이 발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무림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일정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문명이 정체되어 있었다.

부자연스러웠다.

"너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호흡으로 내공을 쌓을 수 있고 기술을 무예의 영역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무공의 등장은 갑작스러웠고 발전은 과학만큼이나 급격했지. 부자연스럽지 않나?"

부자연스러웠다.

"그것이 세계의, 차원의 법칙이란 것이다. 그 법칙 안에서 세계의 모습이 유지되는 것이다. 세계는 문명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작동한다."

현대에서 무림으로 넘어갈 때 부서지던 '과학'을 떠올린다.

그 이유를 길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게 됐다.

"그 세계의 법칙이, 그것을 아득히 초월하는 재해가 스치며 부서졌던 거다."

수천 개의 '차원'이 휘말릴 만큼,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의 재해라고 했다.

허나 도진의 차원은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기에.

닮은 차원에서 겨우 무공 정도의 최소한의 신비만이 발현하던 변방이었기에 스치는 정도에서 그쳤단다.

다만 그 스치는 것만으로도 차원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지고 말았으니.

"너희가 말하는 무림의 붕괴의 이유가 이것이었다."

"……."

"그리고 거기에 너의 스승들이 휘말렸고, 재해로 인해 너의 세계는 물론이요 저승의 시스템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예외가 생긴 것이다."

그랬다.

스승들은 말했다.

자신들은 본래 재판을 받아야 할 영혼이었으나 감히 놈들이 재판 운운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깽판을 친 뒤 탈출했다고.

허나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승은 평범한 자들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별의 자리에 오른 자들마저도 절대적인 시스템에 따르도록 구축이 되어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여 죽었던 시기의 스승들은 성좌는커녕 선계(仙界)에 들지도 못하였으니.

"너무나 큰 재해를 수습하느라 저승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고 너의 스승들은 본래 가야 할 곳이 아닌 낮은 차원의 저승으로 가고 말았던 것이다."

분류가 잘못되는 일은 사실 영겁에 가까운 시간동안 몇 번이나 있었지만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는 사소한 오류였다.

하지만 가장 높은 차원의 저승조차 재해로 인해 난리가 나고 수습에 바빴으니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손이 닿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방치한 그 사소한 일이 점점 커져 버렸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도 본래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특히, 시간을 거스른 것 또한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본래 시간이란 절대적인 개념이다.

창세신(創世神)급의 존재라 하여도 진실된 시간에는 감히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하위 개념으로서의 시간에는 개입의 여지가 있으니 그걸 건드리고 만 거다."

중요한 건 그 하위 개념의 시간마저도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되는 개념이라는 거고 회사로 치면 판매 수량을 20으로 적어야 되는 걸 920으로 적은 수준으로 대형 사고였다.

"애초에 하위 개념이라 해도 시간을 건드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건드리는 것 자체가 웬만해선 불가능하단 말이다. 하지만 이곳 차원의 시공은 재해에 휩쓸리며 불안정해졌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거지."

"그러던 중에도 세계의 억제력은 작용했다. 별의 자리에 오른 너라면 몇 개나 짐작가는 것이 있겠지. 이를테면……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없었고 그것을 아무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던 너의 두 스승."

그랬다.

도진은 말도 안 되는 성장을 하였고 천마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천마의 스승이 누구인가에 대해 사소하게는 언급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언급되는 경우는 없었다.

납득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가 끼어들었으니 세계가 그 존재를 지우려 들었던 거다. 하지만 영혼이었던 데다 세계가 정상적이지 않았으니 그런 형태가 된 것이지. 그 외에도."

'고대 무림의 언어'가 아무리 그래도 해석이 너무나 더뎠던 것도.

서적에서 '고대 무림의 흔적'이 너무나 적었던 것도.

심지어 제아무리 본인이 조용히 살고자 하였으나 전생과 달리 소림 속가 제자 우정한이 이번 생에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였던 것도 그 어긋남과 억제력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고.

길은 말했다.

도진은 길이 든 예시 이외에도 몇 개나 짚이는 것들이 있었고 그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그 세계의 억제력이 자신을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까지도.

"본래는 결코 연결되지 않았어야 했다. 세계의 억제력과 경계란 건 그만큼 단단한 것이거든. 실제로 예외가 된 이곳과 무림을 제외한 무수한 닮은 차원은 여전히 그 법칙이 유지되고 있다."

"닮은 차원이란 건…… 요새 말하는 멀티버스 같은 거겠지?"

"그렇다. 같은 모습이지만 퍼져 나가며 차이가 나기 시작하지. 이 세계와 닮은 무수한 차원들도 그렇다. 아주 많이 닮았지만 같지는 않지. 이를테면, 이곳과는 다르게 남북으로 한국이 분단된 차원도 있지."

"분단이라고?"

"그래. 그곳은 강제 징병이 당연한 것이어서 입대하여 일정 기간을 복무하여야만 한다."

"…그걸 그냥 받아들이는 세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닮았지만 같지는 않다고. 특히나 천마. 너의 세계와 무림은 이미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렸고 어긋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주의 본류를 향해 가게 되었다."

본류(本流).

이 또한 비슷한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오래 전. '마나'라는 것이 말했었다.

언젠가 합류할 주류의 흐름에서 나를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이 세계에 신비는 없어야 했다. 하지만 내공이 발현하였고 세계의 일부가 되었으며 마나마저도,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이 세계는 신비가 당연한 것이 되었으니 이내 신화마저도 현실이 되겠지. 그리고 그것이 물길이 된다."

이곳은 본래 말라비틀어진 황무지였다.

신비, 신화 같은 '물'이 존재하지 않던.

하지만 그 황무지에 재해로 인한 물이 스며들었고 지류에 닿는 물길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지류를 지나 이 세계는.

본류인 진우주에 다다른다.

"진우주에는 진실된 시간에 개입하는 시간의 자리가 있고 신이 자아내던 인위적인 실, 운명을 끊어낸 진필(眞筆)이 있으며 가장 태초에 가까운 창세신과 인간마저도 있지. 그런 것들이 있는 본류에, 이 세계는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아득하다.

태동하는 별이 된 도진마저도 그렇게 들릴 만큼, 진우주의 본류라는 건 아득한 이야기였다.

"이 세계가 본류로 나아가게 된 건 재해로 인한 사고다. 그러나 그 사고에서 파생된 사고를 우리 저승이 수습하지 못한 것도 사실. 그렇기에, 우리 저승은 이곳에 대한 사후 지원을 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사후 지원?"

"그래. 애초에 나 정도 되는 위계의 저승사자가 이곳에 와서 너와 대화하는 것부터가,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부터가 그 사후 지원의 일환이다."

"…그렇군."

이해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길'이란 저승사자는 전래 동화의 그런 저승사자가 아니라, 분명히 아주 높은 차원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격이 높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존재가 굳이 이곳,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방 중의 변방인 황무지까지 와서 도진의 심상세계에서 온갖 정보를 전해 주었으니 그 이유가 '사후 지원'이었던 거다.

"바로 본론이다만. 이 세계가 지류와 이어짐으로써 맞닥뜨릴 첫 번째 위협은 '마나'다."

마나.

그 이름 또한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카자카미 노보루를 쐐기로 하여 이 세계를 침식하려 들었던 '세계'.

"놈 또한 성좌로 그 성격을 대표하는 이명(異名)은 플래닛 이터(Planet eater). 세계를 흡수해 그 힘을 키워 나가는 존재다."

플래닛 이터. 놈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이름이다.

"놈이 눈독 들인 세계를 그냥 둘 리가 없으니 이 만남은 필연적이다. 너, 천마의 도발이 아니었더라도 말이지."

"그래."

알고 있었다. 말만 그러했지 마주한 놈의 속내는 이 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게 뻔히 보였다.

그러니까 도진도 상대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본래 이 세계에 승산은 없었다만, 태동하는 별이 생겼으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저승의, 나의 지원이 더해지기까지 했으니 승산은 충분하다."

"그렇군."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우. 천마의 이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무엇부터 해 볼까?"

그 천마다운 미소에 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선은…… 곧 열리게 될 '게이트'부터 시작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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