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1)
화창한 어느 날.
서울의 고급 호텔 라운지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척 보아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대단한 위세를 등에 업은 듯 보이는 그들은 바로 그 고급 호텔을 소유한 오너 일가, 군홍무가의 둘째를 수행하기 위해 차출된 무인들이었다.
군홍무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거대 무림세가로 정치권과 특히나 끈끈한 유대 관계를 자랑하는 무력과 권력을 동시에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가문.
그 가문의 둘째 도련님은 무진혁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10년 전만 해도 가주가 될 능력도 없었고 그럴 욕심도 없어 본부장을 지나 '실장님'이라 불리며 어디까지나 태어난 덕을 보는 인물이었다.
허나 그 실장님 무진혁이 자리에 욕심을 내어 이제는 군홍 무역의 부사장으로 상당한 실권을 쥐었으니 진나라와의 계약을 따낸 것이 주효했다.
높이 솟은 호텔의 통창 너머 풍경을 계열사의 부사장이 된 무진혁이 커피를 즐기며 두 눈에 담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소이자 건물인, 이 호텔보다 훨씬 높이 솟은 천마전을 중심으로 한 천마신교의 부지.
그 부지 안에 신비로운 푸른빛을 발하는 거대한 '문'이 있다.
차원문(次元門).
그 이름대로 차원을 넘어갈 수 있는 문이며 저 문 너머에는 새로이 탄생한 나라, 아직 국토의 일부밖에 개발되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이미 강대국으로 손꼽히며 이내 그 이상이 될 진나라가 있다.
후륵.
설탕을 잔뜩 넣은 블랙 커피를 홀짝이며 무진혁은 생각한다.
'세상이 진짜 상상도 못하게 변했어.'
저 문은 가장 먼저 한국과 바할라에 설치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으로 퍼졌다.
자동차나 배, 비행기로는 갈 수 없으며 오직 차원을 오갈 수 있는 문을 통하여서만 갈 수 있는 나라.
천마신교를 국교로 하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이들이 전통을 이어 건국한 나라.
다른 차원에 있는 진나라가 '이 세계'와 교역하는 시대가 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교역의 흐름에 무진혁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사장님.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수행원의 말에 무진혁이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러가지 이유로 무진혁이 진나라에 가는 날이었다.
차를 타고 도로를 지나, 신분의 확인을 거쳐 차원문의 앞에 섰다.
결격 사유가 없는 이라면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는 신비로운 문.
이 문을 넘기 위해 무진혁은, 지난 5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용서'를 구했다.
죄인은 이 문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무진혁은 죄인이었다.
학폭의 가해자였고, 그리 떳떳한 삶을 살지 못했다.
천마 김도진은 말했다.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건 피해자뿐이라고. 그 외의 누구도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고.
그러니까 무진혁은 결격 사유가 있는 죄인이었고 본래 이 문을 넘을 수 없었으며.
이 문을 넘기 위해 자신에 의해 피해자가 된 이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쉽지 않았다.
말뿐인 사죄로는 진실된 용서를 받을 수 없었고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간단한, 그러나 진실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인 '돈'을 먼저 썼다.
그것으로 대부분의 피해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다.
백억에 가까운 돈.
용서받기 위해 들인 돈이었고 그에게도 개인으로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부담이 되는 돈이었으나 오히려 '겨우' 그 정도로 용서받을 수 있었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그리고 남은 다섯 명에게 용서받기 위해 몇 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내가 왜? 왜 네가 잘 살 수 있게 면죄부를 줘야 해?
-싫은데. 넌 절대로 행복해서는 안 돼. 그게 세상 이치잖아. 사필귀정이잖아.
몇 날 며칠을 무릎 꿇고 빌었다.
곁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뉴스에서도 연신 떠들어대며 그의 과거를 폭로하고,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돌을 던져도.
멈추지 않았다.
-꺼지라고 이 개새끼야!!
비오는 날 흙탕물 묻은 신발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으나 그래도 용서 구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입에 들어간 진흙을 씹으면서까지 용서를 구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어.
-…두고 볼 거야.
약 백억으로, 몇 년의 시간으로 용서를 구하여 겨우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진혁은 그제서야 비로소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눈앞의 이 문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파아아-
신비로운 감각과 함께 차원문을 지났다.
중력도 느낌도 없으며 구분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찰나의 시간과 공간을 지나 다른 차원에 들어섰다.
저벅.
찰나 다른 감각에 휩싸였을 뿐인데 땅을 밟는 감각이 낯선 가운데 펼쳐지는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문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 분야의 명인들과 명장들이 만든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저 건축물은 진신문(進新門)이라고 했다.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문.
그 문을 넘어섬으로써 비로소, 방문자는 진나라를 보게 된다.
자연과 어우러진. 그럼에도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진보한 도시가 펼쳐져 있다.
이것이 단 3년만에 이룩한 대도시의 광경이라는 걸 알게 되면 거기에 또 한 번 경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세계의 건축 기술이 발달하고 그것을 무공을 익힌 사람이 수행한다지만 그럼에도 3년이란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첨단을 달리는 도시를 만들기엔 짧은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천마신교의, 진나라의 힘이었다.
진나라의 여황 주서린. 그리고 천마신교의 교주 김도진.
둘을 중심으로 하여 발휘되는 진나라의 저력은 그 어느 나라도 대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그것이 애국심이 되었든 무력이 되었든, 그리고 금력(金力)이 되었든 말이다.
진나라의 '신세계 국토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던 무진혁은 누구보다 그것을 몸으로 체감하여 잘 알았다.
군홍무가 '따위'는 먼지밖에 되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었고 그 흐름에 탔기에 군홍무가는 큰 이득을 보았고 무진혁이 실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진혁은 5년의 시간과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잃은 많은 것들과 이빨을 대체하기 위해 심은 임플란트를 오히려 자랑으로 삼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과거가 폭로당한 무진혁을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천마신교와 진나라가 만든 흐름에 기생하여 이득을 보아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도 천마신교와 천마를 욕하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으니.
무진혁이 '용서의 상징'으로써도 세상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하기 위한 무진혁의 5년이 극명하게 천마가, 천마신교가, 그리고 진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 주었으며 반면교사가 되었다.
죄를 지은 자는 이렇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그러지 않으면 결코 '인간'으로 살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그리고 이 기준은 개인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 단위에서도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니 역사 이래 최대의 사업이라는 진나라의 국토 개발에 참여하기 위해선 흠결이 없어야 했고.
무진혁의 사례처럼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었다.
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며 무진혁은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세계에서 가장 이상향에 가까운 도시다.
가해자의 인권을 부르짖는 바깥과는 다른, 철저하게 피해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
죄짓는 걸 두려워하도록 하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는 사회.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범죄율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게 나라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은 진나라의 황실이 만들고 또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이 자주적으로 그 시스템에 따르도록 하는 정신적, 물리적인 상징은 역시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 김도진이다.
무진혁의 숭무고 동기.
그 김도진은 지금…….
-교주님 지금 소담 여신님이랑 유아 용품 코너에 계신다.
소담과 함께 유아 용품 코너에 있다고 sns에 제보가 올라와 있었다.
프라이버시를 지킬 줄 아는 이들이었고 그것이 당연한 세계였기에 사진은 없다.
하지만 무진혁은 얼마든지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었다.
'아주 찰싹 붙어서 꽁냥대고 있겠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어서.
그리고 이 자리에 관련자들이 없기에 용감하게 소리내어 할 수 있는 한 마디.
"왜 안 사귀는 거야?"
* * * *
재생하는 무림의 세계에 새로이 건국한 진나라는 아직 세 개의 대도시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5년 만에 그 이상으로 국토를 개발하는 건 물리적으로 힘들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기에 세 개의 대도시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세계 어떤 나라의 도시와 비교하여도 앞설 만큼 대단한 도시를 지을 수 있었다.
그 세 개의 도시 중 차원문이 있는 관문 도시이기에 교통과 숙박, 쇼핑에 특화된 이곳에서도 손꼽히는 백화점의 유아 코너에 지금.
"이건 어때?"
"음…… 소율이가 좋아할까?"
찰싹 달라붙어 쇼핑하는 커플, 아니 당사자들이 아니라고 하니 커플이 아닌 남녀가 있었으니 도진과 소담이었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지 않았다 뿐이지 누가 보아도 커플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떨어져 있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어깨가 맞닿을 듯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눈맞춤을 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까 맞닿아 결이 얽힌 연리지(連理枝)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두 사람이다.
도진이 아이 옷을 하나 들어 소담에게 대었다.
소담이 곱고 여린 선을 자랑하는 미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아용 옷이 맞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담이 도진과 눈을 맞추고선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대는 거야?"
"소담이는 아가야. 대도 돼."
"아이. 뭐라는 거야."
토닥.
예쁜 손으로 주먹을 쥐어 도진의 어깨를 때리는데 당연하게도 충격은 전혀 없고 오히려 귀여운 애교처럼 보인다.
…뒤에서 대기하던 직원은 그것을 지켜보며 프로페셔널하게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도진과 소담은 유아 용품 코너를 계속 돌아다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눈맞춤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미소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장난치는 모습은 누구라도, 분명히 천생연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유아 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이것저것 살피고 또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두 사람의 아이를 위한 물건을 사러 온 것 같지만…… 아니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조카의, 친구의 딸의 생인 선물을 위해 사러 온 것이니까.
이건 어때. 또 저건 어때.
그러다 문득 안 그래도 사람의 넋이 나가게 만드는 소담이 한껏 꾸민 모습으로 싱긋 웃으니.
"우리 소담이, 오늘은 더 예쁘네."
"헤헤."
그렇게 칭찬을 하고 또 꽁냥댄다.
그리고 이윽고 결심을 하여 물건을 사고 결제, 포장하여 건네니 쇼핑백을 들고 다정하게 유아 용품 코너를 떠났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신혼부부에 가까웠으니 주변을 슬쩍 살피고서도 혹시 몰라 점원은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이다.
'…왜 안 사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