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화
카자카미 노보루의 핑거 스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행위였다.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말해 있어 보이는 허세.
허나 그것은 허세가 아니게 되었으니 보여주기 위한 행위와는 별개로, 실제로 카자카미 노보루가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두웅-!
거대한 마나가 움직이는 걸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쿠우웅-!
그리고 시커먼 어둠 너머에서 다시 한 번,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감염자들이 나타나 토벌대를 둘러쌌다.
천마 김도진이 조금 앞으로 나아간 것을 제외하면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 되었다.
몇 시간이나 이어졌던 그 싸움이 없었던 것이 된 것처럼.
간부 중 한 명으로 보이는 카자카미 우에토가 병신이 되었으니 토벌대가 조금은 유리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완전히 정 반대다.
토벌대는 단숨에 열세로 내몰리게 되었다.
에번드윅 공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번에 나타난 자들은 아까에 비해 그 수준이 훨씬 높았다.
마나 보유량뿐 아니라 무기를 쥔 자세에서부터 평균적인 경지가 최소 한 단계 이상 높은 게 드러났다.
그에 비해 토벌대는 체력과 내공을 제법 소모한 상태다.
만전이 아닌 상태로 아까보다 더 강해진 무수한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그들을 압박하는 것이.
'이것으로 끝일까?'
머릿속에 떠오르고 마는 그 가능성이었다.
이것으로 끝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당장 눈앞을 가득 채운 적들보다 더 강하게 토벌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긴 잠시의 공백을 카자카미 노보루가 파고들었다.
"이제야 조금 식은 머리가 굴러가는 모양이니 다시 한 번, 대화를 해보도록 하지."
"……."
거리는 먼데 목소리는 가깝다.
토벌대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 카자카미 노보루에게로 향했다.
"천마 김도진. 네가 말했지.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대화를 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묻지. 왜, 그래야만 하지?"
"이 세계는 절대적인 강자요, 인간에게 새로운 힘을 내려주는 은혜로운 존재다. 그런 절대 갑의 위치에 있는 세계가 왜, 약자의 눈치를 보아야 하지?"
"애초에 일을 벌인 건 가소천이었다. 가소천이 무림을 집어삼키려 하였고 사고로 열린 차원의 구멍 너머에 있던 이쪽 세계를 발견하고 정복을 시도했던 것이다."
"인류 역사는 항상 그러지 않았던가? 인간이 다른 땅을 정복하려 했던 것을 세계의 잘못이라 비난하는 건 억지가 아닌가?"
카자카미 노보루의 열띤 주장은 토벌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맞고 그르다에 대한 논쟁을 할 것도 없이, 누구 하나 공감하는 이가 없었다.
"마나의 세계는 애초에 너희를 배려하여 인적이 드문 이 숲을 융합을 위한 첫 장소로 삼았고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은가. 미국이나 한국 같은 곳의 수도에 이런 곳이 생길 수도 있었던 일이다."
"글쎄. 그렇게 이쪽의 인간이 많은, 힘이 강한 곳은 침식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자리잡았을 거라는 생각이 나는 드는데?"
"……."
카자카미 노보루의 기색이 흔들린 걸 도진은 놓치지 않았다.
저놈은 자꾸 거짓말을 하려 든다.
"뭐야. 또 거짓말이었어?"
"뻔뻔한 놈이군.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는 건가?"
"……."
뿌득-
억지로 표정은 관리하였으나 이를 악무는 것만큼은 피하지 못한 카자카미 노보루였다.
"…그래. 아직은 주제 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군."
그리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키이야아아아악!!
꽈아아앙-!
사정없이 덤벼드는 감염자의 쓰나미를 토벌대의 무인들이 받아친다.
실력은 훨씬 높았으나 상대하는 요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인들은 생각했다.
'할 만해.'
분명히 보유한 마나량이 높아 더 많은 내공을 사용해야 했고 무기의 날카로움은 비할 수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달라지지 않았다.
지능.
감염자들은 지능이 부족했다.
그래서 무인 간의 대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수 싸움을 토벌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기실 아까의 싸움에서 체력과 내공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는 또 절대 아니었다.
결국 싸움이란 적을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공과 체력을 소모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무려 다섯 자리에 달하는, 만이 넘는 감염자들을 채 오백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감당해야만 했고.
"후욱, 후욱."
기어코 감당해냈다.
꽉 쥔 주먹에서 힘을 풀며 어깨를 들썩이는 오군성이 생각했다.
'호흡이 고르지 못했던 게 언젯적인지 모르겠군.'
비할 데 없는 압도적인 내공과 끊임없는 수련, 그리고 평범한 이들은 감히 상상조차 못할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자기 관리를 해 왔던 오군성은 근래엔 경험한 적이 없던 가쁜 숨에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 고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오군성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억, 허억."
"크흐윽."
무인에게는 절대적인 호흡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예 주저앉은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거나 모자라다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모두가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명.
가장 많이 움직였음에도 처음과 달라지지 않은 천마 김도진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크흐.'
오군성은 비죽 웃고선 훅, 강하게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했다.
저 올곧은 등을 보고 있자면 오군성은 경쟁심이 불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카자카미 노보루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김도진을 스치고선 다시.
스윽-
손을 들고선.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하."
"악몽이면 좋겠군."
쿠우웅-!
토벌대가 흔들렸다.
그들은 이미 지쳤는데.
다시 한 번 헤아릴 수 없는 감염자들의 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치 떨어지는 폭포를 칼로 벤 것처럼.
몇 번을 하든 의미없는 저항일 뿐이라는 선고를 당한 것만 같았다.
그 분위기에 카자카미 노보루가 비죽 웃고선 말했다.
"가소천은 마나의 세계의 첫 번째 사도였다."
"사도?"
"그래. 사도다. 가소천은 첫 번째 사도였고 그 특전으로 아주 강력한 능력을 부여받았으니 그렇게나 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다음. 두 번째 사도가 되었고 내가 받은 능력이 이것. 강령술(降靈術)이다."
"강령술?"
"네크로맨시(Necromancy)?"
"그래. 네크로맨시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것들과 나는 그 능력의 수준이 전혀 다르지. 이미 경험하지 않았나. 너희들을 둘러싼 끝이 없는 군대. 저 군대가 모두, 나의 권능 아래에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쓰러뜨린 가소천마저도."
"……."
"나는 몇 번이고 군대를, 가소천까지도 일으켜 세우고 부를 수 있으니 너희의 저항은 모두 헛될 뿐이다. 헛되고 또 헛되지."
토벌대의 기세가 다시 한 번 꺾였다.
이 싸움.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승산이 흐려졌다.
그 기색을 감지한 카자카미 노보루가 본론을 꺼냈다.
"마나의 세계는 받아들인 자에게 힘을 부여한다. 중요한 것은, 열 번째 사도까지에게는 특히나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가소천이 그랬고 또 내가 그랬듯. 그리고 그 열 번째 사도까지는 이제 다섯 자리만이 남아 있다."
싸악-
마치 뱀의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듯한 곡선을 카자카미 노보루의 입이 그렸다.
"한계를 넘어선 힘을, 가지고 싶지 않나?"
* * * *
카자카미 노보루는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몇 명은.
몇 명만큼은 이미 처음 제안할 때부터 흔들렸을 거라고.
그리고 지금, 쐐기를 박았다고.
분명히 나올 거라 생각했다.
사도가 되고 싶다 말할 자들이.
그런데.
"……."
"……."
카자카미의 확신어린 얼굴이 일그러질 때까지 단 한 명도.
사도가 되겠다는 자가 나오지 않았다.
도진은 피식 웃었다.
"왜. 이상해? 한 명도 손을 안 드는 게?"
도진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카자카미 노보루의 확신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너 같은 삼류 악당에 무인조차 아닌 놈은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게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거든."
"무슨, 개소리냐."
"간단한 이야기야. 스스로 연마해서 획득한 힘도 아닌 것을, 그것도 정체도 모를 놈이 주는 수상한 힘을 누가 반기겠냐고. 멍청아."
"……."
그랬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그거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어떤 게임을 해도 가능하면 스스로가 키워 강해지는 캐릭터를 원하지 남이 다 해 놓은, 그것도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을지 모를 캐릭터를 원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겠는가.
하물며 여기 있는 모두는 그렇게 스스로를 연마하여 강해지는 것에 취해 있고 또 절대적인 신념을 가졌기에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었다.
카자카미 노보루의 말이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것조차 모르고 기세등등하게 제안하는 카자카미 노보루의 모습은 멍청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얻은 힘으로 한심한 꼴이 된 니 손자를 봤으니 더 그렇겠지."
기껏 공간 이동이라는 능력을 얻고서도 처참하게 패배한 카자카미 우에토를 말하는 거다.
까드득-!
카자카미 노보루가 결국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네놈들이 무시한 힘을 뼈저리게 겪어 보도록 해라!"
짐승처럼 씹어뱉은 카자카미 노보루의 노성과 함께 다시 한 번, 감염자들의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흉악한 카자카미 노보루의 감정이 그대로 실린 듯 감염자들의 공세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토벌대의 기세는 어쩔 수 없이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지쳐 있었으니까.
사실은 바로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힘이 빠져서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휩쓸려 형체도 남기지 못할 그런 상황.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각-!
가장 먼저,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감염자들의 무리를 베어낸 검이 있었다.
천마신검.
천마가 쥔 검이 가장 먼저 감염자들의 무리를 베었고 그 뒤를 천마신교가 뒤따랐다.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강렬한 등을 한 치의 의심없이 뒤따르며 기세를 드높이는 그들의 모습이 토벌대를 일깨운다.
"…나 소싯적엔 말이야, 죽으면 죽었지 저런 꼴은 못 봤단 말이야."
에번드윅 공작이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랬지. 죽어도 뒤쳐지긴 싫었어."
어느새 죽이 맞아 사이가 가까워진 오군성도 그리 말했다.
무당제일검도, 화산제일검도 도사 체면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또한 무인.
어디 가서 호승심으로 뒤질 사람들은 아니었다.
벌써 세 번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를 소모적인 싸움.
그러나,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이다.
그리고 그 굽히지 않는 자존심은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아집이 아니었으니.
-이번을 넘기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쿠웅-!
카자카미 노보루를 겨누는 천마의 검이, 분명히 닿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에겐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