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가소천의 육체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단전을 파괴당하고 육체를 무기력하게, 정신마저 서서히 갉아먹는 극한의 환경에 쇠락하고 있음에도 그 육체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체(體)는 쇠락하였으나 기(技)와 심(心)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미국이 무림인은커녕 병자만도 못한 상태의 가소천을 상대로 전혀 경계를 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육체는 지배하에 두어도 본질적인 기색(氣色)까지는 완벽히 지배하지 못했다.
도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가소천이 분명히, 틀림없이 '마나'를 알 것이라고.
-이 온전한 포털에서 천마신교의 이단, 가소천이 구축하였던 포털 시스템과 일치하는 이치가 보이는구나.
그래서 기습적으로 마나를 언급하였고 역시나.
가소천은 반응하였다.
이치를 꿰뚫는 도진의 눈이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작용을 보기 위하여 극한까지 집중하고 있었으니 그것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설령, 미시 세계의 것이라 하여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씨익-
도진은 웃었다.
쐐기를 박는, 승리를 선언하는 웃음이었다.
단전을 파괴당하지 않았다면. 그 육체에 최소한의 힘이라도 깃들어 있었다면 기색마저 철저하게 틀어막을 수 있었겠지만 가소천은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조금 저렴하고 세속적이며 적나라하지만 '티배깅'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행위다.
녹화를 지시하고 지켜보던 미스터 키퍼는 그래서 도진의 이 행위를 더 큰 걸 알아내기 위한 포석이라 보았지만.
'음?'
도진은 그것을 끝으로 미련없이 유폐장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미스터 키퍼는 복장을 정돈한 도진과 티타임을 가졌다.
"조금 더 흔드실 거라 예상했습니다만."
굳이 돌릴 필요가 없는 부분이라 직설적으로 물었는데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더 건질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이렇다 할 심증도 자료도 없었고 무엇보다, 제가 가소천을 상대로 심리 싸움을 걸 만큼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지도 않거든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도진은 스스로가 심리 싸움의 대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상대는 그런 분야에 있어선 독보적일 가소천.
더 해봐야 얻을 게 없었으니 차라리 미련없이 몸을 돌림으로써 가소천을 한 번 더 흔드는 것으로 자리를 끝내 버린 거다.
그리고 이 다음을 미국에 넘겨 버렸다.
"그렇군요. 감탄했습니다."
미스터 키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천마의 선택은 최선이었다.
다만 이것이 천마의 '약점'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으니 천마의 주변엔 이에 관한 스페셜리스트가 몇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테이블의 악몽'이라 불리는 오성아가 있고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알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세이전주도 있다.
애초에 정점에 서는 자가 여기에 구애될 필요도 없고 천마는.
불합리하다면 입씨름을 하는 대신 테이블과 상대를 통째로 두 동강 내 버리는 스타일이니까.
그러고도 감당이 되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어설픈 수작을 부리려는 자가 나올 수 없다.
어쨌든, 본론이다.
"마나, 라고 하셨지요."
"네, 마나입니다."
"오늘 긴히 해 주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던 게 이것이겠군요."
"맞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가장 친한 우방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국과 함께 가장 먼저 알려드리기로 했습니다."
"가장 친한 우방. 좋은 말씀이군요."
미스터 키퍼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은 한국과 더불어 천마신교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나라였다.
너무 커버린 천마신교에 대하여 최소한의 경계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기를 택한 나라.
그 친분의 대가로 아주 커다란 정보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게 됐다.
"미스터 키퍼께서는 내공을 이해하고 계시니까 이걸 느끼실 수 있겠죠."
내공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절정의 경지다.
일류까지는 그저 있는 것에 익숙해지고 능숙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다.
절정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저 사용하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해한 뒤 사용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이니 그것이 일류와 절정의 차이이기도 하다.
미스터 키퍼는 두 번 놀랐다.
하나는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꺼내든 열쇠에서 느껴지는 '전혀 이질적인 것' 그 자체에.
미스터 키퍼가 그동안 이해하고 궁구해 온 이치와는 전혀 다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치가 그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훨씬 늦게, 천마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경지를 꿰뚫어 본 것에 대해 놀랐다.
그가 이해하고 궁구한 것이 바로 '숨김'이었으니까.
설령 경계를 넘어선 고수라 하여도 그의 경지를, 그에 대한 심층적인 부분을 꿰뚫어 볼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고 그래서 이런 역할을 맡은 것이었는데.
천마는 그것마저 아무렇지 않게 꿰뚫어 보았다.
정말로,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고 이런 것마저 아무렇지 않게 보여줄 정도의 깊이란 어떤 것인지 미증유의 경외감을 겉으로 티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상태로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했다.
"…무림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네."
"재생하고 있다, 는 말씀이시군요."
"네."
"이것을 한유성이 쥐고 있던 열쇠를 통하여 알게 됐고 마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역시. 이해가 빠르셔서 좋네요."
"그리고…… 그 재생하는 세계에."
"네.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해요. 이것도, 미국이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니까 먼저 말씀드리는 거예요."
"……."
* * * *
"호호. 그 얼굴을 내가 봤어야 했는데."
"눈나는 그런 얼굴 자주 보시면서."
"아니야, 교주님. 그건 얼마를 보든 도저히 질릴 수가 없는 얼굴이라구. 볼 때마다 신선하고 또 재밌어."
"하긴. 저도 눈나가 귀여울 때마다 신선하고 재밌긴 해요."
"야!!"
"아, 그거요."
도진은 오피스의 여신 모드이면서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는 오성아와 함께 재생하는 무림의 세계에 있었다.
두 사람 말고도 주변에는 수많은 이들이 온갖 장비를 가지고 주변을 '측량'하고 있었으니 모두.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전의 밑작업이었다.
한창 카자카미와 레너 공방의 일로 천마신교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서 상상도 못할 만큼 바쁜 중에도 오성아는 이렇게, 새로운 나라를 위한 준비를 병행하고 있었다.
"진짜, 너무 부지런한 거 아니에요? 눈나. 좀 쉬면서 해도 될 텐데."
누구보다 오성아의 업무량을 잘 아는 도진이 그렇게 권유도 해 보았지만.
"아니. 이게 나한텐 힐링이고 노는 건데?"
이렇게 말하니까 더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오성아는 근래 들어 가장 반짝반짝하고 있었다.
천마신교를 더 키우고 싶다는 욕구를 그동안 억눌렀던 만큼 반동도 크게 온 거다.
뭐, 프로답게 자기 관리도 확실히 하고 있으니 도진은 그저 '우리 눈나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모드로 팍팍 밀어주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랑 미국 쪽은 어때요?"
도진의 물음에 오성아가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계산대로. 완벽하게 되고 있지."
"역시 눈나네요."
무인도에서 도진이 그들의 의도대로 무언가를, 아니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마나에 대해서 말한 것을 넘어 아예 나라를 세울 거라는 이야기까지 해 준 건 다 총괄부와 세이전의 설계대로였다.
-마나에 관해서는 교주님도 생각하고 있겠지만 오픈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죠?
-응.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단순히 일이 터진 뒤에 그것을 감췄다는 비난 여론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세계 단위'의 문제이니까.
숨기는 게 아니라 공유하고 함께 대처하는 게 맞았다.
다만.
-어차피 할 거니까,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진행해야지.
그래서 우선 실력 과시를 좀 한 뒤에 가장 사이가 좋은 한국과 미국에 먼저 말해 주었고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야기까지 더하여 '더 돈독한 사이가 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굳이 재생하는 무림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따지자면 명분은 완벽하게 진나라에 있다.
멸망을 향해 가던 세계의 주인을 진나라로 이미 세계가 인정하고 사인마저 했다.
굳이 그곳의 주인을 명문화한 건 '주인없는 땅'이 됨으로써 발생하게 될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그 조항에 더하여 재생하는 세계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천마 김도진이지 않은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을 천마신교와 진나라가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도진과 오성아가 직접 미국과 한국에 제안한 것이다.
'이 흐름에 가장 먼저 타서 이득을 챙기라'고.
미국과 한국은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들과도 긍정적인 형태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후 이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돼 있을 것이다.
"도진이가 나라까지 세우니까 뭔가가 뭔가한 거 같아."
조금 진지한 이야기가 끝나고 걷던 중에 그렇게 귀엽게 말한 건 소담이었다.
도진은 곁에서 함께 걷던 소담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 혼자 한 게 아니잖아? 성아 누나도, 너도. 함께 세운 나라니까. 소담이 너의 나라이기도 하지."
"내 나라."
"응. 그러니까 우리 나라지."
"우리, 나라. 응, 그렇네."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던지 소담은 정말로 에쁘게,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상미야."
"네, 오빠."
"여기 지을 집에 관해선 너의 의견을 많이 들려줬으면 해."
"제 의견이요?"
"응. 유진이도 그렇고 호진이도 상미 니가 잘 알잖아. 그러니까."
그 말에 상미도 소담 못지 않게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오후가 되어선 오대용이 찾아왔다. 맛있는 간식을 챙겨서.
"뭐야, 이 뇌물은?"
"어허. 우리 사이에 뇌물이라니."
"그럼 발주 안 해도 돼?"
"우리 소중이 태어나면 이른다?"
"와, 협박 진짜 참신하네."
새로이 탄생할 나라는 백지 위에 세우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근대 이후 가장 거대한 공사'가 될 예정이고 이에 관한 이권 또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만들기 위한 강력한 카드로 작용하고 있다.
오성 건설 쉬르네폴리아 지사의 대표이기도 한 오대용은 그 일거리를 따기 위해 강력한 걸 넘어 아예 치트키를 써 버렸다.
"야. 나중에 네 조카가 빵긋 웃으면서 삼촌, 이러는 거 보려면 앞으로 나한테 잘해야 된다고."
"돌겠네, 진짜."
푸하하 웃으며 도진은 두 손을 들고서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래서. 정아는 어때?"
"건강하지. 그리고 네 조카는 딸래미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울 예정이야."
"음. 성아 눈나보다 귀여울까?"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야!"
낄낄낄.
큰일을 앞두고 있지만 즐길 건 즐겨야 하는 법이다.
바쁜 중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지윤에 의해 카자카미라는 거대한 댐의 붕괴는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거대한 댐 안에 숨겨져 있던 진실도 하나둘,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내 댐이 무너졌을 때.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때를 대비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때에.
"…가소천이 사라졌습니다."
"하, 한유성이 사라졌습니다."
변수가 돌출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