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화
백화는 자신의 정신이 혼재되어 있던 '그곳'을 무어라 부르고 또 정의하여야 할지, 이치에 닿은 지금도 명확하게 결론내릴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지만 공간은 없다.
다만 억지로 부르자면 그곳은 개념이 실재하는 곳이었다.
"개념."
"예."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이 과연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을 없다고 한다면.
머릿속에서 이루어져 상으로 맺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없는' 것인가.
아직 이해하기엔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생소하니 설명할수록 오히려 복잡하다.
그러니까 그저 개념이 실재한다고 말했다.
"다만, 실재하지만 또 존재한다고 하기엔 부족하였던 그 개념들이 비로소 형상을 갖춘 것이 이곳입니다."
백화의 정신은 분명히 사유하고 있었으니 실재했다.
그러나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그저 개념에 혼재되어 실재하기만 하던 것이 비로소 형상을 갖추었으니 지금 도진의 눈에 비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붕괴하여 개념으로만 남았던 세계가 재생하여 지금 펼쳐져 있으니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천산이 재생한 곳입니다."
-천산이.
"예. 붕괴하여 개념으로만 남았던 천산이, 또 함께 휩쓸렸던 세계가 재생하였으니 바로 이곳이 새로이 탄생한 천산인 것입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생소하고 또 어려운 부분을 쳐내고 말하자면 그러니까.
"…세계의 붕괴에 휩쓸렸던 천산, 그리고 백화님이 소멸하지 않고 재생한 것이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것이란 말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이미 완성되어 있던 철제품을 녹이고서 새로 만든 것과 비슷합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지요."
너무나 많이 달라져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곳은 정말로, 솜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전 있었던 그 천산이 맞았던 것이다.
다만 백화의 경우엔 과거의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기에 아주 약간의 변화만이 있었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형성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본래 없던 것이 섞여들었습니다."
본래 없던 것.
도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오크."
"예. 오크, 입니다."
무림이 더해진 지금에 와서도 '허구'였던 것이 실재가 되어 나타났고 직접 겪었다.
그리고 도진은 또 한 가지 걸리는 것을 짚었다.
"오크. 그것이 정말로 그 생물의 이름입니까?"
오크라는 건 어디까지나 도진이 즐겼던 게임을 포함한 서브 컬쳐에서 붙은 이름이지 '정식 명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화는 도진을 '따라서 부른' 것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 그것이라는 듯 오크라 말한 것이다.
짚지 않을 수 없었다.
도진의 지적에 백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한 상황에서 세계와 함께 재생되었기에 저는 조금 더 많을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본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 다른 요소가 섞여들었고 그 안에 오크, 라는 것이 있음을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본래 존재하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여 이름 붙인 것이 아니다.
세계에 섞여들 때 이미 그것은 '오크'라고, 본질의 단계에서 이미 그리 정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본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였던가요. 단순한 내공에 죽어 버린 건."
그 말에 백화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미 경험하셨지요. 무림이 현대의 문명을 거부하는 현상을."
"예."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기존의 이치가 자리잡은 세계에 다른 세계의 이치가 끼어들면,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더 약한 이치가 부서지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치가 자리잡은 곳에 다른 이치가 끼어들면, 더 약한 이치가 부서진다.
약간은 알 것 같았다.
본래 닫혀 있어야 할 두 세계가 연결되었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이치'는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의 '문물'이 무림으로 넘어갈 때 못쓰게 되는 것이다.
다만 무림에서 처음부터 쌓아올리는 건 어찌되었든 근원은 무림이니 '세이프'라는 거겠지.
반대로 무림의 것이 현대로 이동하여도 부서지지 않는 건 이미 그 이치들이 현대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크의 경우 이 세계에 섞여 탄생하였지만 다른 세계의 이치를 따르는 생물인데 그 안에 내공이라는 전혀 다른 이치가 작용하여 충돌, 죽게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제가 마나, 그러니까 그 기운을 직접 운용할 경우 저 역시 그 오크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거군요."
지금껏 도진은 열쇠를 통하여서만 '마나'를 사용했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만 운용하였다는 거다. 한데 그걸 직접 운용했다면…….
"아뇨.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나 백화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까?"
앞서와 모순되는 말에 다시 물으니 백화는 예, 하고 답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천마께서 말씀하신 마나라는 것은 다른 세계의 것임에도 인간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그래서, 한유성이란 악한이 보물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 * *
사박. 사박.
능숙하고 또 우아한 걸음으로 앞서 걷는 백화의 뒤를 도진이 따라 걸었다.
여전히 품에 안긴 솜이의 고롱거리는 소리가 울창한 숲에 퍼져 나간다.
"그럼, 오크의 부락은 없다는 말씀이군요."
"예. 어디까지나 그것은 소수가 생성되었다 또 사라지는 이 세계의 이물질과 같습니다."
빨리 갈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 여유를 두고 걷는 길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마리의 오크가 예상치 못하게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버리고 두 마리가 도주하였을 때 도진은 일부러 놈들을 놓아 주었다.
도주하는 곳을 추적하여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한데 그것이 오판이었다.
백화가 오크의 부락이 없다고 알려준 것이다.
허나 그것은 도진의 잘못이 아닌 이 세계의,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특수성 때문이었으니 오크는 자연적으로 번식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이 세계의 재생 과정에서 '간간이 섞여 나타나는 이물질'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몸속에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독소와 같았다.
본래는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요소.
때문에 세계는 자체적으로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기능하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오크들은 오래가지 않아 소멸한다고 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입자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다.
부락이 있을 수가 없었다.
사박.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앞에는 거대한, 그리고 기괴한 창고가 떡하니 숲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무림의 양식으로 지어진 듯 한데 거기에 판타지의 양식이 분별없이 섞여 있어 기괴하였다.
"오크가 있던 세계의 이치가 섞여 재생되어 이런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음."
끼이익-
문은 낡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부정교합이 있는지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문이 펼쳐지고 보이는 것은.
"가소천이 세계에서 끌어모았던 보물들입니다."
세계를 지배한 천마신교의 이단이 수탈하였던 보물들이었다.
명검, 보갑, 제사 도구까지.
온갖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수탈하여 종류별로 분류하여 보관한 창고.
그 보물로 가득한 창고 내부에는 이질적인 기운, 마나가 그득하였다.
그리고 창고를 가득 채운 마나는 바로 보물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고처럼 변질되었군요."
"예. 본래 보물에는 이치가 깃들기 쉬우니 다른 세계의 이치가 깃들어 이리 변한 것입니다."
이치가 뒤섞인 것은 창고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창고 이상으로 안에 보관되었던 보물들은 변질되어 있었다.
동양의 양피지를 서양의 기법이 장식하고 있다거나 동양의 법구(法具)에 서양의 방식으로 가공한 보석이 박혀 있다거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양식이 섞인 그 보물들은 그 외견 이상으로 세계와 '갈등'하고 있어 기괴하게 보였다.
분명히 존재함에도 흐릿하거나 노이즈가 끼어 보인다.
백화가 말했다.
"평범한 물건이었다면 바스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소천이 세계에서 끌어모은 '보물'.
쉽사리 바스라지지 않고 세계에 저항하여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다.
"사용하려 손을 댄다면 바로 부서질 만큼 위태롭지만 그럼에도 버티면서 서서히 이 보물들은 세상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백화의 말을 들으며 도진은 찬찬히 보물들을 확인하였다.
보물들마다 흐릿하거나 노이즈가 낀 정도가 다르다.
갈등이란 서로 얽히거나 충돌함이다.
그 과정에서 부서지지 않는다면 얽히고 충돌하는 부위는 깎이고 또 연마되어 보드라워진다.
그와 같이 이 보물들도 갈등을 버텨낸다면 이윽고 이 세계에 동화할 것이었다.
그렇게 동화에 성공한 것에서, 도진의 시선이 멈추었다.
스크롤. 눈에 익은 것이었다.
"한유성은 이 창고로 이어지는 열쇠를 획득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스크롤은 노이즈도 끼지 않았고 흐릿하지도 않았다.
백화의 말대로라면 저것은 세상에 '적응'을 마친 물건이고.
안정적인 포털을 열 수 있는 '아이템'이다.
"만약 이곳의 모든 보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조금 까다로웠겠네요."
"예."
허나 지금 이곳에 있는 물건들 중 적응을 마친 건 스크롤 몇 개가 전부였으니 한유성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음.'
우선 의문 하나가 풀렸다.
어떻게 한유성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그러나 그 의문 하나를 풀기 위해 알게 된 지식이 더 많은 의문을 던졌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
"한유성이 어떻게 이 열쇠를 얻게 됐는지는 모르십니까."
"예. 안타깝게도."
한유성이 어떻게 이 기묘한 열쇠를 얻게 됐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해결된 게 없었다.
이 세계와 함께 재생되면서 더 이상 '개념이 실재하는 곳'에 있지 못하게 되었고 그녀와 연관된 것들을 볼 수 없게 된 백화 또한 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만약 무형독의 잔당들이 가지고 있었다면 또 다른 가설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한유성 개인이, 무형독의 잔당들 모르게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였기에 신경이 쓰인다.
길가다 주웠다는 수준의 우연이 아니고서야 제3의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또 고려하게 만든다.
"이곳 외에도 말씀드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뒤로도 도진은 백화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번이나 놀랐고 또 당장에 전해야 할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었다.
도진은 우선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백화."
도진이 제안하였고 백화는, 고개를 저었다.
"저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곳에 묶인 몸이라 그럴 수가 없군요."
"이곳에 묶여 있으시다구요?"
"예. 저는 세계와 함께, 하나로 묶여서 재생이 되었습니다."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그녀는 이 세상에 묶여 있었고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
백화가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이것은 이별이 아니니까요. 천마께서는,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 * * *
스으-
"지존!"
눈보라가 몰아치는 러시아의 극동 지역.
포털을 열고 나온 도진은 어느새 간이 캠프가 차려진 곳에서 기다리던 위연서를 마주하였다.
위연서는 들어갈 때와 달라진 도진의 모든 요소를 대번에 알아보았고 도진이 웃으며 먼저 말했다.
"솜이는, 오랜만의 가족 상봉이라 잠시 두고 왔어. 그리고 이건…… 천마신검이야."
"……예?"
"정확히는 부러진, 검날이지만 말야."
"……."
드물게도 두 눈이 커져 귀여운 얼굴이 된 위연서의 모습에 도진이 하하 웃었다.
그리고 걸어 나가며 말했다.
"일단은, 돌아가자. 해야 할 일이 많거든."
부러진 천마신검의 검신(劍身). 그것은 충분히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것과 병행하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무림은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크게 다친 것입니다.
-무림은, 재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