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4화
천산설표.
천산에 사는 새하얀 고양잇과 영물.
감당하기 어려운 열기를 타고나 그것을 감당하기 위하여 덩치를 불리지만, 열기의 제어에 성공하여 내단을 형성하면서 환골탈태하면 솜이와 같이 고양이 크기로 작아지며 진정한 영물로 거듭난다.
덩치는 작아지지만 그 강함은 호랑이나 사자조차 감히 댈 수 없으니 그 크기가 고스란히 압축되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작은 육체가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그 작은 육체로도 내단을 감당하고 또 구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그런 설표에 관하여 도진은 일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단을 점점 더 키워 나가다보면, 지극히 오랜 세월에 걸쳐 내단을 키워나가면 또 그에 맞춰 육체가 커질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의 답이 눈앞에 있었다.
지극히, 거대한 설표였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그 거대한 설표는 자연지기와 소통하여 일대를 완벽하게 의지 하에 둘 수 있는 도진이라 하여도 버거우리만치 거대한 기운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도진은 별을 떠올렸다.
별이 주변을 끌어당길 수 있는 건 어마어마한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별을 연상케하는 밀도의 내단이 설표에게서 느껴졌다.
설표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단이 작용하여 일대의 자연지기를 모조리 끌어당길 것이다.
웬만한 수준의 존재는 대적하기는커녕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선천지기조차 지키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
그것이 눈앞의 설표였다.
그러나 도진은 설표를 적대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설표는.
냐아아앙.
-그래, 나의 아가.
어리광을 부리는 작은 설표를 품에 안고 보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솜이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지극한 이치를 좇아 나아가는 도진은 볼 수 있었다.
솜이의 기원이 되는 기운이 솜이를 품은 설표에게 있음을.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솜이의 어머니였으며 이렇게, 기적처럼 마주하게 되었다.
-허어, 진실로 놀랍구나.
-예.
위지혁이 감탄하였고 장호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스승의 말에 동의하며 모녀 상봉을 잠시간 지켜 보았고 이내 거대한 설표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아이를 품에 안아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선 호의가 느껴진다.
솜이의 어머니로 호의를 보이는 그녀를 뾰족하게 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물어야 할 것들이 여럿 있었는데.
-천마, 아니 이제는 전대 천마이시겠군요. 전대 천마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으음?
'어?'
그것들을 묻기도 전에 설표가 또 하나 물어야 할 것을 말했다.
도진은 지극한 경지에 오르며 갖게 된 지극한 이성으로 순식간에 정리하여 물었다.
"스승님이, 보이시는 건가요?"
-예. 천마의 영혼에 깃들어 계시는 전대 천마를 저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감이 지극히 희미한 또 다른 분도 계시는군요.
본격적으로 은신하지 않았다 하나 장호까지도.
심상 세계의 두 스승을 설표는 볼 수 있었다.
설표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내단이 움직였다.
파아아아아-
위협적이지 않은,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고 은은한 빛이 거대한 설표를 감쌌고 그 빛이 흩어졌을 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백화라 합니다."
도진의 눈앞에는 한복을 닮은 복장으로 몸을 감싸고 단아하게 인사하는 미녀가 한 명 서 있었다.
* * * *
-그래. 자네가 그때 그 설표로군.
"예. 천산의 만년설에서 몇 번이고 마주하였던 그 설표입니다."
도진은 솜이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설표, 백화와 마주 앉았다.
옛 방식으로 올려 묶은 머리에 크고 화려한 봉황잠을 꽂은 그녀는 미인도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자태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의 모습을 취한 그녀는 세 마리의 설표가 나타났던 사건에서 스승 위지혁이 말했던, 과거 마주했던 바로 그 설표였다.
-선도에 닿은 것인가?
선도(仙道).
영물들은 단순히 이치를 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를 닦아 선계(仙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하니 도(道)를 닦아 선(仙)에 이르면 신선이 되어 선계로 오르니 위지혁은 백화가 그 길에 닿았는가를 물은 것이다.
백화는 위지혁의 생전에 이미 영성이 트인 영물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시간선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큼이나 되는 내단을 가지고 인간으로 화하는 술법을 쓰며 심상 세계에 깃든 영혼마저 볼 정도라면 이미 신선이라 하여도 과하지 않을 수준이다.
허나 백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극한 이치에는 닿았으나 스스로의 도를 닦아 그에 이른 것은 아니니 저는 선계에 닿지 못했습니다."
길을 구함(求道)에 있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음.
백화는 스스로의 도가 아닌 '외부의 환경'으로 이치에 닿았다.
그 연유를 백화가 찬찬히, 풀어놓았다.
"세계의 붕괴와 함께 당대의 교주께서 실종되시고, 천마신교가 와해되면서 국가와 사회 또한 무너졌습니다. 그 혼란기에 세계를 삼키려 들었던 것이 가소천이었지요."
-그랬지.
직접 보지 못한 시기가 포함되어 있긴 했으나 잘 알고 있는 내용에 위지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시 가소천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영물 사냥을 하였습니다."
영물은 내단을 품고 있다.
그 내단은 순수한 자연지기가 높은 밀도로 압축되어 있으니 인간에게 더없이 귀중한 영약으로 기능한다.
용서받지 못할 악당이라면 망설임없이 영물을 죽이고 그 내단을 취하려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 사냥 대상 안에 천산에 살고 있던 설표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던 거다.
-그때 천산이 남아 있었던가?
"온전히는 아니지만,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아직 반절 가량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미 천마신교가 와해된 뒤였을 때라 위지혁이 물었고 백화는 그리 답하였다.
붕괴가 바로 곁에까지 치달았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던 시기.
인간은 당연히 천산을 떠났다.
그러나 백화는 아이들과 계속 천산에 머물렀으니 그 이유는.
-…아이들이 환골탈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겠군.
"예. 그런 연유였습니다."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시 세 마리의 설표가 나타났던 때의 모습을 도진 또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환골탈태에 실패하여 마물(魔物)로 전락하고 말았던 두 마리 설표의 모습을.
백화의 세 아이는 당시 환골탈태를 앞두고 있었고 그만큼 열기가 강대하여 불안정한 시기였으니 거처를, 만년설의 냉기가 가득한 천산을 당장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위험하지만 아이들이 환골탈태를 앞둔 시기에 천산을 떠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천산이 다 붕괴하기 전에 아이들을 환골탈태시키고 이곳을 벗어나자.
어미의 마음으로 백화는 그리 생각하였고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안이하였습니다. 광신도들이 위험을 고려하여 행동할 리가 없었는데."
붕괴가 코앞까지 닥친 이 구역까지 인간들이 찾아오겠는가.
천산에서만 살며 인간을 다 알지 못하는 순진한 영물이었던 백화의 그 판단은 가소천을 따르는 광신도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었고 습격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저는 습격자들을 다 막지 못하였고 아이들을 빼앗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이 트였다 하나 무(武)가 아닌 도(道)를 추구하였던 설표는 작정하고 영물을 사냥하기 위해 천산에 오른 무인들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내단을 폭주시켰다.
자신이 돌보지 못하면 아이들은 십중팔구 환골탈태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거나 마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저 간악한 악당에게 붙잡히면 가능성조차 피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내단까지 빼앗겨 악당들의 살을 찌울 터.
내단을 폭주시키는 것만이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
그녀의 내단이 폭주하여 솟구친 불길마저 삼키는 세계의 붕괴가 남은 천산을 덮쳤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산에서의 경우는 일반적이지가 않았다.
"내단을 폭주시킨 저는 당시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부가 불안정한 공간에 무언가의 처치를 하였고 거기에 제 아이들이 일부 악한들과 함께 휩쓸린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중간이 온전치는 않지만 도진이 잘 알고 있었다.
냐아앙.
"그래, 괜찮단다."
붕괴에서 도주하여 이쪽 세계로 넘어온 소수의 이단을 물리치고 세 마리의, 어미와 떨어진 설표들은 목적지도 없이 그저 도주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환경으로는 그곳이 설표들에게 적합한 곳이었으나 언제 어떻게 또 다른 사냥꾼들이 올지 모르니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였을 거다.
그리고 결국, 두 마리는 마물로 전락하였고 한국에서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설표들은."
"알고 있습니다. 안식을 주어, 천마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
도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물로 전락하였다지만 자신의 아이를 벤 이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하는 모습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 가지게 된 이성으로도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붕괴에 휩쓸린 저는 어느 순간 정신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런 도진을 배려하여 백화가 말을 이었다.
-정신의 회복이라고?
"예. 저는 분명히 내단이 폭주하였고 붕괴에 휩쓸려 육체는 물론이요 목숨 또한 잃었을진대. 어느 순간 정신만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정신으로, 백화는 현대와 무림을 보게 되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어떤 신비한 시공간에서 제가 살던 세계와 전혀 모르던, 지금의 천마께서 살아가는 세계의 여러 시간과 공간을 보았습니다. 수백 년을."
언뜻,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도진은 그 이야기를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으니 영성이 트여서만이 아니라 관련한, 책장 너머로 과거를 보는 장면이 있던 어떤 영화를 보았던 덕분이다.
"세상의 붕괴에 휘말렸으나 소멸하지 않고 정신을 회복하였고 그 덕분에 어딘지 모를 어떤 공간에서 다른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자의로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저와 관련 있는 것들 위주로 장면이 보였습니다."
못 믿을 이야기다. 터무니없고, 얼토당토않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지금, 이 시대에는 믿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도진의 안에 깃든 두 스승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과학'은 아직 밝혀낸 것보다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백화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수행의 시간과 경험이 없었다면 저는 버티지 못했겠지요."
이해할 수 있었다.
독방에 단 하루만 두어도 미칠 수 있는 것이 고립된 경험이다.
하물며 백화는 육체조차 없이, 그저 간간이 보이는 장면만을 가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이라면 진작 미쳐 정신이 붕괴하였을 거다.
"그래서 저는 이치를 탐구하였습니다. 그러한 처지였기에 보고 또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었고 어느 순간 저는 그리도 간절히 궁구하던 이치에 닿았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변해야 했는데, 그 변해야 한다는 이치를 구현할 '세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저는 육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의, 재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