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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723화 (723/741)
  • 723화

    원시 시대.

    도진은 가장 먼저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요즘에야 교육계가 문·이과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고 실제로 전생의 끝자락에선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사라졌던 것 같지만 적어도 도진이 숭무고에 다니던 시절엔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진은 문과로 사탐, 사회탐구영역을 선택하여 과학탐구영역에 속하는 분야인 지구과학 등에 관해선 지식이 부족하였지만 그렇다 해도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원시 시대하면 떠오르는 그림 자료들.

    지금 도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 바로 그런 자료가 실제가 된 듯한 풍경이었다.

    '공룡만 있으면 딱이겠는데.'

    정말로.

    공룡만 있으면 진지하게 원시 시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흐음.'

    우선 품에 넣어두었던 것 하나를 꺼내 보았다.

    별 건 아니고 간단하지만 현대의 문명으로 조립한 물건이었는데 철저하게 해체되어 있었다.

    현대에서 무림으로 넘어갈 때와 같은 현상이다.

    무림은 여전히 일정 이상의 '문명'을 거절하여 포털을 넘는 순간 분해해 버린다.

    그렇다면 여기는 무림일까.

    '내가 밟지 못했거나 지구에서 발견하지 못한 땅이 있었을까?'

    무림에서 살던 이들을 빠짐없이 이쪽 세계로 데려오기 위하여 몇 년이나 노력했던 도진이었다.

    아마 남아 있는 무림 세계 대부분의 땅을 밟았을 것이다.

    설령 도진이 밟지 못했더라도 무림을 탐사하기 위하여 세계가 조직한 기구인 '세계탐사기구'가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현대의 일정 수준 이상의 물건은 포털을 넘는 게 안 되는 거였지 그쪽 세계에서 조립하여 사용하는 건 가능했으니까.

    그들은 드론을 포함한 무인기로 정말, 아주 샅샅이 무림을 탐사하였다.

    이만큼이나 이질적인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니. 말이 안 된다.

    냐아아앙-

    어깨 위에 앉은 솜이를 보았다.

    시선을 여기저기로 향하는 것이 이곳이 생소하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분명히 기억 속에 있는 포털을 타고 왔는데 포털 너머의 세계는 기억 속에 없는 곳이다.

    결국.

    이곳은 전혀 모르는 생소한 곳이었다.

    후.

    도진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우선 열쇠를 들었다.

    냐아앙?

    "잠시만, 솜이야."

    다시 한 번 자연지기를 열쇠에 불어넣어 작동, 포털을 열었다.

    문제없이 열린 포털을 통하여 나가니 눈보라가 몰아치는 대지 위에 위연서가 꼿꼿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같이 가줄래, 연서야?"

    "기꺼이, 어디든 따르겠나이다!"

    크게 감격하는 위연서의 충심은 이제 익숙하여 도진은 그저 웃었다.

    위연서는 우선 포털을 넘는 과정에서 망가질 우려가 있는 물품들을 잘 정리하여 두고 황송한 얼굴과 태도로 도진의 곁에 섰다.

    도진이 열쇠로 열었던 포털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자연지기를 공급하는 동안은 계속 유지되는 방식이란 걸 확인했고.

    스으-

    위연서까지 함께 이용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무엇보다, 한 명이 이용하든 두 명이 이용하든 포털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걸 확인한 게 제일 컸다.

    붕괴 중에 일부만이 변이해서 만들어지는 포털은 이용 횟수와 인원에 따라 계속해서 불안정해지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는 거다.

    '하. 진짜 큰 거 왔네.'

    이게 뭘까.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연서야."

    "예, 지존."

    "우선은 솜이랑 같이 둘러보고 있을 건데 48시간 안에는 다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총괄부랑 잘 얘기해서 지키고 있어 줘."

    "존명!"

    위연서는 사족을 붙이는 법이 없다.

    그저 충직하게 도진의 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려 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조금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래. 고마워."

    가벼운 치하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얼굴로 위연서가 도진이 열어준 포털을 이용하여 나갔다.

    '그럼.'

    도진은 심신을 다스리며 솜이와 함께 미지의 세계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솜이도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고 도진 또한 아는 바가 없는 곳이니 일단은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 본다.

    아마존도 보았고 무림의 사람 손길이 수백수천 년 동안 닿지 않았던 절경 또한 보았지만 이곳은 또 느낌이 다르다.

    그야말로 전혀 다른 풍토.

    단순히 자연이 보존된 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이 끊이지가 않았고.

    "하. 진짜냐."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케하는 것이, 도진의 펼쳐둔 감각에 걸려들었다.

    냐아앙?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솜이 또한 도진이 느낀 것을 느끼고선 꼬리를 쭈욱 치켜들었고 이내.

    취이익-

    그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 * * *

    이족보행을 하는 녹색 생물이었다.

    거적때기로 중요 부위만을 겨우 가렸는데 제대로 씻질 않는지 악취가 대단하였다.

    두껍고 질겨 보이는 피부에 소위 말하는 '실전 근육'이 꽉 들어찬 몸, 비죽 튀어 나온 송곳니가 위협적인 그것은.

    취이이익-

    들창코에 짐승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오크.'

    그래. 오크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물들이었다.

    우서진과 함께 여유가 있을 때 게임을 즐기던 도진에게 있어, 그리고 서브 컬쳐에도 익숙한 도진에게 있어 오크란 너무나도 익숙한 '상상 속의 몬스터'였다.

    …어디까지나 상상 속의 몬스터였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몬스터였다.

    '…당황스럽네, 진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무림이 있었으니 판타지 세계도 있는 게 당연했다고?

    그럼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는 건데 이렇게나 갑자기 나타나 버리면 아무리 그래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한유성은 어디서 열쇠를 얻은 걸까.

    의문이 한순간에 불어나는데 느긋하게 그것을 정리하자니 방해가 들어왔다.

    퀴아아아악!!

    흉포한 고함을 내지르며 몽둥이를 꼬나쥔 채 오크들이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오크는 전혀 정돈되지 않은, 그러나 본능과 쌓아온 경험에 따라 유기적으로 세 곳의 방위를 장악하며 도진을 사냥하려 들었다.

    송곳니로 인해 벌어진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더럽다기보다는 공포감을 준다.

    인간을 어디까지나 사냥감으로, 해체하여 뜯어먹을 고기로 보는 포식자로서의 모습 때문이다.

    그와 같은 모습은 심약한 자를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 버리게 만들 것이다.

    기세만이 아니다.

    타고난 피지컬 또한 평범한 인간을 압도하니 힘은 물론이요 피부의 단단함과 질긴 정도 또한 격이 다르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최소한 체계적으로 단련을 하고 무술을 익힌 인간이 아니고서야 놈들의 키가 150 전후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사냥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정도.

    신안(神眼)을 통하여 한순간에 도진은 오크들을 그렇게 파악하였다.

    그리고 몸으로 또 체감하였다.

    부웅!

    온힘을 다하여 휘두른 몽둥이는 제법 대단한 힘이 실려 있었으나 도진에게 위협이 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퍽!

    일부러 팔로 받아주니 대번에 양쪽에서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하여 달려들었다.

    도진은 몽둥이를 막았던 팔을 가볍게 당겼다.

    취, 취익?!

    마치 순간접착제를 바른 듯 딸려가는 몽둥이에 정면의 오크가 당황하였으나 힘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따다닥!

    거짓말처럼 세 마리 오크의 몽둥이가 한데 얽혀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다.

    힘은 있지만 기술이 전혀 없다.

    조금만 무공을 제대로 수련한 무인이라면 설령 삼류라 해도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저 살기(殺氣)에 주눅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퉁-!

    도진이 약간의 힘을 주자 둔중하고 깊은 울림과 함께 힘의 격류가 오크들을 휩쓸었고 놈들을 바닥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쿠당탕!

    퀴아아아악!!

    그러나 놈들은 금방 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들었으니 지능이 그리 높지 않았다.

    아무리 도진이 일부러 기세를 꽁꽁 감추었다지만 보여준 기술이 있음에도 격차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걸 마나, 라고 해야 할까.'

    놈들은 본능적으로 몸 속에 있는, 열쇠를 통하여 생성되던 그 이질적인 기운을 운용하고 있었다.

    내공이 아닌 그 이질적인 기운이 움직임에 맞추어 힘을 더하고 있는 것을 신안을 통하여 꿰뚫어 보았다.

    그로 인해 가진 육체가 발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힘을 내고 있다.

    오크가 있는 판타지 세상이라고 치면.

    이것은 내공 대신 '마나'를 사용하는 몬스터다.

    부웅!

    놓친 몽둥이 대신 휘두른 커다란 주먹을 이번에도 간단히 피하고서, 도진은 손을 들어 오크의 마혈을 찍어 보았다.

    거골혈(巨骨穴). 어깨뼈와 팔의 뼈가 만나는 지점으로 짚히면 저리고 마비가 되어 무기력해 지니 마혈(痲穴)이라 불리는 곳이다.

    인간과 흡사한 신체 구조에 기운의 흐름 또한 유사한 듯하여 시험삼아 찍어본 것이었는데.

    퀘엑!

    '어?'

    피를 토하고선 죽어 버렸다.

    도진으로선,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결과였다.

    소위 말하는 칠공분혈(七孔噴血),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뿜어내며 끔찍하게 죽어 버리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과한 내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천마기도 아닌 순수하게 정제한 내공을 써서 도진 정도나 되는 경지의 무인이 정확하게 점혈을 했는데 칠공분혈을 하며 죽는다니.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으며 이해 또한 되지 않는 일이었다.

    퀴, 퀴이이이익!!

    하나가 그렇게 죽어 버리니 다른 두 마리가 그제서야 겁을 집어먹고 꽁무니를 내뺐다.

    도진은 그것을 쫓는 대신 가만히 서서 지켜 보았다.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안내를 시킨 것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흔적을 잔뜩 남기고 도주하는 걸 추적하는 건 도진에게 있어 너무나 쉬운 일이었으니까.

    일부러 놓아주고서 뒤를 쫓아볼 생각이었다.

    고작 세 마리만 있을 리가 없으니 분명히 부락이 있을 것이었고 거기서부터 또 이곳에 대해 알아볼 참이다.

    잠시 기다려 오크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도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감각을 넓게, 더 넓게 펼쳐 나갔고.

    두근!

    '……!!'

    자신을 지켜보는 거대한 존재감을 깨달았다.

    '이건…….'

    가소천 이후 처음이었다.

    마치 세계를 가득 채우는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가소천이 온갖 수법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불렸던 것과 달리 이쪽은 순수한 존재감으로 세계를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물이로구나.

    위지혁의 말대로 영물이었다.

    그것도 승천을 앞둔 이무기에 준하는, 엄청난.

    그만큼이나 되는 영물이 도진을 지켜보고 있었고 눈치챈 순간 손짓을 하였다.

    이리로 오라고.

    거기에 적대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기에, 도진은 그 영물을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영물의 기운을 솜이 또한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냐아앙!

    도진의 어깨 위에 얌전히 있던 솜이가 벌떡 일어나 박차고 뛰어나갔다.

    정신없이 뛰어가는 솜이의 행동에 도진이 보조를 맞추어 뛰었고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냐아아아아!

    -그래. 나의 아가.

    거기에는, 솜이를 품에 안은 거대한 천산설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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