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훅-
절규하듯 소리쳤던 한유성은 돌연 거리를 좁혔다.
미친 듯 휘몰아치는 눈의 폭풍으로 인해 도진과 자신 사이의 시야가 차단된 그 한 순간의 움직임.
사아아-
내딛은 오른발이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아무런 마찰없이 눈이 쌓인 땅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한 걸음'으로는 있을 수 없는 거리를 줄였고 한순간 쿵, 마찰력이 돌아온 것처럼 땅에 뿌리를 내린다.
못을 박듯 그렇게 오른발을 내딛음으로써 생긴 힘을 무릎을 슬쩍 굽히고 허리를 틀어 증폭시키고 그렇게 커진 힘을 어깨를 거쳐 퉁기듯 쏘아진 오른손에 집중하였다.
파괴력보다는 속도에 집중한 그 오른손이 도진의 손에 들린 열쇠를 노렸다.
제법이었다.
역시나 인성과는 별개로 재능만큼은 말 그대로 '역대급'이라 할 만한 인간.
찰나에 담긴 거리에 관한 깨달음과 이치가 얕지 않다.
특히나 무릎을 굽히면서 팔을 뻗음으로써 생기는 시야와 감각을 일그러뜨리는 미세하지만 크나큰 거리의 조절이 그랬다.
무릎을 굽히는 각도만큼 조금 더 좁혀지는 거리, 팔을 강하게 뻗음으로써 조금 더 길어지는 팔의 거리.
딱 그만큼의 거리로 도진의 열쇠를 노리며 자신과 도진 사이의 간격을 조절했다.
여기에 조금이지만 급격히 낮아진 높이가 손을 시야에서 놓치게 의도하기까지 한다.
물론.
스윽-
도진이 쥔 열쇠에 닿지는 못했다.
미세하게 상체를 뒤로 젖히는 것만으로도 한유성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무엇을 하든, 무흔잠영의 이치에 따라 점이 선이 되지 못하게 하면 무위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쿵!
결과가 확정되기도 전에 그 미래를 인식한 한유성이 즉시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오른발을 디딤발로 삼아 허리를 틀어 우측으로 몸을 90도 돌린다.
그 회전하는 힘을 왼손에 담아 열쇠를 낚아채려 들었고.
도진이 왼발을 뒤로 옮기며 가볍게 몸을 틂으로써 그 행동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까득!
한유성이 이를 악물었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농락당하는 기분이었고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온몸을 움직였다.
훅- 슥- 스으-
손이 허공만을 움켜쥐고 내뻗은 발끝에는 이미 도진이 없었다.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농락이었다.
'이, 개애!'
"새끼가아아아아아……!!!"
턱밑까지 차오른 호흡에 가득 울분을 담아 한유성이 소리쳤다.
호흡을 그렇게 낭비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나, 어차피 도진은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았으니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도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감정을 터뜨려 버린 한유성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살던 놈이었으니 제아무리 경계를 넘어섰다 하여도 결국 저런 꼴이다.
도진이 철저하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리를 유지했다지만 말이다.
누워서 버둥거리며 빼액거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 할까.
훅-
다시 한 번 공간을 접듯, 비현실적으로 거리를 좁혀 코앞에 나타난 도진의 모습에 한유성의 두 눈이 커졌다.
몸과 내공이 본능처럼 움직여 방어하려 들지만.
꽈직!
"……!!!"
그보다 빠르게 도진의 주먹이 먼저 한유성의 갈비뼈를 제대로 때려 버렸다.
"……!!"
"……!!!"
소리가 되지 못하는, 그러나 온몸으로 내지르는 절규가 참으로 처절하다.
다시 한 번 천마기를 제대로 때려박았으니 갈비뼈를, 도진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것조차 지워질 만큼 어마무시한 고통이 한유성을 영혼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여기에 화룡점정.
쿡-
제압당하면 온몸이 마비돼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는 마혈(痲穴)을 천마기로 짚음으로써 한유성은 완벽하게 무력화 되었다.
"……!!"
그래서 오로지 눈으로만 절규하는 한유성은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고통에 매몰되었다.
비유하자면, 그래. 당해본 사람은 이름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는 요로결석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난폭한 천마기가 몸속의 혈도를 아주 그득, 그득. 긁어대고 있으니까.
도진의 부름에 독마전과 오성 그룹의 사람들이 왔음에도 외부에는 신경조차 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열여섯 시간은 꼼짝도 못할 겁니다. 그 사이에 조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한유성의 신병은 오성 그룹을 통하여 한국으로 보냈다.
천마신교 혼자서 처리하기엔 너무나 지은 죄가 큰 악당이기에 한국 정부는 물론이요 세계 정부와 무림맹까지 관여하여 탈탈 털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유성과 오성 그룹마저 떠나보내고 위연서를 포함한 소수의 독마전만이 곁에 있는 자리에서 도진은 다시 한 번, 제대로 열쇠를 신안(神眼)으로 보았다.
크기는 성인의 손가락 두 개 정도 된다.
열쇠라는 카테고리에서 보면 상당한 크기의 열쇠다.
그러나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작다고 할 수 있는 크기의 이 열쇠에 도진의 신안으로도 다 담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밀도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완벽하게 처음 보는 문양이었고 또 '문자'로 추측되는 것들이 2차원의 평면임에도 마치 3차원에 새긴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어떤 방식으로 새겨져 있어 그 자체로 이질적인 기운을 띤다.
열쇠 자체가 이런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솜이가 한유성을 뒤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열쇠의 문양을 따라 기운을 흘림으로써.
'포털이 열렸어.'
이 열쇠는 그저 단순히 허공에 돌림으로써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열쇠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내공이 아닌 '자연지기'를 흘림으로써 생성되는 어떤 작용에 의해 포털이 열리는 것이었다.
한유성이 하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었고 도진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또 파악했다.
-이곳의 과학도 무림의 주술도 아닌 전혀 다른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가소천이 운용했던 포털 시스템과 통하는 부분이 있구나.
그랬다.
장호의 말대로 이 열쇠는 어렴풋하게 포털 시스템과 통하는 부분이 보이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라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것은 '미지'였기에 아직은 논리적으로 말할 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진은 고민했다.
'여기서, 해도 될까.'
여기서 문을 열고 그 너머를 확인해도 될까.
우선 이 안에 무형독이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왜? 일본에 처박혀 있는 카자카미와 레너 집스의 당혹스런 반응이 있었으니까.
모른 척과 진짜로 모르는 건 본질적으로 다르고 그것을 구분하는 건 세이전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러시아로 오는 동안 정보망을 통하여 카자카미와 레너 공방의 혼란스러워하는 반응을 확인했다.
그것은 도진이 도대체, 왜 러시아로 가는지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여 나온 혼란이었다.
이를 통하여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한유성이 도진에게서 도주하기 위하여 사용한 그 상리를 벗어난 스크롤의 존재를 카자카미도 레너도 알지 못했다는 것.
그로 인해 한유성이 러시아로 이동했다는 것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한유성이 열었던 포털 너머에 무형독은 없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위협이라면 포털 너머 어떤 환경이 갖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지만…….
한유성이 들어가려 했던 곳이다.
도진은 이 열쇠를 통하여 열리는 포털 너머를 확인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냐아아아앙-
거기에는 도진의 어깨에 앉은 솜이의 채근 또한 크게 작용하였으니 이 너머를 꼭 확인해 봐야만 한다는 본능의 외침이 있었다.
"위연서."
"예, 지존."
"조금만 물러나 있도록 해."
"존명."
독마전을 뒤로 물리고 도진이 세계와 연결되었다.
스으-
도진을 통하여 자연지기가 열쇠로 흘렀다.
열쇠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을 따라 자연지기가 흐르며 내공이 아닌 다른 이치에 따르는 기운으로 변환되었고 열쇠의 기능을 활성화했다.
파아아아-
푸른 빛을 띠기 시작한 그 열쇠를 도진이 스윽, 허공에서 돌리자.
지이이잉-
문이 열렸다.
성공했다. 포털이 열렸다.
"위연서."
"예, 지존."
"총괄부에 연락해서 이 주변을 지키도록 해. 철저하게."
"존명!"
위연서에게 명한 도진은 한순간 포털을 꿰뚫듯 응시했다.
지극히 안정된 포털이라는 걸 그동안 무림에서 무수히 포털을 보았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포털은 붕괴에서 생성된 게 아니다.
무어라 해야 할까.
굳이 비유하자면 '정식으로 인가된 문'이라는 느낌이 들어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세상의 이치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안전하다.
어깨에 앉은 솜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솜이는 당장이라도 저 너머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도진이 옅게 웃었다.
"갈까, 솜이야."
냐아아앙!
"그래. 가자."
"그리고 연서야."
"예, 지존."
"여기서 잠시만 대기해 줘."
"준명."
위연서를 대기시킨 뒤 도진은 솜이를 어깨에 앉힌 채로.
망설임없이 포털에 돌입했다.
* * * *
솜이의 반응으로 볼 때 이런 류의 포털을 넘어온 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 포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솜이는 천산설표(天山雪豹)라 불리는 영물이다.
본래 설표라는 영물은 몸 안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기운을 품고 있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져 환골탈태를 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정도였다.
때문에 설표는 환경의 도움을 받고자 만년설이 내린 천산에 대부분이 살아 천산설표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에 미루어 간단히 생각하면 천산에 살던 설표 몇 마리가 당시 혼란기에 천마신교가 와해된 후 무림을 탈취한 이단 세력에게 쫓기다 이곳으로 넘어왔다, 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간단하다. 천마신교가 양립할 수 없는 제국을 떠나 자리잡은 천산은, 십만대산은 세계의 붕괴에 휘말려 사라졌으니까.
'멀쩡한 포털 너머'가 천산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의 붕괴와 함께 시간선 또한 엉망이 되었으니 이쪽 시간대가 현대일 때 솜이를 포함한 설표들이 쫓기는 일이 가능할 수는 있었지만 지금 러시아의 극동에서 연 포털을 타고 넘어간 곳이 천산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도진은 만일을 대비하여 최대한 긴장하면서 그 어떤 힘도 작용하지 않는 바다와 같은 이해를 벗어난 공간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풍경을 두 눈에 담게 됐다.
혹시나 하였던 위협은 전혀 없었다.
위협 이전에 그 어떤 사람도 문명의 흔적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자신들이 행성을 지배하는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식물들이 있었다.
아주 커다란 식물들이 뻗어 있다.
도진이 아는 것들과는 궤를 달리하여 이질적인 생김새의 그 풀들은, 도진보다도 컸다.
풀들만이 아니었다.
나무 또한 거대하여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으며 도진이 열 명이 되어도 다 끌어안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도진은 살면서 제법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아마존도 있었고 같은 사람이 살지만 전혀 다른 세계라는 걸 인식시켜 주는, 무림 세계의 오지 또한 있었다.
그러니까 도진은 언뜻 보기에 이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풍경을 몇 번이나 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도진이었음에도 이 커다란 식물들의 생김새는 생소하고 또 이질적이었다.
'이 세계'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뭐야,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