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아직 도진이 잠룡이라 불리던 시절.
한국에서 세계 장인 박람회가 열렸었다.
명장 우벽진이 미국의 경매장에 내놓은 작품이 최고가를 경신하며 존앤집스 공방이 가지고 있던 최고의 타이틀을 위협하였고 그 명성에 힘입어 한국에서 세계 장인 박람회가 열린 것이었다.
이 행사에서 도진은 상당히 많은 인연을 만났으니 좋은 쪽으로는 덴젤 공방이었고 나쁜 쪽으로는 존앤집스였다.
클로에 덴젤을 만나 그녀의 내공 거부 체질을 고쳐 주며 제자로 들였고 덴젤 공방과도 혈맹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존 스미스와 처음 만나 대립하였고 그가 무형독의 간부라는 걸 알게 되면서 존앤집스의 몰락까지 이어졌다.
굵직하게는 이렇게 두 공방을 꼽을 수 있었는데 그 외의 인연도 있었다.
이를테면 처음엔 좋지 않았던, 존앤집스 공방의 후기지수로 존 스미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나 어느 정도 개과천선하여 관계를 바꾼 빌리 플로이드.
여기에 4강에서 상미와 겨루었던 쿠사나기 이치로도 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고 박람회가 끝난 뒤 따로 연락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인연은 인연이다.
쿠사나기 공방.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전통의 공방.
한국에서도 쿠사나기의 명장이 만든 작품쯤 되면 대기업 회장님 정도는 되어야 손에 쥔다고 해서 '대기업 회장님의 검'이라고 부를 만큼 유명한 공방이었다.
쿠사나기 이치로는 그 쿠사나기 공방의 후계자이면서 동시에 일본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무인(武人)이라기엔 비쩍 마른 몸의 그는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대단한 인물이었으니 장기로 하는 쾌검(快劍)에 육체를 최적화한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하게 단련한 것이 아니라 무공에 육체를 맞추어 단련했다.
그렇게 최적화한 육체로 펼치는 쾌검은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일본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비쩍 말랐지만 극한까지 압축한 육체였다.
속도를 추구하였지만 단순히 빠른 게 아니라 폭발적인 힘이 깃들 수 있도록 단련하였기에 말랐지만 그 이상으로 단단했다.
그 단단한 육체에 깃들어 흐르는 내공은 언제라도 단숨에 폭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웅크린 맹수와 같았다.
그런 육체와 내공을 다스리는 정신이 느슨할 수는 없었으니 도진의 기억 속 쿠사나기 이치로는 그 명성에 걸맞는 기세를 두른 무인이었다.
그 기억 속 쿠사나기 이치로는.
저벅. 저벅.
분명히 동일인이었음에도 지금 도진의 앞에서 걷는 이와 일치하지 않았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아니다.
항거할 수 없는 풍파에 깎이고 또 꺾여 버린 등이었다.
기억보다 더 말라 버린 육체는 앙상했고 단단했던 근육 또한 힘을 잃었다.
언제라도 상대를 덮칠 수 있도록 팽팽하게 흐르던 내공 역시, 힘을 잃은 육체를 힘겹게 적시고만 있었다.
무엇보다.
휘이잉-
차가워진 바람에 흩날리는 왼쪽의 소매가, 기억 속 쿠사나기 이치로와 눈앞의 쿠사나기 이치로를 겹칠 수 없게 만들었다.
쿠사나기 공방의 후계자이자 후기지수였던 쾌검수(快劍手) 쿠사나기 이치로는.
외팔이가 되어 있었다.
"이쪽입니다."
하나만 남은 팔이 안내하는 방향에 따라 안에 들어섰다.
한국과는 다른 느낌의 고풍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응접실에서 쿠사나기 이치로와 도진, 그리고 두 명의 스태프가 마주 앉았다.
"우선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었군요."
'메이와쿠.'
메이와쿠(迷惑).
남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본 문화에 대해선 도진도 들은 바가 있었다.
단순히 들은 걸 넘어 일본에서 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쿠사나기 이치로는 당시와 달리 팔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도진에게 좋지 못하게 비치는 걸 사과한 것이었다.
"아뇨. 못난 모습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도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잘못된 억압에 대한 저항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렸다.
쿠사나기 이치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힘이 부족했고 이리 되었으니 못난 결과일 뿐입니다."
부정적이고 또 패배감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이곳 분들이 모두, 비슷한 뜻인가 보군요."
도진의 말을 쿠사나기 이치로는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를 만든 건 인간이지만, 그 인간은 이제 사회의 부품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사회는 이제 인간 한둘이 간섭하여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를테면 터무니없는 부정을 저질러 무수한 욕과 비난에 직면한 국회의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뻔뻔하게 자리를 지키는 게 가능한 것도 그 욕과 비난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시스템 때문이다.
수십, 수백, 수천이 시위를 한다 하여도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면.
"일본은 그 핵심이 변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정부에서 거대 문파로 넘어가려 한다.
그에 따른 변화는 시스템을 이루는 일부에게도 변화를 요구하였으니 쿠사나기 공방을 포함한 대장장이 마을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를 거부하였고, 부서진 것입니다."
변화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면 오히려 시스템의 변화를 자신에게 맞출 수 있었겠지만 대장장이 마을은 그만큼 단단하거나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변화를 거부하였으니 변화하는 틀에 맞지 않은 만큼 대장장이 마을은 부서지고 말았다.
-일본 대장장이 총조합은 무림청에 자격 등록을 하라.
시작은 그것이었다.
아날로그식이었고 또 주먹구구식이었던 대장장이 업계의 자격증 등을 전산화하겠다는 공문.
어느 정도 반발이 있었으나 명분과 여론의 지지가 저쪽에 있었고 그로 인한 예상을 넘어선 강력한 압박에 결국 손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신상이 모조리 전산화 되고서부터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야금술부터 시작하여 대장장이가 가진 기술들의 외부 유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가해진 통제들과 거대 문파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니 대번에 들어온 조사, 조사, 조사.
그뿐인가.
아예 대장일을 할 수 없도록 재료를 사는 것조차 '법'으로 제한을 해 버렸다.
이미 거대 문파들은 그런 법을 입맛대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나라를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횡포에 분노하여 일어났고, 부서졌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패배였는지, 쿠사나기 이치로의 휑한 소맷자락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뒤에 무형독이 있다고 하셨지요.
이어지는 말은 섭음술이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찬가지로 섭음술로 예, 하고 답했다.
-그 말씀을 믿지만 그럼에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쿠사나기 이치로를 포함하여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 도진은 거대 문파들의 뒤에 무형독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허나 그들은 그럼에도, 이치로를 통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친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터뜨린다 하여도 이슈에 그칠 것입니다.
명확한 증거가 없었던 거다.
정황 증거야 있다. 도진이 직접 꿰뚫어 보기도 했다.
허나 그럼에도.
'사회의 시스템'이 되어 버린 거대 문파를 거꾸러뜨리기엔 그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애초에 그것들을 가지고 싸우는 것 자체가 어렵다.
일본의 '내정'에 외부인인 천마신교가 간섭하여 싸우는 건 그 자체로 이미 무리수가 되어 버리는 거다.
그들에 대항하였던 대장장이 마을은 이미 일패도지(一敗塗地), 부서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었고 천마신교는 부족한 증거 이전에 타국에 개입하여 본격적으로 싸우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쿠사나기 이치로의 눈에는.
-카자카미 가문이 무형독이라는데?
-와, 찌라시 존나 세게 뿌리네 ㅋㅋㅋ 증거가 뭐래?
-뭐 이런 게 있다던데..
-또 카더라네.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
"……."
"……."
대화가 멈추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그때였다.
철컥.
조용한 마을에 낯선 날붙이의 기척들이 들어섰다.
쿠사나기 이치로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뒤를 따라 나선 도진은 곧 한 무리의 무인들이 살벌한 기세로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쵸 상."
그들의 앞에 선 쿠사나기 이치로가 리더로 보이는 이를 그렇게 불렀다.
쵸 상(チョウさん), 그러니까 '나비님'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무리의 앞에 선 젊은 무인은 일본 전통 무복 상의의 절반을 풀어헤쳐 드러내 놓고 있었는데 그 상반신을 뒤덮는 나비 이레즈미, 그러니까 문신이 있었다.
나비 문신의 무인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퇴거 명령을 내린지가 언제인데, 아직 준비조차 하지 않은 듯 보이는군요. 이치로 상."
"이의를 제기하였으니 아직 결정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쿠사나기 이치로는 말은 그리 하였으나 태도는 마치 색이 빠진, 포기하여 다 놓은 듯 허허로웠다.
나비 문신의 무인 뒤에 늘어선 자들이 푸히히 웃었다.
허나 그것은 쿠사나기 이치로가 아닌, 오히려 나비 문신의 무인을 조롱하는 듯 하였으니 묘했다.
그리고 나비 문신 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의미없는 시간을 끌어 나라에 피해를 끼칠 겁니까. 아니면, 혹시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리 말한 나비 문신 무인의 시선이 돌연 뒤에 서 있던 도진과 두 명의 스태프에게로 향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예, 예?"
"…외부인? 수상하군요."
갑작스런 시선에 당황하여 스태프가 반사적으로 한국어로 대답하였고 나비 문신 무인의 얼굴이 대번에 수상쩍은 자를 대하는 표정으로 변하였다.
성큼성큼, 그가 위협적인 기세를 풀풀 풍기며 다가와 스태프를 압박했다.
"무슨 이유로 이곳을 방문하였습니까?"
"아, 그, 저."
평범한 스태프는 무인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수상하군요.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나비 문신 무인은 그리 말하며 스태프들을 연행하려 했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버벅이던 스태프가 다급히 정신을 붙잡으며 외쳤다.
"아니, 아닙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선 여권과 함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바른 엔터테인먼트의 사원증을 꺼내 들었다.
"저는 바른 엔터의 사원으로 이번에 슈퍼스타 B의 촬영 협조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촬영 협조? 그런 일이라면 관리를 맡고 있는 우리 신풍회 지부를 먼저 찾아왔어야지 어째서 이곳부터 찾아왔습니까?"
"그것은……."
"여기서 더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명은 신풍회 지부에서 듣겠습니다. 순순히 따라 오십시오."
그리 말하는 나비 문신 무인의 기세가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 연행하겠다는 듯 스태프를 옭아매려 했다.
스으-
그리고 그 기세를, 스태프와 나비 문신 무인의 가운데 한 걸음 내딛은 도진이 끊어냈다.
"…당신은."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비 문신 무인이 경계하였다.
도진이 그를 마주하여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같은 한국 사람끼리, 조금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요?"
한국어로.
"……."
나비 문신 무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