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화
못 듣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 멀고도 은밀한 목소리였다.
만약 도진의 감각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롭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이쪽 세계에선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른 도진이라 하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 환경부터가 그랬다.
한창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콘서트홀은 무수한 소리와 기척들로 가득하였으니 청각은 물론이요 온갖 감각을 마비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콘서트홀의 지하 주차장에서 넘어갈 수 없는 단어를 입에 담은 그가 있던 으슥한 자재 창고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니 웬만한 수준으로는 내공을 동원하여 감각을 최대한 증폭하여도 듣지 못했을 환경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에게 있어선 여러가지 불행이 동시에 겹친 것이었다.
일정 경지를 넘어선 무림인은 굳이 내공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평상시의 감각이 극도로 집중한 일반인보다 예민해진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겠지만 이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이 평범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었으니까.
때문에 그들은 감각을 '조율'하는 요령을 익혀야만 했고 도진 또한 그렇게 평상시엔 감각을 조율하였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필요한 거리까지는 감각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범위를 벗어나면 그물의 얼개를 느슨하게 하듯 감각의 얼개를 느슨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모든 것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키워드'를 정하여 거기에만큼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한다.
도진에게는 그것이 위험한 단어의 언급과 함께 내공의 운용이었으니 그는 차라리 섭음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도진이 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필 폭탄을 설치했다는 말을 섭음술로, 그것도 도진이 평소보다 예민했던 시기에 함으로써 불행이 몰려온 꼴이다.
스으-
도진의 감각이 세계와 동화하여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간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인간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정보량이 덮치지만 말 그대로 바람처렴 스쳐가고 또 흘림으로써 해결하고선 원하던 정보, 폭탄을 설치했다는 자를 붙잡는다.
지극히 평범한 서양인이다.
평범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 평범한 경지의 일반인.
오늘의 콘서트를 위해 임시 고용된 아르바이트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목걸이에 걸고 있다.
장비와 자재를 담당하는 듯 보였는데 그런 업무를 맡고 있으니 은밀하게 폭탄을 설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러세요, 대표님?"
감각을 넓혀 살피느라 우뚝 멈춰선 도진의 곁에서 레서 밀리나가 물었다.
도진은 감각을 유지한 채, 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긴 거 같아요."
"네?"
레서 밀리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들어가세요. 늦지 않게 찾아갈게요."
"네. 알겠어요."
무슨 일이냐고 레서 밀리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도진을 신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매니저, 그리고 스태프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고 혼자 남은 도진은 세계에 녹아들었다.
부지역(不知域).
인지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선 도진은 찰나의 순간 거리를 좁혀 아직 통화 중인 아르바이트생의 뒤에 섰다.
물론, 아르바이트생은 그런 도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통화를 계속했다.
-확실하게 했지?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원래 목소리를 짐작조차 못할 정도로 변조되어 있었다.
"예. 지시하신 곳에 확실하게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두었습니다."
-좋아. 위치 확인 됐어.
"저…… 약속하신 돈은."
-10분 내로 입금될 거야.
"감사합니다."
통화는 거기서 상대방이 끊음으로써 끝이 났다.
아르바이트생은 긴장으로 가득한 숨을 내뱉고선 전화를 넣고 몸을 돌렸다.
모자를 고쳐 눌러쓰는 그의 눈동자는 젊음에도 불구하고 탁했다.
'…도박인가.'
도진이 꿰뚫어 보는 그의 몸에는 마약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니 도박을 하며 자연스레 대마초라도 핀 게 아닐까 짚어보는 도진이었다.
아까의 통화까지 더하면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런 짓을 한 듯 보였다.
자재를 챙겨 바깥으로 나가는 그를 주시하며 주위를 살폈으나 폭탄은 없었다.
감각을 더 날카롭게 벼려 확장해 나가니 구석진 곳의 다른 자재 창고를 포함하여 네 군데나 되는 곳에서 폭탄을 찾을 수 있었다.
'액체 폭탄.'
폭탄은 액체 폭탄이었다.
요즘 화약보다 더 많이 쓰이는 것이 액체 폭탄이었으니 무색무취라 무림인들의 감각을 속이는 데 월등하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도진은 이런 식으로 액체 폭탄을 마주하는 게 두 번째였으니 문월동 달동네에서 있었던 연쇄 방화 사건 때문이다. 윤상미의 아버지까지 얽혔던.
그때 범인이 사용했던 것도 액체 폭탄이다 보니 더 감각에 걸렸다.
그런 폭탄이 네 군데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개중 하나가 관객석 아래여서 도진의 눈동자에 서늘함이 깃들게 만들었다.
작고 단순한 외관의, 언뜻 보면 작은 물건을 포장한 상자 같은 것이 관객석 아래 어두운 곳에 붙어 있다.
흑백의 디스플레이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원격으로 조종하여 터뜨릴 수 있는 전자 장치가 포함된 폭탄으로 보였으나 전문가가 아닌 도진이 전부 다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GPS 기능이 있어 이것을 옮긴다면 주동자가 알게 될 거라는 건 확실했다.
폭탄을 설치한 아르바이트생과의 통화에서 위치가 확인됐다고 주동자가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 주동자가 이곳에 없는 것도 도진은 확인했다.
"……."
도진이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곳이 미국이다 보니 아무래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한국이나 바할라보다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 좁은 선택지 안에서 도진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가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도진을 반겼다.
-와! 후배!
"네, 선배."
* * * *
통화를 마친 도진은 관계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통로 앞에 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네. 안녕하세요."
한국인과 미국인이 섞인 스태프들의 인사에 답하며 도진이 관계자용의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단순한 종이 출입증이 아니라 식별용 칩이 내장된 출입증으로 이것을 이용해야만 아티스트들이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과할 수 있었다.
-시퀀스 체크!
-문제 없습니다!
-드레스는?
-대기 중입니다!
목소리가 조금 높다.
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밀하게 연계되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서로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것이다.
우아한 백조, 그러니까 고니가 사실 물 아래에서는 필사적으로 물장구를 치고 있다는 말은 사실 거짓이지만 그것을 떠올리게 할 만큼 콘서트 무대 뒤편은 전쟁터였다.
도진은 그런 스태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존재감을 옅게 하고선 어느 대기실 앞에 섰다.
[뉴에이지(Newage)]
대기실의 명패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뉴에이지.
바른 엔터의 차세대를 이끌어 갈 신인 걸그룹.
아니. 이제 2년차이니까 아이돌 업계에서는 그래도 신인 티는 벗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어쨌든. 도진에게는 조금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동생이 리더로 있는 걸그룹의 대기실이었다.
똑똑.
"네!"
아이돌답게 활달함으로 조금은 톤이 높은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달칵.
"바쁠 텐데 잠시 실례할게."
"대표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며 말하는 도진을 확인한 네 명의 소녀 중 세 명의 소녀가 벌떡 일어서고 남은 한 명은 그보다는 천천히 일어났다.
하나같이 눈부신 소녀들이다.
활달하고 구김없고 자신의 매력을 갈고닦아 별처럼 반짝인다.
"대표님!"
"어서 오세요!"
쪼르르 다가와 반기는 그녀들에게 도진이 웃어 주었다.
"생각보다 긴장 안하고 있네?"
"아뇨! 엄청 긴장하고 있는데요!"
두 팔을 교차하여 엑스 모양을 만들며 대답하는 건 강아지를 연상케하는 인상의 소녀다.
소위 볼매, 볼수록 빠져들게 만든다는 평가의 멤버로 이름이 연우였는데 사실 도진은 전생에서부터 이 소녀를 알고 있었다.
직접적은 물론이요 간접적으로도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사회면의 기사에도 실렸을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된 연예계 사건의 피해자로 나온 그녀의 이름을 보았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1티어 걸그룹'에서도 핵심 멤버로 활동했던 그녀가 재계약 시즌에 알고 보니 노예마냥 착취당하며 제대로 정산도 받지 못했다는 게 드러나며 난리가 났었다.
거기서 시작해 소속사가 저질렀던 온갖 충격적인 짓거리들이 하나둘 드러나며 대한민국은 물론이요 외신마저 웅성이게 만들었으니 그 소속사가 바로 문방구 엔터였다.
그래. 그 문방구 엔터다.
레드슈부터 시작해 안티체리까지 엮였던 그곳.
도진의 전생 대로라면 이 시기 연우는 문방구 엔터가 야심차게 데뷔시킨 걸그룹의 일원이었겠지만 지금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문방구 엔터는 사라졌고 연우는 바른 엔터의 걸그룹 뉴에이지의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일 것이다.
그녀 너머에 있는 유진이의 빛나는 모습처럼.
"아이고, 우리 유진이 예쁘네."
도진의 칭찬에 유진이는 연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괜찮아?"
"응. 대표님도 괜찮다고 하시잖아."
"오빠 말은 다 믿으면 안 돼. 오빠는 항상 예쁘다고 한단 말이야."
"와……."
연우가 입을 살짝 벌렸고 다른 두 멤버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남매 사이 원래 안 저렇지 않아?"
"우리 오빠는 나보고 고릴라라고 해."
"풉."
"웃어?"
"나이 차이 좀 나면 사이 좋다고 하던데."
"근데 다섯 살 정도면 좀 애매하잖아?"
"그렇지."
"근데 대표님이면 그럴 수도 있지."
"아, 그건 인정."
"전에 우리 김 리다가 그랬는데 어릴 적에 대표님이 씻는 법도 알려주고 그러셨대."
"그러면 그럴 수 있지."
"야! 그게 왜 지금 나와!"
"왜애. 예능 나가서 자기 입으로 다 말해 놓고선."
마치 비글들마냥 자기들끼리 복작이는 게 귀여워 도진은 또 웃었다.
"뉴에이지 준비해 주세요!"
"네!"
스태프들의 호출에 비글과 같았던 뉴에이지의 얼굴이 대번에 프로페셔널하게 바뀌었다.
데뷔 2년차.
짧다면 짧지만 이 치열한 세계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온 시간들이 묻어나는 것이다.
"잘하고 와! 지켜볼 거니까."
"네!"
도진의 배웅을 받으며 유진이와 세 명의 소녀들이 무대로 향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모르는 이가 드문 1티어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다르다.
조금씩 인지도를 얻고 있는, 그러나 의문 부호가 붙어 있는 걸그룹.
유진이와 소녀들은 오늘 무대에서 그 의문 부호를 지우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해왔고 그 노력을 도진은 두 눈으로 보았었다.
그러니까.
그녀들의 무대와 오늘의 콘서트는 결코 망쳐져선 안 됐다.
* * * *
-지금 당장 폭탄이 설치돼 있다는 걸 관객들에게 알리도록 해. 그러지 않으면,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야.
변조된 목소리로 협박하는 테러범에게 도진이 답했다.
"아니. 오늘 좋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