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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701화 (701/741)

701화

백설(白雪)은 도진에게 있어 첫 번째 검이자 명검이었다.

명장 우벽진이 한을 토해내기 위해 오랜 세월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던 철을, 그 한을 풀어준 도진에게 이윽고 완성하여 건넨 지금의 과학을 넘어선 명검.

그 이름처럼 백설은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과 같은 특성을 지녔고 도진은 그 흰색에 자신의 색을 칠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실제로 백설은 도진에게 최적화된 검으로 바뀌어 나갔다.

천마기를 받아들여 거기에 익숙해졌고 흡수만이 아닌 발산에 있어서도 효율이 높아졌다.

본래 극도로 흉포한 천마기인 만큼 최소 명검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천마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견딘다'는 개념이기에 내구도를 갉아먹는다.

사실은, 백설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우벽진에게 맡겨 전체적으로 손질을 해야 했으나 그게 또 흠이 되지는 않았다.

검이란 게 결코 영원히 불변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주기적으로 관리를 하는 게 당연했다.

다만 한 가지 백설이 특별했던 건 그 관리에 있어 천마기로 인한 손상은 지극히 미미했다는 부분이다.

새하얀 눈밭과 같이 '비어 있던' 백설이었기에 천마기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동화함으로써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다른 검을 찾는 대신 성장을 함께하며 정이 든 백설의 수리를, 더 나은 형태로의 재탄생을 우벽진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약 2년 뒤. 우벽진은 녹이고 새로 만든 백설을 가지고 도진을 찾았다.

도진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듯 우벽진 또한 쉼없이 정진하였으니 우벽진이 나아간 만큼 백설은 전에 비할 수 없는 수준의 대단한 명검으로 재탄생하였다.

그 백설을 도진에게 건네며 우벽진이 말했다.

-한 번 휘둘러 보겠나?

-네.

우벽진의 제안에 따라 도진이 천마기를 일으켜 백설에 담은 채 휘둘러 보았다.

스으-

지극히 고요한 한 번의 휘두름이었다.

얼핏 대단하지 않았고 뛰어나지 않은, 그저 하나의 선을 그었을 뿐인.

그러나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면 끝없이 전율했을 만큼 지극한 이치가 담긴 일검이었고 도진과 우벽진은.

우우웅-

백설의 미완(未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우벽진은 그렇게 말했고 진실이었다.

천마기가 깃들었고 거기에 적응한 백설을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른 우벽진이 2년 동안 두드려 새로이 완성한 백설은 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명검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아득한 경지로 나아간 천마(天魔) 김도진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명장 우벽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희대의 명검으로 백설을 재탄생시켰음에도 만족하지 못하였고 도진은 단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우벽진이 포기하지 않은 것까지도, 말이다.

-어디까지나 지금, 이란 말씀이시죠?

도진의 그 말에 우벽진이 타오르는 화로를 닮은 얼굴로, 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로 화가 나지만 말이야, 지금 나의 실력으론 혼자서 백설을 완성할 수 없겠더군.

-그 말씀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우벽진과는 같은 취미, 가구를 만드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지만 대장장이로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벽진이 말한 도움은 당연히 그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고.

-자네의 기운을 꾸준히 백설에 담고 주기적으로 그것을 내가 두드릴 수 있게 해 주겠나?

백설을 천마기에 꾸준히 노출시킨 뒤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백설은 천마기를 받아들이면서 성장을 하고 있어. 그 성장을 촉진하고 더 높은 곳으로 이끈다면, 백설은 완성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제아무리 명장의 기술이 현대 과학 너머 신비에 닿아 있다지만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니 위지혁이 감탄하여 말한 것이었다.

저것이 바로, 천마신검(天魔神劍)을 만드는 비술(秘術)이라고.

-교에는 본래 몇 개의 신물(神物)이 있었으니 개중 천마를 상징하는 검이 있어 천마신검이라 불리며 천하제일의 명검이었느니라.

천마신검. 천마와 함께하면서 천하오대명검 중 수좌(首座)로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 불린,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 천하제일의 명검이었다.

-천마신검이 그리 불릴 수 있었던 건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담금질을 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철이란 무생물이니 철로 만든 검 또한 '성장'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 한계가 명확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천마신검은 그 한계를 깨고 성장하였으니 역대 천마 중 한 명과 희대의 대장장이 덕분이었다.

-역대의 천마 중 물건을 소중히 하고 또 아꼈던 이가 있었으니 천마기에 검이 상하지 않도록 공을 들였다. 그 덕분에 명검은 아주 오랜 세월을 천마기에 노출되고 또 길이 들었으니 명장이 알아보고 그것을 담금질하여 천마신검의 시작이 된 것이다.

비록 백설처럼 공백에서 시작한 건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천마기에 노출되면서 길이 들고 그것을 또 특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 담금질하기를 이백여 년.

명검은 천마신검이 되었고 천하제일검의 수좌가 되어 천마신교의 신물이자 천마의 상징이 되었다.

위지혁의 설명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때와 같은 조건이 지금 갖추어진 것이네요.

-그렇다. 잃어버린 천마의 신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이니라.

기존의 천마신검은 천마를 상징하는 신물이었으니 당연히 위지혁이 패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타깝게도 위지혁이 세계의 붕괴에 휘말리며 분실되고 말았다.

동시에 저쪽 세계에 있던 천마신검의 제조법과 함께 그 기술을 잇던 대장장이도 사라지고 말았으니 다시는 천마신검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기꺼워하는 스승의 기색에 도진도 미소지으며 현실의 우벽진에게 말했다.

-역시. 지구 최고의 명장은 우 명장님이 확실한 거 같네요.

-혼자서 검도 완성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을 띄워주다니. 자네도 참 성질이 고약하구먼.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고 그렇게.

까아앙-! 까아앙-!

미완의 백설을 완성으로 이끌기 위하여 계속 함께하고 있었다.

천마기가 깃든 특별한 철은 마치 생물처럼 한계를 확장한다.

더 단단해질 수 있고 더 유연해질 수 있다.

다만 그저 그대로 두어선 가능성으로만 남으니 그 한계를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실력을 지닌 대장장이가 필요했고 우벽진이 바로 그 대장장이의 역할을 수행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설이 '천마신검'이 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급할 것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진하는 우벽진의 모습을 보는 것이 도진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우벽진이 말했었다.

도진이 하늘에 닿을 것이라면 자신은 대장장이답게 계단을 만들어서라도 따라가겠다고.

그리고 지금.

하늘에 닿은 도진에게 걸맞는 검을 만들기 위해서 거침없이 망치를 두들기는 모습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대장장이로서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드는 모습과 같지 않은가.

미소짓지 않을 수 없는 도진이었다.

까아아앙-!

망치질은 세상이 노을빛으로 물들 때가 되어서야 멎었다.

-감축드리나이다!

천마신교의 구성원들 중 특히나 기뻐하여 외치던 열렬한 교도, 위연서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받게나."

화로처럼 후끈한 열기를 피워올리는 우벽진에게서 백설을 받아들었다.

조금 더 성장한, 완성에 가까워진 백설이 닿은 피부를 통하여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내가 할 말이라네."

다시 한 번 서로 웃었다.

우벽진은 흘린 땀을 씻기 위하여 샤워실로 향했고 도진은 공방을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백설 말고도 이곳을 찾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에 잠시 기다리니 곧 우벽진이 샤워를 마치고 편한 차림으로 나왔고.

"서진이도 왔네요."

"딱 맞췄군."

"그러게요."

우벽진과 이야기를 나누러 온 김에 한 번 얼굴을 보려 했던, 우벽진의 손자 우서진도 도착하였다.

"형!"

반갑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건 눈부신 '미인'이다.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죽 중심의 거친 복장이지만 외모는 완전히 반대다.

어깨부터 시작하여 목선, 그리고 턱선까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다.

그 피부와 대조되어 붉은 입술과 깊고 까만 눈동자가 강조된다.

여기에 질끈 묶었으나 밤하늘을 담은 비단과 같은 머릿결까지.

복장과 대비되는 언밸런스한 외모는 그렇기에 더욱 특별해졌다.

우서진.

우벽진의 '손자'로 그의 기술을 이을 차세대의 명장이자 무림인이다.

웬만한 미인보다 더 아름다운 미인.

공신력 있는 매체 선정 미녀들이 절대로 곁에 서고 싶지 않은 폭력적으로 아름다운 남자 1위.

그렇게 외모로 유명한 우서진은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자랑이 아니었으니 이 외모가 긍정적인 이유로 얻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음지체(三陰之體).

음기를 강하게 타고나 서서히 신체가 얼어붙어 생명 활동이 멎는 걸 느껴야만 하는 끔찍한 절맥이었다.

우벽진의 한(恨)으로 도진의 전생에서 우서진은 이 체질을 극복하거나 고치지 못하여 단명했었다.

허나 이번 생에선 도진의 도움으로 절맥을 극복하고 그 강한 한기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이런 외모를 가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서진은 이에 관해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굳이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기에 관련하여 길게 이야기하는 건 반기지 않았다.

도진은 손을 들고 흔드는 우서진을 웃으며 반겨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또 사람을 때렸느냐, 서진아."

"……?"

우서진의 예쁜 얼굴이 순간 어벙해졌다.

"형?"

그 반응에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어떤 만화에서 사람을 때린 상남자에게 보호자가 한 말이었어."

혹시나 알까 싶어 던져 본 드립이었는데 우서진이 그 만화를 몰라서 실패한 드립이 돼 버렸다.

도진은 실패한 드립을 포기하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누구 줘팬 모양인데 또 시비가 걸린 거야?"

"응."

"허어."

우서진의 긍정에 우벽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 다 기본적으로 도진이 어떻게 알았느냐에 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도진의 '꿰뚫어 보는 눈'이야 이제와서 신기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우서진이 이곳에 오기 전 내공을 운용하여 한판 했다는 걸 알아보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신경써야 할 것은 그렇게 우서진이 한판한 이유였고.

"양아치 놈이 호텔 가서 같이 자자니 어쩌니 하면서 시비를 걸었거든."

"그래서?"

"광장에서 새우로 만들어 줬지."

"잘했어. 그래야 서진이지."

도진이 우벽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서진.

이 미인이 천마 김도진이 아끼는 동생이자 스스로도 고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서진은 자주 이곳 LA에서 시비가 걸리곤 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지겹게도 나오는 이름.

천마신교의 이단이자 무형독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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