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체포된 문 씨가 여전히 침묵하는 가운데 오성은 자금 추적에 집중하겠다고…….]
두 횡령범 중 한 명은 불안정한 포털에 몸을 던짐으로써 사실상 목숨을 끊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광신도답게 상식인이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침묵을 택한 가운데 오성은 그들이 빼돌린 자금의 추적에 집중했다.
범인들에게선 무언가를 얻기 힘들었지만 그들이 빼돌린 자금을 추적함으로써 꼬리가 아닌 몸통에 닿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성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자군 오군성, 회장님의 명령 때문에라도 거기에 역량을 집중해야만 했다.
허나 그런 오성보다도 한 발 앞서서 자금을 추적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천마신교 세이전의 전주 나지윤이었다.
"그렇구나. 금화 쪽 차명 계좌를 썼단 말이지."
"네."
도진의 앞에서 나지윤의 정보에 고개를 주억이는 건 그 행동에 따라 찬란한 금발이 찰랑이는 미녀다.
금화의 영애. 그러나 그 화려한 이름과 달리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취급을 받아야만 했던 사람.
때문에 금봉(金鳳)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제는 천마신교 총괄부의 우부주(右府主)로 불리는 한유아였다.
"그런데 그게 스위스도 아니고 싱가포르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무려 미국이란 말이지?"
"그렇다네요."
"…냄새가 나네."
그러면서 콧잔등을 찡그리는 모습이 또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매력적인 모습과 달리 사안은 복잡했다.
"한유성은 스위스랑 싱가포르, 영국 쪽을 주로 썼단 말이야."
한유성.
지금은 해체된 금화의 마지막 부회장이자 실질적으로는 회장의 역할을 하면서 금군(金君)이라 불리던 대한민국의 한 시대를 대표하던 인물.
아예 대통령보다 더 대한민국을 알리고 빛내고 또 대표한다고까지 칭송받던 사람이었고 그만큼이나 굳건한 지지를 받았던 만큼 끝없이 추락한 이름이었다.
러시아로 넘어가 대한민국 정부를 비난할 때까지도 소수나마 한유성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한유성이 무려, 무형독의 간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모든 것이 무너졌다.
세뇌당한 것도 아니고 단순 협력한 것도 아닌 주도적으로 활동한 간부였다는 게 들통나며 그는 배군(背君), 세계의 배신자가 되었다.
가소천이 패배하고 저쪽 세계의 본거지가 무너지면서 무형독의 간부였음이 들통난 한유성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끈덕지게 그늘에 숨어 세를 늘리고 있는 무형독의 간부로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을 테지만 요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꼬리조차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한데 바로 이번에.
그 꼬리를 붙잡을 기회를 잡았다.
한유아가 말했다.
"내가 진짜 이 악물고 금화 뒷조사를 했잖아?"
"네, 그랬죠."
처음엔 금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천마신교로 온 뒤로는 그 추악한 모습을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한유아는 금화의 조사에 많은 힘을 쏟았다.
개중에 특히나 효과적인 비자금의 추적에도 많은 비중을 두었는데 금화는 주로 스위스와 싱가포르, 그리고 영국을 이용했었고 미국은 아예 등장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미국은 그런 돈을 굴릴 곳을 찾는 나라지 받는 나라가 아니고 말이다.
한데 빼돌린 돈이 미국으로 흘렀다?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진이 네가 직접 미국으로 가는 거야?"
"네.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마침 좋은 명분이 있잖아요?"
도진의 말에 한유아가 아, 분홍빛이 도는 입술을 조금 열고선 말했다.
"슈퍼스타 B?"
"네."
* * * *
[천마(天魔) 김도진.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정상 이세계(異世界) 정기 협의회'에 참석.]
오성의 임원 회의에 깜짝 참석을 했던 도진은 얼마간 한국에 머물다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세계 정상 이세계 정기 협의회, 그러니까 무림 세계에 관한 정상들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멸망해 가는 세계라고는 하나 전혀 다른 세계였고 탐사를 포함하여 많은 것들을 시도하고 또 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았으니 거듭 각국의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를 가졌고 이번에 또 열린 것이었다.
도진은 이세계의 사람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천마의 자격으로 진나라의 여황 주서린과 함께 이 협의회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었다.
오늘은 쓰레기 배출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왔고 도진이 발언했다.
"이미 몇 번이나 나왔던 문제이지 않습니까.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배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멸망할 것 이쪽의 쓰레기, 저쪽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버리는 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안일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쑥불쑥 나오는 이야기.
이쪽에서 나오는 쓰레기, 그리고 저쪽의 탐사 등 여러가지 활동 중에 나오는 쓰레기를 어차피 붕괴할 세계이니 거기에 매립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 보인다.
말 그대로 '이쪽'도 아니고 저쪽, 심지어 멸망할 세계고 못 쓰게 될 세계인데 길게 볼 것도 없고 불필요한 쓰레기 같은 건 저쪽에 다 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에 관한 생각은 곧 폐기되었으니.
"그쪽 세계의 문물이 이 세계에, 그것도 과거에 끼어들지 않았습니까. 단순한 책이 아닌 쓰레기 같은 것이 그렇게 우리 세계의 과거에 끼어든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
그래. 그것이었다.
직감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래선 안 된다거나 불길하다는 감정론도 아니고 과학적인 어떤 조사 결과 이전에.
당장 그쪽 세계의 '문물'이 이쪽 세계의 과거에 편입된 사례가 있지 않은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이쪽 세계를 뒤바꾸어 놓은 무공이란 것이다.
그와 같은 식으로 현대에 버린 쓰레기가 이쪽 세계의 아득한 과거에 끼어든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의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모르는 이상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이 논리로 도진은 위서린과 함께 초기부터 저쪽 세계에 쓰레기를 버리자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일축하고 여러가지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엄격하게 쓰레기 등에 관한 문제를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여기서 폐회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도진은 위서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장을 나와 대기실로 나가니 진나라의 호위 무인들 사이로 특히나 눈에 띄는 '고양이'가 한 마리 보인다.
크기는 메인쿤에 버금가는데 얼굴은 노르웨이숲의 아기 고양이를 닮은 듯 동글동글하여 귀엽다.
특히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꼬리와 전체적으로 폭신폭신해 보이는 부드럽고 풍성한 털이 그 귀여움을 배가하여 시선을 사로잡는 특별한 외모다.
냐아앙.
타악!
도진이 나오자 가볍게 점프하여 안겨드는 고양이.
"그래, 솜이야."
아니, 천산설표(天山雪豹) 솜이였다.
천산에 산다 하여 천산설표라 불리던 영물로 도진과 인연이 닿아 이쪽 세계의 한국에 흘러들었던 세 마리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성체'로 성장한 녀석이다.
호랑이에 버금가는 덩치까지 자랐다가 영물이란 이름에 걸맞는 성장을 이루면 환골탈태하여 새끼 고양이만큼이나 작아진다.
도진의 도움으로 환골탈태에 성공하고 내단을 품은 솜이는 그러나 몇 년 사이에 거묘(巨猫)라 해야 할 만큼 자랐는데, 내단의 성장과 함께 덩치도 조금 커진 것이었다.
도진과 함께 하는 '산책'과 '운동'이 내단의 성장을 촉진하였고 그에 걸맞게 육체 또한 다시 성장한 것이다.
-아주 먼 이야기겠지만 솜이의 내단이 성장하면 또 호랑이만큼이나 커질 지도 모르겠구나.
스승 위지혁은 그렇게 말했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물은 지극히 오래 사니 이무기가 그렇듯 오랜 세월 도를 닦으면 그렇게 커질 수 있었고 또 한 번의 환골탈태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등선(登仙)을 할 지도 모를 일이고.
물론 아주 먼 이야기니 지금 생각할 건 아니었다.
냐아앙.
지금 생각할 건 개냥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솜이가 귀엽다는 거다.
"…저도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여황님."
싱긋 웃으며 도진이 솜이가 앉은 어깨를 위서린 쪽으로 내밀었고 위서린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쓰담쓰담, 솜이의 풍성한 털을 쓰다듬었다.
조금은 낯을 가리던 솜이는 이제 완전히 사회와 자신의 내기(內氣)에 적응하였고 위서린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본래 감당하기 힘든 양기(陽氣), 뜨거운 기운 때문에 덩치를 키우는 설표의 특성상 인간의 체온마저도 민감하게 느껴 평범한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던 솜이였으나 이제는 그 정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오히려 '귀여운 나를 더 정성스레 쓰다듬어라 닝겐!' 같은 도도한 표정이라 도진이 피식 웃게 만들었다.
그렇게 솜이를 쓰다듬으며 릴렉스한 위서린은 진나라의, 쉬르네폴리아의 바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바할라로 떠났다.
그리고 혼자가 된 도진은 미국은 물론이요 세계에서도 첫손에 꼽는 유명한 공방을 찾았으니 다름 아닌 명성공방이었다.
천마의 검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 우벽진과 그 아들 내외, 그리고 손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명성공방은 LA에 커다란 지부를 세웠다.
본래 그곳에는 바다에 인접한 곳에 자리한,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존앤집스 공방이 있었으나 두 대표 중 한 명인 존 스미스가 무형독에 얽히면서 크게 명성과 세력이 쇠퇴하였다.
그 공백을 새로 지부를 낸 명성공방이 채웠고 짧은 시간만에 LA 최고의 공방이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연락을 하고 갔기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안에 들어섰다.
공방 구역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개인적인 공간으로 향했는데, 바로 명장 우벽진의 공방이었다.
"왔는가."
"네. 잘 지내셨나요?"
"안 하던 걸 하려니 조금 어색하긴 해."
우벽진의 말에 도진이 스윽 웃었다.
언제나처럼 불의 흔적이 가득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데 머리와 수염은 잘 정돈된 것이 조금 언밸런스하다.
짧게 인사를 나눈 도진은 우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백설을 꺼내 우벽진에게 건넸다.
백설(白雪).
도진이 우벽진에게 받은 새하얀 첫눈과 같은 명검으로 학창 시절을 함께 하였고 무형독을 상대하면서 한 번 부러지고 만 검이다.
도진은 그렇게 부러진 백설을 챙겨 우벽진에게 다시 맡겼고 우벽진은 성장한 도진에게 걸맞는 검으로 재탄생시키겠다고 약속했었다.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스릉-
도진에게 건네받은 백설을 우벽진이 뽑았다.
부러졌던 백설의 검날은 그 이름처럼 새하얗게 흔적도 없이 이어져 있다.
지금도 명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검은 그러나 아직, 우벽진과 도진이 바라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미완성이었다.
까아앙-! 까아앙-!
우벽진이 백설의 검날을 달구고선 내공을 담아 특별한 방법으로 두드리기 시작했고 도진이 곁에서 그 작업을 신안(神眼)으로 지켜보았다.
우벽진은 2년 가까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망치를 두드렸고 백설을 고쳤다.
그렇게 고친 백설을 들고서 도진을 찾아와 말했었다.
-부끄럽지만, 자네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아.
당시의 백설만 해도 우벽진의 역작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부족했다.
우벽진의 성에 차지 않았고 도진의 눈에도 아쉬움이 보였다.
그 아쉬움을 채울 방법이 우벽진에게는 있었으니 다른 게 아니라 도진이 꾸준히 백설에 천마기를 담아 그것이 깃들게 하고 주기적으로 우벽진이 특수한 방법으로 담금질하는 것이었다.
위지혁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크게 감탄하고서는 도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단하구나. 과연 명장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아느냐, 제자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저것은, 천마신검(天魔神劍)을 만드는 방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