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화
인생은 뽑기다.
한때 엄청난 유행을 몰고 왔던 말이었다.
-수십 번을 뽑아야 하는데 나온 결과를 바꿀 수는 없음. 이게 뭐냐고? 니 인생임 ㅋㅋㅋㅋㅋ
얼굴, 키부터 시작해서 부모, 태생까지도.
가장 낮은 별 하나부터 시작해 별 다섯 개, 여섯 개, 심지어 열 개까지.
여기에 각 항목당 꽝과 대박이 있어서 별이 열 개라 해도 하등 쓸모없는 영역에서의 열 개라면 의미가 없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적어 올리는 게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오광현이 도진의 옆에서 말했다.
"오태재 부사장님이 미국 쪽 피지컬 테크에 제법 투자를 하셨는데 이번에 꽤 크게 성공을 하셨죠."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지만 사실 대련과 관련이 상당한 이야기다.
지극히 고차원적이긴 하지만 근본을 따지고 보면 무림인 사이의 대련 또한 몸을 이용한 싸움이다.
다만 그 싸움에서 서로의 '수 읽기'를 하는 게 커다란 차이가 된다.
사람의 몸은 수많은 뼈와 관절 그리고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아주 많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수많은, 아주 많은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무수(無數)하지는 않다는 것.
도출되는 값이 한정된 범위 내에 있으니 예측이 가능하다는 거다.
시선과 근육, 관절.
어디를 보는지 읽어내고 어깨와 허리, 발끝까지.
움직임을 정확히 읽어낼 수만 있다면 상대가 어디로 움직이고 어디를 노리며 어떻게 공격하는지 '예지'마저 가능하니.
타악!
오대용이 견제를 위하여 내뻗은 주먹을 오무기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종이 한 장 차이로 맞지 않는 위치에 정확히 진각을 밟고선, 역으로 주먹을 뻗느라 비어 버린 요대용의 갈비뼈를 타격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파앙!
그리고 그 수를 읽은 오대용은 몸의 탄력과 내공의 힘으로 피해없이 그 공격을 튕겨 내며 반동을 이용한 발차기로 오무기의 턱을 노렸다.
오무기는 그것을 튕겨난 상체를 물 흐르듯 유연하게 뒤로 눕혀 피하면서 오대용의 오금을 노리는 발차기로 응수한다.
서로를 극한까지 읽어 예지의 영역에 이르는 수 싸움.
이것이 바로 무림인들 사이의 싸움이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은 이 무림인들 간의 수 싸움을 풀어내기 위하여 연구하였으니 무공이 중심이 된 시대답게 국가 주요 사업으로 채택한 나라가 적지 않을 만큼 그 판이 컸다.
수 싸움. '경우의 수'라는 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수학, 그리고 과학으로 얼마든지 접근하여 풀어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막대한 지원 아래 이미 상당한 성과가 나왔고 A-3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무림의 공시생들에게는 필수인 '초식의 정석'이란 책이 있을 정도였다.
시선이 어디를 향하면 어디가 우선 순위이고 어깨의 각도에 따라 타격 가능한 범위는 어쩌고 저쩌고…….
책은 무지막지하게 두껍지만 내공의 존재가 또 인간의 뇌를 일깨워 그걸 결국 모두 외울 수 있게 해 준다.
오대용은 비록 배경의 힘이 컸다지만 그것만으론 결코 입학할 수 없는 숭무고에 입학할 만큼의 재능이 있었고 그 초식의 정석을 다 외웠다.
그러나.
퍼엉!
쿵. 쿵. 쿵.
상쇄되지 못한 커다란 소리가 터지고 오대용이 힘을 해소하기 위해 무거운 걸음으로 물러났다.
수 싸움에서 오무기에게 한 번 밀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오광현이 말했다.
"과학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무공까지도 해체해서 분석해 버리니까요."
이 수 싸움을 인공지능이 배우도록 하여 사람 혹은 또 다른 인공지능과의 대련을 통해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프로젝트까지 있다고 했다.
마냥 웃을 수 없는, 언젠가는 화경에 도달하는 인공지능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퍼펑!
"과학이 인간의 직관을 정말로 대체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모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오대용은 마치 기계처럼 정석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수 싸움에 임했지만 정석을 따르지 않는 오무기가 그런 오대용을 한 수 이상 앞서고 있었다.
그것이, '재능'의 차이였다.
범재와 천재 사이에 놓인 절망의 벽이요 인터넷에서 말하던 별 한 개짜리와 별 세 개짜리 사이에 놓인 격차다.
오대용은 배우고 익힌 대로 수를 읽지만 오무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재능이, 감이 그것을 본능의 영역에서 처리해 주니까.
'시선이 어쩌고 어깨가 어쩌고 관절, 근육이 어쩌고'를 의식하여 할 필요 없이 재능이 본능의 영역에서 처리하여 주니 오대용보다 한 수를 앞설 수 있는 것이다.
"무기도 대용이도 절정이라고 하지만 사이의 격차는 명백합니다."
둘 다 초절정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퀄리티'에서 차이가 난다.
탄탄한 기본기를 다지긴 했으나 고차원의 영역을 다룰 재능이 없는 오대용과는 달리 오무기는 벽을 넘어선 영역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재능이 있었기에.
"바할라에서 꽤 많이 배웠나봐?"
수 싸움을 하는 중에 그렇게 이죽일 여유마저 보일 수 있었다.
"……."
오대용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오무기가 이죽이느라 드러난 호흡의 틈을 찔렀다.
"……!"
퍼퍽!
묵직하게 내지른 오대용의 주먹을 오무기는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했다.
읽었으나 대처할 틈과 호흡이 부족했던 탓이다.
…까득!
극히 미세한 대련에서의 손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존심의 스크래치에 오무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근!
그리고 결심했다.
쿠구궁!
"……!"
오대용의 눈이 조금 커졌다.
비등했던 내공이, 오무기의 내공이 갑자기 폭증했기 때문이다.
오무기도 그렇지만 오태재 또한 재능이 있는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투자한 건 재능이 없는 범재들을 위한 분석이 아닌 '내공의 증가'였다.
약리지의 연구 성과에서 파생된 것 중 하나로 일차원적인 내공 흡수 효율을 넘어 몸속 내공의 효율 증가를 연구하는 팀에 후원을 하였고 그 결실이 오무기를 통하여 드러난 것이었다.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이는 오광현 또한 예상치 못했던지 눈에 흥미가 묻어났다.
오무기가 이길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 수단이 내공의 증가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쿠쿵! 퍽!
수 싸움에서 밀리는데 내공에서도 밀리니 오대용은 연신 물러나야 했다.
착실하게 점수를 따기 위해 아까는 열 번의 수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다섯 번만으로 때려넣는 형국이다.
이런 식으로 손해가 쌓이면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
오광현이 말했다.
"분명히 이길 자신을 가지고 신청한 대련이었을 텐데, 말리는 게 좋지 않았겠습니까?"
도진이 그 말에 옅게 웃었다.
"결정은 스스로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걸 제가 하지 말라고 할 자격은 없죠. 권유야 할 수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그 권유라도 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오광현의 의도는 명백했다.
왜 말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숨길 게 아니었기에 도진은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예?"
"말 그대로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도진의 시선이 오무기의 공세를 묵묵히 받아내는 오대용을 담았다.
사자군 오군성의 성명절기 사자패권(獅子覇拳).
그 사자패권의 고급 초식을 오무기가 강력한 내공을 담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지근거리에서 허벅지를 노리는 낮은 발차기가 만들어낸 찰나의 경직을 이용하여 마보(馬步) 자세에서 포탄처럼 쏘아지는 주먹을 방어를 무너뜨리기 위해 꽂아 넣는다.
마보 자세로 인해 내지르는 주먹의 사정거리에 가슴팍의 빈틈까지도 찰나에 고려해야 하지만 그 과정을 재능으로 생략해 버려 오대용이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수를 놓았다.
그로 인해 발차기로 자세가 무너지고 주먹으로 방어까지 깨졌어야 할 오대용은.
쿵!
"……!"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졌어야 할 다리가 굳건히 몸을 받치고 섰으며 상체를 지키던 팔 또한 밀려났을지언정 깨지지 않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멈칫, 오무기가 굳어 버렸고 오대용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쾅!
"극."
오무기의 잇새로 흘려내지 못한 충격이 소리에 묻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수치스러움이 장작이 되어 기세를 미친듯이 타오르게 만들었다.
꽈광! 뻐버벅!
날뛰는 기세가 그대로 묻어나는, 그러나 본능이 철저하게 계산한 초식들이 오대용에게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그것을 감내하는 오대용을 지켜보며 도진이 입을 열었다.
"재능은 대용이에게도 있습니다."
"대용이에게 말입니까?"
오광현이 흥미를 갖는다.
자신은 보지 못한, 천마이기에 볼 수 있는 어떤 빛나는 재능을 기대했다.
하지만 도진은 오광현의 기대와는 다른 재능을 말했다.
"네. 노력하는 재능이죠."
"…노력."
한껏 실망한 기색이 미세하게나마 말에 묻어나고 말았다.
혹자는 노력도 재능이라고 하지만 글쎄.
노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설령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해도 천재라면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다고 오광현은 믿는 사람이었다.
도진은 오광현의 그런 생각을 쉽게 읽어냈다.
"맞아요. 노력은 안타까운 이야기죠. 똑같은 노력이라면, 천재가 하는 노력이 훨씬 더 대단하고 훨씬 더 클 테니까요."
당장 지금의 대련이 그렇다.
오무기가 구사하고 있는 사자패권의 고급 초식들은 사실 오대용도 알고 있는 것들이다.
허나 그것을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재능'이 오대용에게는 부족했기에 오무기를 상대로 꺼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좀 힙스터 기질이 있어서요."
도진이 씨익 웃었다.
"가치를 좀, 다르게 매기고 있어요."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쿵!
오대용의 뒤로만 향하던 발이 방향을 바꾸어 힘차게 바닥을 내딛었다.
"……!!"
지극히 평범하고도 간단한 그 일보(一步)가 믿을 수 없게도 시종일관 오대용을 몰아치던 오무기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호흡의 틈.
그리고 초식과 움직임 사이의 틈을 절묘하게 비집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엇?"
결코 낮지 않은 경지였던 오광현이 짧은 순간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재능없는' 오대용이 하기엔 너무나 대단한 한 수였기에.
"오무기 전무님이 구사하는 초식은 대용이도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에요. 그리고 대용이는, 적어도 연습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실전에서 찰나에 생각하고 또 계산하여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재능은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오대용은 그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습하고 또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실전에 그것을 녹여내고자 하였으니 바할라에서의 수많은 대련이 그 노력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오무기에게 밀렸으니 그것은 의미없었던 것일까?
아니. 아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오대용은 오무기의 재능에 맞서 싸울 수 있었고 결국,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았기에 계속된 수 싸움 속에서 비로소 한 번. 오무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꾸욱-
내딛은 진각에서 시작된 힘이 커지고 또 커져 이내 오대용의 주먹에 깃들었다.
마침내 붙잡은 기회에 사용할 초식은 지극히 평범한 내지르기다.
허나 거기에 오대용의 무인으로서 쌓은 '평생'이 깃들어 있으니 그것은 특별해진다.
천(穿).
오군성의 무공에서 중시하는 이치 중 하나.
거침없이, 강렬하게 내뻗어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는 기세를 사자패권은 중요시하며 그렇기에 사자천권(獅子穿拳), 사자의 기세를 가지고 내뻗는 기세를 주먹에 담을 수 있는 것을 사자패권의 입문으로 본다.
때문에 오성의 직계들은 패도적인 무공을 구사하곤 하지만 깨달음이 깃들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공허한 요란함이다.
천(穿)은 단순한 꿰뚫음이 아니다.
그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그것이 얼마나 단단한 벽이라도 결코 부러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결코 멈추지 않고 나아감으로써 이내 뚫어내는 것이다.
뿌득!
'……!'
오무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초식으로도 내공으로도 오대용을 압도하고 있는데.
그런 내공으로 감싼 초식이 평범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먹에 뚫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오무기의 스스로마저 속이는 아집일 뿐 주먹은 평범하지 않았다.
일점을 꿰뚫는 주먹은 완벽했다.
평생을 고련하였고 결코 멈추지 않은 주먹이었다.
기초 무공.
거기에 한해서만큼은 그 어떤 천재와 견주어도 오대용의 노력은 빛을 바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주먹이었기에 오대용의 주먹엔 이치가 깃들어 있었고 그 이치가 바로 사자천권(獅子穿拳).
사자의 기세로 꿰뚫는 주먹이다.
도진은 오대용의 재능이 기껏해야 별 두 개라는 악플을 본 적이 있었다.
-ㅋㅋㅋ 다른 건 잘 뽑았는데 하필 오성 출신으로 무공을 개조졌네 ㅋㅋㅋ
-별 두 개 정도면 개망캐 아니냐 ㅋㅋㅋ
-조졌지 ㅋㅋ 별 세 개만 됐어도 어케 했을 텐데 두 개면 그냥..ㅋㅋ 태생부터가 조졌으니 족망 ㅋㅋㅋ
태생.
한계를 결정짓는, 넘을 수 없는 벽.
'별 두 개는 딱 거기까지이고 아무리 발악해도 그 너머로 갈 수 없다'는 낙인.
오대용은 그 낙인에 한때 절망했으나 이내 일어나 걸었다.
결코 도달하지 못할 '태생의 한계'를 원망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절망하는 대신 계속 걸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도달했다.
별 두 개도 승급해서 세 개가 될 수 있고 네 개, 다섯 개, 이내 열 개에도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도진은 그런 가능성에 도달하여 이내 달성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고 그런만큼 더 가치있게 여겼다.
꿰뚫린 오무기가 허공을 나는 걸 보며 도진이 말했다.
"왜 대련을 말리지 않았느냐고 하셨죠. 간단한 이야기예요."
털푸덕!
"대용이가, 이길 싸움이었으니까요."